[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보수 지금 지킬때 아니다..창조적 파괴로 거듭나야

전정홍 2017. 4. 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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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게임·비정규직 보호..먼저 말할 수 있어야
"재벌개혁 핵심은 지배구조 아닌 일감몰아주기 근절"
'보수(保守)'의 위기다. 지난 10년간 정권을 잡았던 '보수정권'이 불과 몇 개월 만에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리고 있다. 지난 17일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지만, 당선 유력한 후보조차 없이 '전략적 지지'를 고심해야 할 정도로 코너에 몰려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가진 것을 지키는 데만 집중해온 보수지만 이제 살기 위해선 '창조적 파괴'를 통해 바뀌어야만 한다.

매일경제신문과 LG경제연구원이 매년 진행하는 경제인식조사에 따르면 올 1월 기준 보수층 비율은 전체 국민의 29.9%로 그간 마지노선 역할을 해온 30%의 벽이 무너졌다. 10년 전 이명박 대통령 취임 당시(2008년) 37.6%와 비교하면 전체 인구의 8%가 보수를 떠난 셈이다. 같은 기간 9.2%에서 16.6%로 급증한 정치 무관심 세력으로 보수층이 급격히 이동했다.

결국 진보의 약진보다는 보수의 논리가 더 이상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게 몰락의 진짜 이유다. '성장을 통한 분배'라는 보수정권의 경제 공식이 깨지며 보수의 핵심가치인 '시장 경제'에 대한 신뢰 자체가 무너진 탓이다. 저성장이 고착화되며 경제 정책의 실패에 따른 책임도 있지만, 소득 양극화에 따라 사회 내부에서 커지는 파열음을 막지 못한 게 결정적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1분위) 가구의 지난해 월평균 가구 소득(명목 기준)은 5.6% 줄어든 데 반해 소득 상위 20%(5분위) 가구 소득은 2.1% 증가했다. 소득 상위 20% 가구의 소득이 하위 20%의 몇 배가 되는지 따져봤더니 2015년 4.22배에서 지난해 다시 4.48배로 올랐다.

양극화는 크게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됐다. 고속성장을 이룬 이면에서 성장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복지 시스템은 덩치만 커졌을 뿐 비효율성으로 인해 사회 내부의 소외계층, 이른바 '사회적 패자'들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보다 큰 문제는 한국 사회 내에서 경제적 '성공'이 상당수 재벌의 정경유착과 같은 거대담합구조, 부동산 투기와 같은 비대칭적 정보를 활용한 투자를 통해 이뤄져 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른바 '반칙'이 횡행하면서 일반 플레이어들이 더 이상 시장경제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기본적 '게임의 규칙' 자체를 불신하기에 이르렀다.

전망은 더 어둡다. 경제·사회 변화가 가속화하고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 성장의 과실에서 배제되는 패자들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처럼 '패자'가 '승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계속된다면 한국에 제대로 된 미래는 있을 수 없다. 보수가 살기 위해선 먼저 바뀌어야 한다. 정말로 보수의 가치를 지키고자 한다면 진보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스스로 부술 것은 부숴야 한다. 지금까지 진보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복지나 분배와 같은 의제에 대해서도 먼저 보수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분배'와 '공정'에 대한 문제를 정면에서 다뤄야 한다. 한국이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장 만능주의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만큼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나눠야 할 것인가'를 미리 이야기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과 같은 주장을 보수 진영이 수용해야 한다. 노동계와 진보 진영은 올해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려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기업계의 반발에 부딪혀 최종적으로 시간당 6470원으로 정해졌다. 1만원까지는 당장 무리라 하더라도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적극적인 최저임금 인상은 보수 진영도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 격차 해소도 해묵은 과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목표로 임금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월 말 기준 5인 이상 사업체의 비정규직 임금은 157만3000원으로 정규직 433만7000원의 36.3%에 불과하다. 격차만 276만4000원에 달한다.

일손이 부족한 일본은 지난달 아베 신조 총리의 노동개혁과 함께 '동일노동·동일임금' 정책 시행을 확정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 선진국들도 잇달아 이 같은 원칙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유엔과 국제노동기구(ILO)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기본적 인권으로 규정한 지 60년이 넘었다. 한국에서도 1989년에 개정한 남녀고용평등법에 이 원칙이 명문화됐지만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임금격차 해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비효율적인 복지 시스템을 정리하는 '복지 개혁'도 반드시 필요하다. 올해 복지예산은 129조5000억원으로 2013년(97조원)과 비교하면 4년 만에 34%나 증가했다. 하지만 실제 예산을 뜯어보면 기초연금을 포함한 공적연금과 기초생활보장 확대 등에 따른 의무지출이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노인이나 소외계층을 위한 예산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복지시스템의 비효율과 중복을 없애 마련된 예산으로 특정 소외계층부터 기본소득제를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조세 시스템 개혁은 미룰 수 없다. 최근 법인세 인상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우선과제는 아니다. 조세개혁의 핵심은 공정과세의 실현이다. 예컨대 비과세·감면을 줄이고 실효세율을 높이는 것도 그 일환이 될 것이다.

대기업의 법인세 실효세율은 지난해 기준 19.6%에 그치고 있다. 실효세율이 29.55%인 독일이나 26%인 미국과의 격차는 아직 크다. 비과세·감면이 모두 기득권층 보호 수단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기업 경쟁력을 높이던 시대는 지났다. 연구개발(R&D) 공제를 비롯한 비과세·감면은 감축돼야 한다.

향후 복지예산이 늘어날 경우 증세는 불가피하다. 이때 국민 동의를 얻기 위해선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고소득자 증세가 이뤄져야 한다.

높아진 '반기업정서'도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다. 2%대에 머무르고 있는 성장률을 높이고 민간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는 것은 한국 경제의 지상과제다. '반기업정서'의 수렁에 빠진 상황에서는 규제프리존특별법과 같은 규제완화를 포함한 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이 국민 동의를 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반기업정서'의 이면에는 창업자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2·3세들의 잘못된 경영관이 자리하고 있다. 오너들의 기업가정신이 쇠퇴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에도 무감각해지고 있다. 그동안 법인세 인하부터 규제완화까지 기업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각종 정책을 펼쳐 왔지만 혜택은 소수 기업인들에게만 돌아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결국 '낙수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반기업정서'만 더욱 커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졌다. 이런 악순환의 결과 등장한 '재벌 개혁' 목소리는 결국 기업이 스스로를 외통수로 몰아간 결과다.

재벌 개혁의 핵심은 기업지배구조 개혁보다는 일감 몰아주기와 같은 불공정행위를 방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당장 급격한 지배구조 파괴는 큰 실익이 없다.

이를 위한 공정거래 관련 법률들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사실상 실천의 문제다. 이런 분야에서의 기업 불법에 대해선 '무관용의 원칙'을 적용하고, 징벌적 배상제도 강화해야 한다. 기업들 스스로도 현재 문제점을 방치하면 '사회적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거창하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거래 관계에서의 준법경영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장경제는 대한민국의 번영을 견인해 왔지만 이제는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기에 더욱 보수는 변화해야 한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에 대하여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변화를 수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위기에 처한 보수가 응해야 할 도전이자 책무이다.

[백용호 이화여대 교수(前 공정위원장) / 정리 = 전정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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