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新 청춘백서] 웅변은 은(銀), 침묵은 금(金)?

이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4.22 09:00

수정 2017.05.16 13:58

사진 : Freepik.com
사진 : Freepik.com

입을 닫고 침묵하는 청춘들이 늘고 있다. 고단한 일상에 지쳐서 혹은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에 짓눌려 일종의 방어 자세를 취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직장이나 학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족과의 대화 단절로 이어진다.

스마트폰·컴퓨터 등 디지털 기기 사용 증가도 침묵을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다. 실제로 하루 평균 모바일 메신저 이용 시간은 대화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2015년에 발표한 ‘인터넷 과의존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0명 중 6명은 하루 평균 모바일 메신저를 1~2시간 이상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인 2명 중 1명은 하루 평균 10분도 대화를 안 하는 것에 비하면 오프라인 대화보다 온라인 대화를 더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사람들과의 교류 때문인데 실제로는 대화가 줄어드니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사회적 현상도 청춘들의 침묵에 일정 부분 기여한다. 취준생들은 하루 종일 공부와 시름하다 보니 말할 기회가 생기지 않고 그럴 여유도 없다. 직장인들은 상하 관계가 명확한 구조 때문에 눈치가 보인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찍힐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침묵을 택한다.

얼굴 보고 대화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혼자라서, 눈치 보여서.. 청춘들의 침묵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사진 : pakutas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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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하면 더 불편해”.. 침묵이 편하다

서울 금천구에서 직장에 다니는 이상민(남·33)씨는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직장 동료들과 대화하는 시간은 고작 10분 정도다. 친구들과 만나면 분위기를 이끌며 활발한 편이지만 회사에서는 과묵한 남자로 알려져 있다.

이씨는 “입사 초기에는 대화를 자주 하며 동료들과 잘 지내려고 애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하는 것이 불편했다”고 말했다.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에 대해 “회사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 나에게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을 자주 느껴 자발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씨는 동료들과 대화를 해서 호되게 당한 경험도 있었다. 그는 “어느 날은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단어 몇 개만 남기고 전혀 다른 이야기로 둔갑해서 직원들 사이에 떠돌아다녔다”며 “소문 내용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비참한 내용이었다”라고 고백했다. 이어 “차라리 침묵해서 논란거리를 만들지 않는 게 낫다”며 “앞으로도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개인적인 대화를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끝으로 이씨는 “회사 사람들은 그냥 일하는 동료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다”며 “간혹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는 윤철승(남·34)씨는 집에서 혼잣말을 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사무직에 종사하는 윤씨는 일의 특성상 모바일 메신저로 업무를 지시받고 이행하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윤씨는 “샤워할 때 노래를 부르고 중얼중얼 하는 버릇이 생겼다”며 “예능프로그램을 보다가 대답을 할 때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회사에서 한 마디도 안 하고 퇴근하는 날도 있다”며 일만 하는 기계가 된 것 같아 씁쓸하다고 전했다.

광화문에서 직장에 다니는 박정수(남·33)씨는 점심시간에는 동료들과 30~40분 정도 대화를 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박씨는 “처음에는 회사라는 공통분모 때문에 대화가 자연스러웠지만 지금은 일적인 것 외에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자발적으로 침묵하는 이유에 대해 “대화를 많이 하면 오히려 손해 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동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회사 불만을 이야기하거나 사적인 부분까지 말을 할 때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금방 전달돼 괜한 오해를 사게 돼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다”며 “말은 꼬리의 꼬리를 물어 곤란한 상황까지 발생했다”고 덧붙였다.

박씨는 입사 초기에 팀원들과 회사의 연봉 및 근무체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같은 직원들끼리 스스럼없이 터놓고 이야기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사가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전에 말했던 내용이 오후에 상사가 알고 있었다”며 “그 후 찍혀서 한동안 힘들었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오전에 했던 말이 오후에 상사까지 알 정도면 누군가 보고를 했다는 것이므로 직원들이 조금 무서웠다”며 “그 이후로 직원들에 대한 신뢰가 깨져 최대한 말을 섞지 않는다”고 심경을 전했다.

사진 : Freepi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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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를 꺼리는 사람들.. 사회적 단절 우려

지난해 6월 취업포털 인크루트는 직장인 618명을 대상으로 ‘직장 동료와의 대화 시간’에 대해 설문 조사했다.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51.8%는 근무 시간에 동료와 평균 10분도 대화를 안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10~20분 (29.4%), 20~30분 (10.2%), 30~40분 (3%) 순이었다. 업무 관련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눈 상대는 절반인 50.5%가 5명 미만이라고 답했다. 5~10명과 대화는 35.1%, 10명 이상은 14.4%에 불과했다.

응답자들은 업무 처리를 할 때 전화 (39%), 이메일 (24%), 메신저 (23%) 순으로 사용했으며, 같은 팀원이라도 대화를 한 번도 안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라는 답변이 34%였다. 팀원 간 서로 대화가 없는 이유에 대해 개인적으로 부딪히고 싶지 않아서 32.9%, 업무 접점이 없어서, 일정상 어쩔 수 없어서가 각각 24%를 차지했다.

직장인들의 침묵은 가족과 대화하는 시간에서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지난해 5월 벼룩시장 구인구직이 직장인 517명을 대상으로 ‘가족 간 대화 실태’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 절반(55.2%)이 넘는 사람들이 가족과 30분도 대화하지 않았으며 가족과 대화가 잘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0명 중 3명에 그쳤다.

가족과의 대화가 어려운 이유는 대화할 시간이 없어서 (34%)가 가장 많았으며, 서로의 관심시가 달라 공감대가 없어서(33%), 직장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14.9%) 순이었다. 기타 의견으로는 다른 할 일이 많아서,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등이 있었다.

청춘들은 직접 보고 대화를 하는 것보다 이메일·메신저 등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또한 서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아 대화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섣불리 마음을 열었다가 상처받고 이용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말을 하면 할수록 약점이 돼서 되돌아오고 불편해지는 상황. 상대를 쉽게 생각하고 만만하게 보는 경향도 있다. 이렇게 청춘들은 타의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청춘들이 무조건 소통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대통령 탄핵 등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모습 등을 보면 소통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침묵하는 청춘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회적 단절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수직적인 문화를 수평적으로 바꾸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 소통하는 건 어떨까?

hyuk7179@fnnews.com 이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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