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가계부채 악화·소비자 역선택 조장하는 '주류대출' '무이자' 미끼 폭탄 돌리기..자영업자만 '봉'

노승욱 2017. 4. 2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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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거래선 뚫으려 상환 능력 안 보고 수천만원 빌려줘 부실 초래
무이자 대출을 미끼로 불완전 창업과 주류 독점 납품을 종용하는 ‘주류대출’ 관행이 자영업자를 울리고 있다. 사진은 서울 종로의 먹자골목 전경. <매경DB>
은퇴 후 주점 창업을 알아보던 자영업자 김 모 씨(54). 창업자금이 다소 모자라 대출을 알아봤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는 탓에 1금융권에선 거절당했다. 할 수 없이 2·3금융권을 알아봤지만 고금리가 부담돼 망설여졌다. 그러던 중 A프랜차이즈로 창업하면 5000만원까지 ‘무이자 대출’이 가능하단 광고를 보고 결국 A프랜차이즈로 창업했다.

문제는 이때부터. A프랜차이즈는 창업 후 2년간 본사가 지정한 B주류도매상에서만 술을 납품받을 것을 강요했다. B도매상은 다른 도매상보다 비싼 가격에, 그것도 ‘카스’ 대신 ‘맥스’만 납품받을 것을 요구했지만 김 씨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설상가상 불황으로 장사가 안 돼 1년 만에 폐점을 하려 하자 B도매상은 대출금의 20%(1000만원)를 위약금으로 요구했다. 김 씨는 “알고 보니 5000만원 대출금도 무이자가 아니었다. 비싼 주류 납품가격에 이자가 반영돼 있었다. B도매상에 항의하니 그제서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며 시인하더라. 위약금 낼 돈이 없어 억지로 1년 더 장사를 해야 될 판”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특정 도매상으로부터 술을 장기간 납품받는 조건으로 빌려주는 ‘주류대출(잠깐용어 참조)’이 자영업 시장의 시한폭탄으로 떠올랐다. 창업자금이 부족한 예비창업자를 대상으로 ‘무이자’ 대출이라고 꼬드기지만, 사실상 비싼 술값에 반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영업자의 대출 부실을 조장하고 소비자의 주류 선택권도 제한해 단속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주류대출이 뭐길래

▷프랜차이즈 ‘감독’, 도매상 ‘연기’, 제조사 ‘스텝’

1990년대 초반 주류도매면허가 자유화되자 신규 도매상이 난립, 경쟁이 치열해졌다. 도매상들은 처음에는 냉장고, 에어컨, TV 등 주점 영업에 필요한 비품을 무상 지원해주는 식으로 영업을 했다.

그러나 경쟁이 과열되자 급기야 현금 지원까지 등장했다. 창업자금이 부족한 자영업자에게 수천만원을 빌려주고 대신 독점 납품권을 따내게 된 것. 단 도매상은 이를 ‘주류대출’이 아닌 ‘장기대여금’이라고 부른다. 법적으로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받으려면 대부업으로 등록해야 하지만, 장기대여금은 사업자 간 자금거래로 인정되기 때문. 전국 1000개 이상 주류도매상이 신규 거래선 확보를 위해 경쟁하듯 돈을 빌려주면서 주류대출은 도매 영업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주류대출 관행을 악용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수십~수백 개 가맹점을 거느린 프랜차이즈 본사는 자사 가맹점에 대한 독점 납품권을 미끼로 모든 가맹점에 대한 최대한의 주류대출을 도매상이 하도록 하고 매출의 5~10%에 달하는 백마진(리베이트)도 요구했다. 그러면서 예비창업자에겐 “우리 프랜차이즈로 창업하면 ‘무이자 대출’이 얼마까지 가능하다”며 마치 본사가 지원해주는 것처럼 광고했다.

봉구비어도 주류대출을 이용해 가맹점을 모으는 대표적인 프랜차이즈다. 봉구비어에 창업자금이 부족하다며 주류대출이 가능한지 묻자 “신용이 좋으면 5000만원까지 무이자 대출이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어 봉구비어 가맹 담당자는 “대신 창업하고 30개월간 의무적으로 술을 납품받아야 한다. 대출금은 첫 달은 면제고 20개월로 나눠 갚으면 된다. 이를 안 지키면 대출금의 25%를 위약금으로 내야 한다. 주류도매상을 안 바꾸면 문제될 게 없다”며 창업을 종용했다.

신규 거래선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도매상들은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 주류대출(장기대여금)을 해줬다. 부족한 자금은 2·3금융권에서 대출까지 받았다. 실제 홈페이지에 ‘무이자 대출 5000만원’ 팝업광고를 내건 가르텐비어의 한 가맹사업 담당자는 “3000만원은 도매상이, 2000만원은 금융기관에서 빌려서 주고 이자도 대납해준다”며 창업을 종용했다.

하이트진로, OB맥주 등 주류제조사(이하 제조사)도 한통속이다. 제조사는 자사와 친분이 있는 도매상이 신규 거래선을 뚫어야 자사 술이 잘 팔린다는 점에서 도매상과 공생관계다. 때문에 주류대출금의 일부를 ‘매출채권 상환유예 프로그램’이란 명목으로 도매상을 측면 지원한다. 현금을 주는 방식이 아닌, 단순히 대금 납부 기간을 유예해주는 방식이다 보니 주류대출 부실에 대한 리스크는 온전히 도매상 몫이다. 제조사로선 도매상의 주류대출 영업으로 ‘이익(술 판매)’은 함께 취하지만, ‘손실(주류대출 부실)’은 부담하지 않는 꽃놀이패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우리는 생맥주만 ‘매출채권 상환유예’를 해준다. 도매상 영업에 필요한 운용자금을 지원해주는 건데, 현장에서 무리하게 운용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단 제조사가 의도한 건 아니다”라며 “궁극적으로는 준비 안된 자영업자 창업이 너무 많아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라고 말했다. OB맥주 관계자는 “생맥주와 병맥주 모두 지원한다. 우리한테 제일 중요한 건 도매상이다. 도매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출채권을 유예해주는 것이다. 자금 사정에 따라 유예 규모는 매달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프랜차이즈 본사, 도매상, 제조사, 2·3금융권 등의 공조로 이뤄지는 주류대출은 ‘무이자’란 광고에 혹한 자영업자와 만나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업계에 따르면 주류대출 10건 중 9건은 창업 직전에 이뤄진다. 아직 매출도 확인되지 않은 예비창업자에게 빌려주니 부실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한 도매상 관계자는 “2010년대 초반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출해줬다. 그런데 주류대출 10건 중 3~4건에서 부실이 발생하다 보니 요즘은 신용등급 조회 절차가 생겼다. 그래도 기존 대출 잔금이 얼마인지, 상환 능력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는 상태에서 빌려준다. 부실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도매상끼리 만나면 서로 부실이 얼마인지 물으며 걱정해준다. 그래도 혼자 주류대출을 안 해주면 영업이 안 되니 모두가 문제인 걸 알면서도 계속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토로했다. 주류대출 부실로 인한 손실은 또 다른 피해로 이어진다. 일부 도매상은 장사가 안 돼 폐업한 점주한테 소송을 걸어 끝내 받아내지만 지난한 법적 다툼에 자금 사정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를 벌충하기 위해 도매상은 엉뚱하게도 대출을 잘 갚고 있는 다른 선량한 자영업자에게 납품가를 올리는 식으로 손실분을 전가한다. 마치 과거 휴대폰 시장에서 A소비자에게 보조금을 많이 지급한 대리점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B소비자에게 덤터기를 씌우던 것과 비슷하다. 하이트진로, OB맥주 등이 도매상에 제공하는 매출채권 상환유예 혜택도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이통사에 주는 판매장려금과 닮아 있다. 비싼 납품가 탓에 수익성이 나빠진 자영업자는 또다시 폐업이나 대출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 프랜차이즈의 주류대출 요구→창업 전 주류대출 시행(제조사와 2·3금융권 공조)→자영업자 대출 부실→도매상 자금난→다른 자영업자에 전가→연쇄 부실 등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가계부채·소비자 역선택 조장 심각

▷금융당국도 모르는 ‘사채’…맥주도 주는 대로 마셔야

주류대출의 부작용은 한국 경제 전반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선 금융당국도 파악할 수 없는 ‘숨은 빚’이란 점에서 가계부채 뇌관으로 지목된다. 주류대출은 점주와 도매상 간 사적 자금거래인 탓에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집계조차 불가능하다. 또 형식적으로는 장기대여금이지만, 사실상 이자가 지급되는 대출이란 점에서 ‘불법사금융’의 소지도 다분하다.

업계 관계자는 “주류대출은 자영업자의 술 구매 실적에 따라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까지 집행된다. 전국 1100여 도매상 중 400여곳에서 1곳당 월 2건씩, 건당 1500만원의 주류대출을 한다고 ‘보수적으로’ 가정하면 연간 약 1만건, 1500억원어치의 ‘숨은 가계부채’가 발생하는 셈이다. 특히 주류대출은 자금이 부족한 자영업자에게 창업 진입장벽을 낮춰주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더 고약하다. 돈이 부족해 창업을 못 했으면 애초에 자영업 시장이 덜 과열됐을 테고, 장사가 안 돼 추가 대출을 받는 일도, 주류대출자의 폐업으로 인한 연쇄 부실 사태도 줄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파급 효과를 고려하면 주류대출의 가계부채 확대 효과는 적어도 1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류대출은 납품하는 술이 생맥주냐 병맥주냐에 따라 지원 형태가 조금 다르다. 제조사가 선호하는 술은 생맥주다. 병맥주는 술만 납품하면 되지만 생맥주는 기계까지 납품한다. 기계가 한 번 설치되면 다른 기계로 대체하기 힘들어 독점 효과가 배가된다. 업계 관계자는 “20ℓ들이 생맥주 1통을 납품받으면 1000만원, 2통이면 2000만원식으로 주류대출 금액이 정해진다. 대신 납품가격이 4만원에서 4만1000~4만2000원으로 올라가는 식이다. 심한 경우 4만5000원까지도 올린다. 장사가 잘되는 가게면 하루 2~3통도 납품하는데, 그럼 납품가가 하루에 1만~1만5000원, 한 달에 30만~45만원, 1년에 360만~540만원씩 차이 난다. 무이자라고 광고하지만 사실상 고리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그럼에도 자영업자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지 않아 이런 사정을 잘 모른 채 주류대출을 받는다. 주류대출을 받기 전에는 자영업자가 갑, 도매상이 을이지만 주류대출을 받는 순간부터 갑과 을이 뒤바뀐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소비자도 피해자다. 도매상은 제조사와 결탁해 특정 브랜드 술만 납품하는 경우가 적잖다. 제조사로부터 매출채권 상환유예를 더 받기 위해서다. 제조사는 자사 술을 팔아주는 실적에 따라 상환유예 규모를 달리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비자는 A맥주를 찾아도 점주가 “B맥주(또는 C맥주)밖에 없다”고 해서 A맥주를 못 마시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르텐비어는 홈페이지에 ‘무이자 대출’ 팝업광고를 내걸고 자금이 부족한 자영업자의 창업을 유도하고 있다(사진 왼쪽). 봉구비어 가맹 담당자와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 캡처(오른쪽). 담당자는 30개월간 특정 주류도매상과 거래하면 최고 5000만원까지 주류대출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주류거래질서’ 해치는데 정부는 뒷짐만

▷국세청 “공정위 소관” 단속건수 공개 거부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정부가 나서 주류대출을 근절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 ‘국세청 주류거래질서 확립에 관한 명령위임 고시’ 2조 6항에는 “주류 제조·수입업자는 장려금 또는 수수료 등의 명목으로 금품 및 주류제공 또는 외상매출금을 경감함으로써 무자료거래를 조장하거나 주류거래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주무부서인 국세청은 감독 책임을 타 부서에 떠넘기기 급급하다. 이창준 국세청 소비세과 조사관은 “주류대출도 불공정거래에 해당하는 문제이므로 공정거래위원회 쪽에서 다룰 문제”라고 말했다. 주류거래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에 대해 국세청이 지난해 단속한 건수에 대해서도 “공개할 의무가 없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하명진 법무법인 긍정 변호사는 “주류업체가 창업자금이 부족한 창업 희망자들에게 주류대출을 통해 창업자금을 빌려주는 행위는 대부업 등록 없이 대부 행위를 ‘업’으로 하는 경우에 해당할 수 있어 법 위반 소지가 있다. 또한 주류대출 조건으로 일반적인 공급가보다 비싼 가격으로 주류를 공급하면서 자사 주류만을 취급하도록 제한하는 것은 자영업자와 소비자의 자유로운 주류 선택권을 제한하는 행위다. 이는 공정거래법상의 불공정거래행위(구속조건부거래)에 해당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잠깐용어*주류대출 주류도매상이 자영업자에게 일정 기간 술을 납품받는 조건으로 창업 자금을 빌려주는 영업 관행. 매출이나 상환 능력 확인 없이 주류 납품 실적과 간단한 신용 조회만으로 이뤄져 부실률이 매우 높다. 특정 술만 납품받을 것을 조건으로 내걸기도 해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하고 가계부채를 키운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노승욱 기자 inye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05호 (2017.04.26~05.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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