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말입니다, 안중근은 왜 이토를 저격했을까요

임현철 입력 2017. 4. 2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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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운현, 정창현의 '영웅의 숨겨진 가족이야기' <안중근家 사람들>

[오마이뉴스 글:임현철, 편집:최은경]

 순국 직전 흰색 수의로 갈아입은 안중근 의사
ⓒ 역사인
"코레아 우라!"

무슨 말이냐고요? 때는 바야흐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러시아 어로 "대한 만세"를 외치는 소리입니다. 뜬금없이 웬 안중근과 대한 만세냐고요? 잠시 쉬어 가죠.

요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여기에 지대한 공을 끼친 사람은 스타강사로 <어쩌다 어른>에 나선 최진기, 설민석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사 스타 강사인 설민석의 무한도전 출연과 일제강점기 대한 독립 민세를 외치며 분연히 떨치고 나선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폄하 발언 논란 등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드높인 계기였습니다.

역사란 과거의 유산일 뿐 아니라 미래를 측량할 수 있는 바로미터라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또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접근 방법을 제시한 측면이 강합니다. 이와 때맞춰 "중국의 사드 보복 조치로 인해 중국 공안의 압력에 항저우 임시정부청사가 지난 달 13일부터 휴관에 돌입했다"는 기사까지 등장해 역사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아주적절하게 따끈따끈한 책 한 권이 발간되었습니다. 정운현, 정창현의 '영웅의 숨겨진 가족이야기' <안중근家 사람들>(역사인, 18,000원)입니다. 정운현, 정창현 이들은 왜 안중근 이야기를 들고 나왔을까? 그들이 책 서문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분명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안중근은 어떤 고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을까?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해 6발의 총을 발사한 안중근은 러시아 말로 세 차례 '대한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곧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후 이듬해 3월 26일에 뤼순감옥에서 사형 당했다."(4쪽)

저자들은 "여기까지는 다 아는 이야기다"면서 한 발 더 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이 왜, 어떤 고뇌를 거쳐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겁니다.

"안중근의 '영웅적 거사'만을 추앙하다보니 오히려 그의 '인간적 면모'는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안중근의 "친동생과 사촌형제, 조카 등 안중근 일가가 우리 근현대사에 남긴 발자취는 연구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망각의 역사' 속에 묻혀 있다"고 반성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자조합니다.

"부끄럽고 안타깝게도 (안중근이) 순국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그의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부친의 묘는 북한에 있지만 그의 사후 독립운동에 뛰어든 안태건, 안태순 등 안 의사의 숙부를 비롯해 모친과 친동생 안정근, 안공근도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르고 있다."(4쪽)

이는 부끄러운 우리네 민낯입니다. 정부가 먼저 나서 독립유공자들의 유해와 자료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 발굴해야 하건만 뒷전이라는 겁니다. "친일파 후손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이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숨어 지내기까지 했다"면서 "역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민족은 또다시 역사의 횡포를 만날 것이고, 역사를 통찰할 줄 모르는 민족은 미래로 전질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는 게 별로 없는 안중근 가문의 이야기를 나침반으로 삼을 필요성"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단언합니다.

"오늘날 한중일 3국의 상황은 1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과거 식민지 전쟁의 유제로 세 나라는 역사전쟁, 영토분쟁 등으로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중근의 다자간 통합 정신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중략) 특히 여전히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통일의 여정을 가야 하는 우리에게 남과 북, 해외에 흩어져 있는 안중근 일가의 화합과 만남은 민족정기를 세우고 민족의 통합을 이루는 '통일의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하다."(7쪽)

저 역시<안중근家 사람들> 서문을 본 후 겉으로만 알았던 일제강점기 역사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목차를 살폈습니다. 제1장 안중근 '영웅의 탄생과 죽음', 제2장 부친 안태훈 '투사를 키워낸 안씨 가문의 실질적 리더', 제3장 두 동생 정근과 공근 '해외를 떠돈 독립운동가', 제4장 부친 안태훈과 백범 김구, 제5장 격랑에 휩싸인 안중근의 후예들, 제6장 안중근가의 여성 '묻히고 잊힌 이름들', 제7장 차남 준생의 친일행적과 찾지 못한 유해들, 제8장 동양평화론의 메시지 등이었습니다. 차례 속에 들어있는 안중근 가문의 행적은 곧 우리네 과거의 삶이었습니다.

안중근 우덕순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준비 과정

 왜 안중근가 사람들인가?
ⓒ 역사인
일제강점기 전 대한제국은 풍전등화였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과 대한제국 외교권 상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 강제 폐위와 군대해산.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해외망명을 선택하고 본격적인 의병투쟁에 나섭니다.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 길을 걷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의 모습은 리얼하기까지 합니다.

"거사 5일전인 1909년 10월21일. 안중근은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했다. 목적지는 하얼빈"(34쪽) 이때 "안중근에게 이토의 하얼빈 방문 정보를 알려주고 여비 100원과 권총 두 정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이강이다"(34쪽)면서 거사 전의 상황을 파노라마처럼 그립니다. 이어 안중근이 이강에게 보낸 1909년 10월 24일 편지를 공개하며 독립운동 자금의 열악한 현실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조도선 씨와 함께 저의 가족들을 맞아 관성자에 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관성자에서 십여 리 떨어진 정거장에서 때를 기다려 그곳에서 일을 결행할 생각이오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이 큰일의 성공여부는 하늘에 달렸으나 동포의 기도에 힘입어 성공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곳의 김성백 씨에게서 돈 50원을 차용하니 속히 갚아주기를 천만 번 부탁드립니다. 대한독립 만만세"(37~38쪽)

그리고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이동하는 경로 등을 소상히 밝힙니다. 또한 이토가 도착하는 시간 파악과 거사 장소 등을 위해 찾아간 정거장에서 직원을 대화를 통해 정보를 파악합니다.

"매일 세 번씩 왕래합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특별열차가 하얼빈에서 창춘으로 갑니다. 이 기차는 일본의 대신 이토공을 싣고 모레(26일) 아침 6시에 이리로 지나서 하얼빈 역에는 9시쯤 도착할 예정입니다."(40쪽)

그리고 이토가 차이자거우에서 반드시 내린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안 안중근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우덕순과 2단계 거사준비에 나섭니다.

"우리가 이곳에 함께 머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오. 첫째는 돈이 부족하고 둘째는 유동하의 답전이 매우 의문스럽고, 셋째는 이토가 내일 날이 밝기 전에 이곳을 지나간다면 분명히 일을 치르기 어려울 게요.… 그러니 그대는 오늘 여기 머물러 내일의 기회를 기다렸다가 상황을 봐서 행동하시오. 나는 오늘 하얼빈으로 돌아가겠소. 내일 두 곳에서 거사하면 가장 편리할 것 같소. 만일 그대가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반드시 성공해야 할 것이오. 만일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대가 반드시 성공해야 할 것이오. 만약 두 곳에서 모두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활동자금을 마련한 다음에 거사를 상의합시다. 이것이 만전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41~42쪽)

10월 26일,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상황

 하얼빈 역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
ⓒ 역사인
20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운명의 날.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란 말인가. 이날은 공교롭게 박정희 최후의 날이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7시쯤.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경. 이토 저격 전후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내가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열차가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음악이 연주되었고, 병대(군대)가 경례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차를 마시면서 '하차하는 것을 저격할까, 아니면 마차에 타는 것을 저격할까'하고 생각했는데 일단 상황이라도 보려고 나가 보니 이토는 기차에서 내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영사단 쪽으로 병대가 정열한 앞을 행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뒤쪽에서 같은 방향으로 따라갔지만 누가 이토인지는 분별이 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군복을 입은 것은 전부 러시아인이고 일본인은 모두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중 맨 앞에서 행진하는 사람이 이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러시아 병대의 대열 중간쯤 지점으로 갔을 때 이토는 그 앞에 열 지어 있던 영사단 앞에서 되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병대의 열 사이에서 안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고 맨 앞에서 행진하고 있는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향해 십 보 남짓의 거리에서 그의 오른쪽 상박부를 노리고 세 발 정도를 발사했다. 그런데 그 뒤쪽에도 또 사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혹시 이토가 아닌가 생각하고 그 쪽을 향해 두 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나는 러시아 헌병에게 잡혔다."(44~45쪽)

안중근 의사가 막연히 이토를 저격했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안중근家 사람들>을 읽고 이토 저격 전후의 과정이 숨 막히게 전개되는 줄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에 더해 안중근이 이토에게 쏜 총알 등 현장 상황을 자세히 풀어줍니다.

"안중근이 이토에게 쏜 총알은 모두 세 발이었다. 첫발은 이토의 가슴에 명중했다. 그러나 군악대 연주와 화포 소리가 요란해 아무도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두 번째 발은 이토의 늑골에 명중했다. 그제야 군경과 환영단이 총격사건을 알아채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틈을 타 안중근은 마지막으로 세 번째 총알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이토의 복부를 관통했다. 세 번째 총알을 맞고 이토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45쪽)

"거사에 성공한 후 안중근은 들고 있던 총을 내던졌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신께 감사하는 성호를 그렸다. 그리고는 이내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세 차례 외쳤다.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
그제야 러시아 헌병들이 달려들어 안중근을 체포했다. 안중근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49쪽)

당시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했던 현장에서 총을 맞고 부상을 입은 사람 중 한 명인 다나카는 거사 현장에서 본 안중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시 현장에서 10여 분간 안중근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총을 쏘고 나서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신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음산한 신이 아니라 광명처럼 밝은 신이었다. 그는 참으로 태연하고 늠름했다. 나는 그같이 훌륭한 인물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46쪽)

안중근 의사가 밝힌 이토 히로부미 죄와 국내외 반응

 안중근 의사를 면회하는 동생 정근과 공근 그리고 빌렘 신부.
ⓒ 역사인
안중근에 의해 저격된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사람일까?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 같은 공로로 이토는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당시 일본 정계에서 천황 다음 가는 실력자로 불렸다. 그런 이토를 한국의 30세 의병이 단독거사로 백주에 저격해 사망케 했으니 사건치고는 초대형 사건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사건 당일부터 11월 4일까지 이와 관련된 전보가 9만여 통에 달했다는 점이 그 충격의 강도를 짐작케 한다."(86~87쪽)

안중근이 밝힌 이토 히로부미 죄상은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를 한 죄, 철도, 광산, 산림 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민족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55쪽) 등 무려 15가지에 달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후 국내외 반응이 재밌습니다. 대다수 국내외 한국인과 독립운동 진영과 청나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일본에 기대 일신의 영화를 쫓았던 부일세력 등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다음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황현의 <매천야록>에 소개된 내용과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을 지낸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쓴 안중근 추모 글입니다.

"(의거)소식이 서울에 이르자 사람들이 감히 통쾌하다고 칭송하지는 못하였지만 모두 어깨를 추켜세웠다. 그리고 저마다 깊숙한 방에서 술을 따르며 경하했다."(88쪽)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이 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건 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이름은 만방에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데 죽어 천년을 가오리다"(89쪽)

반면,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에 붙어 지낸 부일배 등은 이토 저격 후 추도식 등을 계획했다고 하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민족자결에서 벗어나 강대국에 빌붙어 지내는 부류들의 어처구니 없는 처사가 어찌 그리 비슷한지 쓴웃음이 나옵니다.

"이토 추도식 개최와 송덕비를 건립하자는 무리들도 생겨났다.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 등은 한성부민회 주도로 민간추도회를 열기로 하고 11월 8일에 장충단에서 추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등 '을사오적'들도 대거 참석했다."(92쪽)

재판 과정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안중근가 사람들> 저자 정운현.
ⓒ 임현철
거사 이후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어 하얼빈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마친 후 중국 뤼순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은 일본의 각본에 따라 진행된 재판이었다고 합니다. 안중근은 1910년 2월 7일부터 총 6회에 걸친 재판 끝에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3차 공판에서 밝힌 거사 결행 이유입니다.

"나는 헛되이 살인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번 거사는 나 일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나는 삼 년간 도처에서 유세도 하고 또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각지의 싸움에 참가했다. 이번 거사도 한국 독립전쟁의 하나로 나는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을 위해 결행한 것이지 보통의 자객으로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나는 피고인이 아니라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68쪽)

대한민국 독립이 어찌 안중근 혼자만의 일이리오! 그의 공판이 진행된 법정을 지켜본 한 외국기자는 당시 안중근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안중근은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가 재판을 받는 동안 법정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열변을 토하면서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혹시라도 이 법정이 오히려 자기를 무죄방면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이었다.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 정도가 아니고 기꺼이, 아니 열렬히 자신의 귀중한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한 모습으로 법정을 떠났다."(74쪽)

이처럼 의연했던 안중근 의사에게도 가족은 연민이었나 봅니다. 안중근은 형 집행을 기다리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 모친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안중근의 효와 어머니의 서릿발 기상이 담긴 편지

 안정근 가족과 도산 안창호.
ⓒ 역사인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나이다."(362쪽)

이에 대해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성녀 여사가 아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 등에서 보인 어머니의 의견에 따라 안중근 의사는 일제 법정에서의 항소를 포기하고 사형을 받아들입니다. 다음은 <안중근家 사람들>에 수록된 조성녀 여사의 편지 전문입니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363쪽)

기막힌 건 안중근 의사의 대한민국 독립에의 결연한 의지와 어머니 조성녀 여사의 서릿발 같은 기상에도 불구, 안 의사의 자녀들은 친일파로 전향합니다. 문제는 조선총독부 기획에 놀아났다는 사실입니다. '박문사 화해극'이 그것입니다. "총독부의 안중근 유족과 이토 후손들을 '대리화해'시킴으로써 내선일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라는 겁니다.

이밖에도 <안중근家 사람들>은 이승만, 김구, 박정희의 인연, '전천후 독립운동가' 동생 안정근, '김구의 오른팔' 둘째 동생 안공근, 사촌동생 안경근 김구 보좌, 안봉근 차남 안민생 해방 조국서 삼대 옥살이, 부인 김아려 일제 감시와 탄압 속에서 고통, 동생 안성녀 서훈 받지 못한 숨은 독립 공로자, 조카 안미생 백범 김구 맏며느리, 독립운동 최고 명문가에 대한 예의 등의 역사적 사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네 역사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부친 안태훈과 백범 김구, 그리고 안중근 의사.
ⓒ 역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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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 SNS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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