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인종 차별 겪을 걱정했던 내게도 인간 편견 있더라

2017. 4. 2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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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김여란의 호주호구

지난 3월 호주 뉴캐슬시에서 열린 버몬트 거리 카니발 축제 모습. 올해 6회째를 맞은 이 축제에는 매년 이 지역에 사는 수십개국 출신 이민자들과 지역민들이 각자의 전통과 관련된 공연을 하거나 상품, 음식을 판매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한국인의 사물놀이도 무대에 올랐다.

커닝하던 인도인도, 줄 서지 않는 중국인도, 한집에서 살아보니 친절한 사람들. 결국 선하고 나쁜 사람, 열리고 닫힌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편견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살아본 경험이었다

호주에 처음 왔을 때 인종차별을 당한다면 어떻게 대응할지 열심히 연습하곤 했다. 상황을 상상하면서 상대를 부끄럽게 할 만한 문구를 여러 개 만들어 외우고 가능하면 침도 뱉어줘야지 생각했다. 이전 스페인 여행 중 마주오던 남자 네댓이 ‘칭챙총’거리며 원숭이 같은 흉내를 내보였던 적이 있다. 토요일 오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새벽 기차에서 내려 부근 숙소로 걸어가던 어둑어둑한 거리에서 남자 여럿을 상대로 모른 척 피해 걷는 게 최선이긴 했지만 역시 아무 대거리도 못한 건 작은 굴욕으로 남았다.

나중에 호주에서 4년 넘게 산 한국인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준비했던 대처법은 너무 고차원적이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수치심, 도덕심을 자극한다는 발상 자체가 한강에서 사공 찾기 같은 것이었다. 그 친구는 출근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 차를 몰던 코카시안이 던진 계란에 맞은 적이 있다. 낄낄대는 운전자를 보며 당황해하고 있는데 뒤차가 바로 그 차를 들이받았다. 친구가 일하던 식당 사장인 중국계 호주인이었다. 사장은 계란 던진 이를 차에서 끌어내더니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주먹과 발로 팼다. 사장은 내 친구에게 “너도 와서 때리라”고 권하고, 맞은 이에게는 “내 차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도 알아서 해. 네 얼굴 기억하니까 경찰에 신고하면 사막에 묻어버릴 줄 알아”라고선 떠났단다.

그 외 식당에 찾아오는 온갖 진상 손님 퇴치법도 기발했다. 이상한 사람은 일관적으로 이상한 법이기에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이들 대다수는 곧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했다. 이 식당에서는 영국인 진상에게는 특유의 악센트를 따라하며 비아냥대고, 가게에 있던 호주 대륙 원주민인 애버리진을 불러 “야, 쟤 영국인이래. 너희 조상 땅 뺏어간 애들”이라며 둘이 싸움을 붙였다고 했다. 프랑스인에게는 “너네 나라 실업률 50%라면서, 거지 나라에서 와서 거지처럼 구냐? 너희 나라로 꺼져”라고 해서 결국은 울면서 제 발로 나갔다던가. 액션 활극 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야 웃느라 눈물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지만 당사자로서는 유쾌한 경험일 리 없다. 식당 사장이 종업원들에게 저런 응대를 허용하고 사장 본인이 손님을 곧잘 때리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궂은 날들이 지났겠는가. 물론 저렇게까지 해야 할 진상을 만나는 건 두어 달에 한번쯤이고 대다수는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10대 무리에게서 ‘노란 원숭이’ 어쩌고 하는 놀림을 당한다거나, 차 타고 가면서 이유 없이 욕설을 듣는 경험을 모두 하는 건 아니어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제는 그런 일 정도는 가운데 손가락 한번 세워주고 욕으로 맞받아치면 그만이고, 모국을 떠난 이상 여러 차원에서 차별에 노출될 수 있더라도 지내 보니 그게 실존을 위협할 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여기게 됐지만 호주에 처음 올 땐 인종차별의 가능성이 꽤 스트레스였다. 한국의 이주민이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인종차별의 행태가 참으로 저열하고 폭력적이라는 걸 기자로 일할 때 여러 자료에서 봤던 기억 때문이었다. 원래는 독일에서 공부하려다가 마음을 바꾼 것도 인종차별에 대한 우려 탓이었다. 독일이 인종차별이 특별히 심한 곳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분한 일을 겪었을 때 독일어로 항의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가늠하니 까마득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호숫가에서 놀던 10살쯤 돼보이는 오지(Aussie·호주인, 보통 호주에서 태어난 현지인을 이주민과 구분해 이르는 말) 여자애가 혀를 쏙 내밀며 시비를 걸어서 짧은 말다툼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아이 역시 내가 외국인이라 그런 듯하지만 무섭지 않으니 웃고 넘어갔다. 걱정과 준비가 무색하게 호주 워홀 동안 인종차별이라 할 만한 일을 겪은 적은 없었으나, 대신 내 안의 인종차별적 편견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깨기를 반복하는 시간이었다.

모국에서는 평생 의식해본 적 없던 정체성, 내 피부색과 인종을 의식하는 만큼 타인의 것에도 신경 쓰게 됐다. 다양한 생김새와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기에 사람을 분류하는 기준이 일단 인종과 출신국이 되고, 부정적인 경험이 조금이라도 더해지면 기존의 편견이 금세 튀어나왔다.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르던 인도인들, 중고차 거래 중에 계속 말을 바꾸며 거짓말을 해대던 중동과 인도 출신 차주들, 줄 서지 않고 행렬을 엉클어버리던 중국인들. 그리고 호텔방을 청소할 때 무자비하게 더러운 곳은 정말로 전부 다 아시아나 중동 쪽 투숙객들이 머물던 방이었다.

그렇게 나름의 편견이 자리 잡아가던 즈음 마침 나는 중국인, 인도인, 페르시아인과 한 달 반쯤 한집에서 살게 됐다. 호주에 와서 쭉 주로 코카시안들과 살다가 옮긴 집이었는데, 처음에 괜찮을까 걱정했던 게 속으로 자주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중국인들은 참 따뜻하게 환영해주었고 작은 거라도 나누고 싶어 했다. 보통의 편견과 다르게 소곤소곤 말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후 또 다른 집에서도 인도인들과 두어달 함께 지냈는데, 한결같이 다정하고 예의가 발랐으며 요리를 할 때마다 음식을 권했다. 그제야 커닝하던 인도인들 대신에 이전에 나를 자주 돕던 인도인 동료들이 떠올랐다.

다양한 일터에서는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네팔 등 동남아시아 출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가 싼 휴양지,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 그래서 한국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나라. 동남아시아에 대해 그전까지 내 머릿속에 있던 건 호주에 오기 전까지 그 정도뿐이었는데, 그들과 처음 일상을 함께한 뒤에야 내 안의 편견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겉모습부터 피부색이 짙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고 더러는 한국인과 구분하기 어려운 생김새에 좀 놀라기도 했다. 호주에서 만난 그들은 모두 나보다 영어도 일도 잘했고 종종 내 상사였다. 여행을 가더라도 현지인과 교류할 생각을 잘 하지 않는 나라들이니만큼, 그들에게 물어 알게 된 본국 이야기들도 새로웠다. 스쳐가는 사이였어도 꽤 호감 가는 친구들도 있어서 각 나라의 역사나 문화, 산업에 대해 이모저모 찾아보게 되기도 했다.

따져 보면 호주에서 만난 최악의 사람들은 뉴질랜드, 호주인 코카시안들이었다. 뉴질랜드인은 자기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린 일본인 아내와 살던 집주인이었는데, 성관계를 하자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는 등 성희롱을 해댔다. 역겨운 짓을 신고하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알린 뒤론 일본인 아내가 남편 대신 나를 괴롭혔고, 어쨌든 그 부부 덕분에(?) 경찰서를 가고 법률 상담을 받고 새로운 경험을 잘했다. 다른 호주인 역시 한집에 살던 중년 여자였는데, 집주인도 아니고 내 렌트 계약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서 소리를 질러대다가 한두 시간 뒤에는 또 다정하게 구는 널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남과 그렇게 쏘아붙이며 말싸움을 해본 게 생전 처음이라 덕택에 또 새로운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적인 일반화가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편견은 보통 소수자성에 근거하는데, 전 세계 권력의 상위에 있는 코카시안의 인종적 정체성은 그들의 약점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저들 외에 만났던 코카시안 동료나 친구 수십 명은 대부분 친절과 배려로 대해주었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신 내가 저들을 범주화한 방식은 불안정한 직업이나 무직 상태, 문신, 마약과의 관련성 같은 것이었는데 사실 나 역시 호주에서 가난한 불안정 노동자였고 좋은 친구들 중에도 크고 작은 문신을 한 이들이 많았다. 어떻게도 편견은 정확할 수 없는데, 마음속에 자동적으로 편견이 떠오르는 것까지 막기가 어려운 것을 인정한다면 언제든 내가 틀렸다고도 인정할 수 있도록 다짐하는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인종차별은 다문화권의 사람들이 섞이면서 생기는 문제지만 호주에서 지낸 시간 동안 차별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 역시 함께 사는 경험임을 알았다. 좋은 외국인 친구를 둔 사람들, 외국에서 낯선 이들에게서 환대받아 본 이들은 자연스럽게 외국인에게 호의적이며 편견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학교나 직장 등 생활공간에서 뛰어난 외국인을 겪은 이들은 인종이나 국적으로 함부로 사람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위상이 높아지는 만큼 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무슬림 및 난민 혐오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에서 호주 역시 비켜나 있지 않다. 10년 전보다 호주 사회의 인종차별이 더 심해졌다는 설문 결과가 있고, 결국 실패했지만 인종차별금지법을 반보 후퇴시키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이전에 사람 사는 데는 다 다르다고 쓴 적이 있는데, 결국 사람은 다르지 않아서 선하고 나쁜 사람, 열리고 닫힌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나 역시 앞으로 인종차별을 겪을 수 있겠지만 그래서 사람은 역시 모국에서 사는 게 편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한국인에게 살기 좋은 곳이라면 한국에서 살고 있는 200만명이 넘는 이주민은 그만큼의 불이익을 감내하고 있다는 의미일 테다.

한국에서도 인종차별에 관한 법률과 직장 내 규율 등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이뤄져야 할 시점 같다. 최근 부산에서 아이를 구하려다 되레 인종차별적 폭언을 들었던 콜롬비아인 멘도사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외국인이 생각하는 인종차별의 기준을 한국인이 잘 모르고 차별을 막는 시스템이 없다”고 지적했듯 말이다.

김여란씨는 호주의 한 해안도시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머물면서 리조트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원래 독일이나 캐나다 유학을 계획했으나 호주에 반해 이곳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서는 기자로 4년여간 일했고 팟캐스트 <답없수다>를 진행했다. 2016년 초 사표를 냈고 앞으로 산림과 환경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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