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힘이 세다

입력 2017. 4. 2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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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책에 미친 사람이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일까. 그는 50대 이후 시력을 잃었다. 그래서 책을 읽어주는 사람, 즉 독사(讀師)를 고용했다. 그가 바로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구엘이다. 책의 중독성은 보르헤스의 육신의 눈을 앗아갔지만, 그는 그 대가로 영혼의 눈을 얻었다. 그리고 “책은 인간의 도구 중 가장 놀라운 것이며, 신체의 확장인 다른 도구들과는 달리 기억력과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작가로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는 책, 그 상상력의 보고와의 만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책을 찾아 헤맨 인간’ 보르헤스, 그는 마침내 20세기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보르헤스처럼 책의 세계에 빠져 ‘환상의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보통의 평균인이라면 누구나 책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은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책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라도 한줌의 ‘교양충동’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책과 더불어 살 수 있을까.

‘세계 책의 날’, 더 정확하게는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World Book & Copyright Day)을 보내며 ‘책과 인생’이라는 진부하지만 무엇보다 절실한 주제를 생각해 본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와 스페인의 세르반테스가 세상을 떠난 날이자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책을 사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했던 ‘상트 호르디’의 축일인 4월 23일, 유네스코는 1995년 이 날을 세계 책의 날로 제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올해도 세계 책의 날 행사가 서울 청계광장 등지에서 다양하게 열렸다. 전통대로 책과 장미꽃도 나눠줬다. 예년의 경우를 보면 서점의 입장에서는 책을 나눠주는 행사를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평소보다 매출이 조금이라도 오르는 ‘동반구매효과’를 낳기도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단발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독서풍토를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승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독서 인구는 사뭇 초라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2015년 전국 성인의 65.3%가 1년 동안 한권 이상의 책을 읽었고, 성인 연평균 독서량은 9.1권인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 국민 독서율은 지난 조사(2013년)에 비해 6.1% 포인트 감소했다. 독서율을 높이기 위한 독서 진흥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는 정녕 책을 읽지 않는 민족인가. 강단(講壇)의 인문학은 위기일지 모르지만 장외(場外)의 인문학은 차라리 열풍에 가깝다. 그것은 지적 허영이 아니라 지적 갈증이다. 아무리 고답적인 인문학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대중화하고 실용화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고도의 지적 상품으로 유통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문화콘텐츠의 원천인 책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인터넷서점 예스24는 세계 책의 날을 맞아 2007년부터 10년간 판매된 서양고전문학 분야의 누적 순위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1위, 톨스토이의 인생관이 담겨 있는 ‘톨스토이 단편선’이 2위,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3위, 괴테의 ‘파우스트’가 4위, 단테의 ‘신곡’이 5위다.

이 얼마나 고색창연한 작품들인가. ‘신곡’은 1321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거의 700년 전 중세시대의 작품이다. ‘햄릿’ 또한 1601년에 쓰여 졌다. 이 ‘고릿적’ 작품들을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찾는 것은 그것이 동시대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는 않지만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인간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고전’이다. 작가이자 종교사상가로서의 톨스토이에 대한 우리의 사랑 또한 각별하다. 일찍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시대에도 이광수, 투르게네프와 함께 가장 많이 읽힌 3대 작가로 꼽힌 인물이 바로 톨스토이다.

독설로 유명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고전을 “사람들이 칭찬은 하면서도 읽지는 않는 책”이라고 정의했다. 읽지는 않지만 칭찬을 한다는 것은 곧 고전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 문학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한다는 말 아닌가. 그런 관심을 수면위로 끌어내야 한다. 최근 다양한 ‘에디션’으로 현대적 감성을 입힌 고전들이 재출간되면서 특히 젊은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고무적인 일이다.   

고전 작품 중에는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것들도 적지 않다. 고전은 어느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이 내세운 캐치 프레이즈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청춘’인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고전의 매력이다. 그 치명적인 고전의 유혹을 구체화하고 최적화하는 데서 독서인구 확충의 돌파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최근 10년 동안 서양고전 문학 중에서도 ‘탐구와 분석’이 요구되는 셰익스피어를 가장 많이 찾은 수준 높은 독자들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책을 가까이 하고 책을 아끼는 전통의 ‘선비나라’, 하도 바보처럼 책만 읽어 간서치(看書癡)라 불린 대문장가 이덕무의 나라다. 그처럼 독서를 인생 최고의 낙(樂)으로 삼는 ‘책 바보’가 되는 것은 어떨까.

◆ 김종면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

서울신문에서 문화부장 등을 거쳐 수석논설위원을 했다. 지금은 국민권익위원회와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로 세계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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