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외길 25년' 뚝심으로 진보 위상 되찾을까

김종철 2017. 4. 2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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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심상정의 진보정치
대학 3학년때 노동운동 투신
1985년 '구로동맹파업' 주역
민주노총 시절엔 '철의 여인'
2004년 총선때 정치권 입문

문재인 비판했다가 당내 소란
심 "정의당 가치로 토론할 것"
차별화된 진보세력 구축 뜻
사표방지 심리 극복에 달려

[한겨레]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지난 18일 오전 국회에서 노동시간 단축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내건 득표율 목표는 두자릿수(10%)입니다. 역대 진보정당 후보의 대선 최고 성적인 3.89%(2002년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보다도 두배가 넘습니다. 지난해 총선에서 얻은 7.2% 정당 득표율을 고려하면 전혀 불가능한 수치는 아닙니다. 하지만 총선과 달리 대선에서는 진보적 유권자들의 사표 방지 심리가 늘 작동합니다. 심 후보가 2012년 대선 막판에 야권 단일화를 위해 스스로 하차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내건 심상정 후보의 도전이 성공할지 살펴봅니다.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회(KBS 주최)가 열린 지난 19일 밤. 정의당은 주요 인터넷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 한때 1위를 차지했다. 당 후보 ‘심상정’도 상위에 올랐다. 자기 색깔이 가장 분명하고 차별적인 정책을 선보인 진보정당 후보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토론을 똑 부러지게 잘했다”는 평도 있었지만,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온라인상에서는 심상정(58) 후보를 비판하는 내용이 훨씬 많았던 탓이다. ‘왜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을 비판하느냐’ ‘왜 홍준표 및 유승민과 함께 문재인을 협공했느냐’는 항의가 주였다. 심지어 정의당 게시판은 탈당을 선언하는 일부 당원들의 게시물이 잇따라 올라오는 등 여진이 이어졌다. 전문가들한테는 점수를 딴 반면, 일부 지지자들로부터는 거세게 항의를 받는 형국이다.

심상정 후보(이하 직함 생략)는 21일 오후 국회에서 연 환경정책 관련 기자회견에서 “저는 정의당의 가치와 노선, 정책을 갖고 국민들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또 다른 후보들과 정확히 구별될 수 있도록 토론에 임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며 “이런 치열한 과정을 통해 정의당이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꿋꿋이 갈 길을 간다는 태도이지만, 이번 장면은 심상정과 정의당이 처해 있는 처지를 잘 보여준다. 걸핏하면 보수 쪽으로부터 ‘민주당의 위성정당’이라고 비판받고, 삐끗하면 잠재적 지지기반인 개혁적 유권자들한테 외면받는다. 정의당이 완주를 넘어 의미있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정의당이 내세우는 최대 무기는 후보 자체다. 성인이 된 이후 초지일관해서 민주화운동뿐 아니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살아온 후보의 삶은 다른 후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심상정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자기희생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른 어떤 후보보다도 높은 점수를 받는다.

25년 노동운동 외길을 걸어온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시절 ‘철의 여인’으로 불렸다. 1996년 민주노총 금속노조 사무처장 시절 노동법 개악 저지를 위한 집회에 참석한 모습. 심상정 후보 선대위 제공

하이힐 여학생의 인생 바꾼 <전태일 평전>

서울대 사범대 역사학과 3학년이던 심상정은 1980년 서울 명일동의 한 직업훈련소에서 미싱사 자격증을 땄다. “전태일 동지, 저도 이제 미싱사가 됐어요!” 그는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1970년 서울 평화시장에서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을 마음속으로 불렀다. 자격증을 손에 쥔 심상정은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대학생활을 버리는 대신 가시밭길인 노동 현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80년 말 김혜란이라는 가명으로 구로 3공단의 대동전자에 입사했다. 이른바 대학생의 위장취업이었다.

그가 구로공단 노동자로 살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구로공단에서 한 야학교사 생활과 2학년 겨울방학 때의 공활(공장에 취직해 노동자의 삶을 실제로 체험하는 활동) 경험이었다. “열세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의 어린 시다들이 겪는 참혹한 현실은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 이 아이들이 봉제공장에서 하는 일은 주로 다림질이나 프레스 같은 시다 일이었다. 오로지 공부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올라온 시다들이 온종일 서서 실 먼지와 뜨거운 열에 시달리며 무거운 다리미와 씨름했다. 오후 4시쯤까지 일을 한 다음 야간학교에 다녀오면 저녁 8시 정도 되는데 그러면 기숙사에 가방을 던져놓고 곧바로 현장에 나와 철야를 해야 했다. 그렇게 고단한 몸으로 프레스를 잡다가 깜빡 졸면 옷을 밀어 넣던 손이 프레스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수가 종종 생겼다. (…) 그렇게 병원에 실려갔던 소녀들이 얼마 후 일그러진 손으로 다시 일감을 잡을 때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심상정 - 이상, 혹은 현실>)

심상정은 박정희의 유신독재 정권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8년 대학 캠퍼스에 첫발을 내디딜 때만 해도 연애와 독서, 여행하기 등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그리던 평범한 소녀였다. 남학생들에게 잘 보이려고 긴 머리를 찰랑찰랑 늘어뜨리고, 최소 7센티미터가 넘는 굽이 달린 구두만 신고 다녔다. 입학 첫해 학교 도서관 건물 5층에서 유신 반대 시위를 하다가 끌려가는 선배의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그 광경을 애써 관심 밖으로 밀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또래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 고향인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그의 아버지는 2남2녀의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막내인 심상정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 심상정은 고3 때 마지막 한번을 빼고는 과외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다. 대신 그는 중학교(충암) 때 학생기자로 활동하는가 하면 고교(명지여고) 때는 교외 서클 활동을 열심히 하는 등 공부 이외의 일에 오히려 관심이 많은 정도였다.

그러나 “열정과 연민이 넘치던” 심상정이 역사 변혁이라는 시대의 흐름과 조우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연애였다. 그는 “입학하자마자 나는 소원했던 대로 괜찮은 남자친구를 고르는 데 열중했다. 그런데 남학생을 찍어 두고 뒤를 쫓다보면 그는 영락없이 운동권이었다. 그와 가까이하자면 학생운동 영역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맘에 드는 남학생한테 잘 보이려고 열심히 시위 대열을 따라다녔다”(<당당한 아름다움>)고 밝혔다. 하이힐에 스커트 차림으로 시위마다 쫓아다니는 그의 모습은 사진에 고스란히 찍혔고, 1학년 말에 징계(근신)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심상정은 운동권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2학년 초에는 도서관에서 <세계철학사> <제3세계 혁명론> <민중교육론> 등을 읽고 이론 무장까지 했다. 특히 이때 읽은 <전태일 평전>은 “인생의 진로를 밝히는 등불”(<당당한 아름다움>)이 됐다.

심상정은 학생운동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학생운동은 당시만 해도 남학생 위주였고, 여학생은 보조역 정도에 그쳤다. 심상정은 1980년 서울대에 총여학생회를 따로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다. 또 여학생만으로 구성된 학회도 처음으로 구성했다.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한 그가 여학생 학회 회원 가운데 최초로 구로공단 노동자로 변신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는 대학 입학 때 연애와 독서, 여행을 꿈꿨던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항상 정장 차림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다녔다. 대학 입학 때인 1978년의 모습. 심상정후보 선대위 제공

‘구로파업 동지’ 김문수와 다른 길

심상정은 구로공단의 여걸이었다. 대동전자에서는 임금 인상과 식사 개선을 요구하다가 해고됐으며, 대우어패럴에서는 입사 1년 만인 1984년 회사 쪽의 탄압을 물리치고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위장취업 사실이 드러나 여기에서도 곧 해고되지만, 그는 해고자 신분으로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 당시 구로공단 지역의 노조 간부들을 함께 묶는 등 조직과 노동자 교육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정치 동맹파업인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밑거름이 됐다.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김준용) 구속을 계기로 시작된 구로동맹파업은 비록 1주일 만에 강제 해산 당하기는 했지만,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된 힘을 보여줬다. 또 노동운동이 사회 변혁 운동의 주축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노동운동은 개별 노동조합 투쟁을 넘어 연대 투쟁의 길로 나아갔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1985년)에 이어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1990년)가 탄생하게 된 뿌리가 됐다.

심상정은 김문수(전 경기도지사)와 함께 구로동맹파업을 이끈 핵심 지도자였다. 경찰이 파업 상황실이었던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종로구 숭인동)을 덮쳤을 때 심상정은 김문수의 도움으로 지붕을 타고 간신히 도망갈 수 있었다. 당시 연행된 김문수는 경찰의 심한 전기고문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이즈음 심상정의 남편(이승배·61)을 소개해준 사람도 김문수였다.

이때부터 심상정의 수배 생활은 1990년 체포될 때까지 이어졌고, 93년에야 재판을 마쳤다. 미싱사 월급 8만원을 받았던 그에게 “현상금 500만원, 일계급 특진”이라는 포상이 걸려 있었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 붕괴 이후 김문수 등 많은 동지들이 ‘노동자 정당의 전망이 없다’며 현장을 떠났지만, 그는 노동운동을 계속했다. 그런 그에게 노동자들은 ‘인민무력부장’(전노협 쟁의국장) 또는 ‘철의 여인’(민주노총 금속연맹 사무처장)이라고 불렀다. 그가 이끌던 금속노조는 2003년 산별 중앙교섭을 통해 ‘임금삭감 없는 주5일 근무제’를 국내 최초로 이끌어냈다.

강철 같은 노동운동가 심상정이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둔 때였다. 2003년 9월 금속노조 사무처장 임기를 마친 그는 민주노총 사무총장에 출마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제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 자부심과 명예를 지키고 싶었다”(<실패로부터 배운다는 것>)고 그는 밝혔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 수감 중이던 오랜 노동운동 동지 단병호를 면회하러 갔다. 하지만 단병호는 노동운동보다는 정치에서 기량을 더 잘 발휘할 것 같은 심상정에게 정치 입문을 권했다. 그는 25년간의 노동운동 외길을 접고, 진보정당의 원내진출 1호 의원으로 2004년 국회에 입성했다. 이때 같이 들어온 노회찬과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면서 진보정치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오른쪽)가 고교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 갔을 때 친구와 찍은 사진이다. 나팔바지 차림이 눈길을 끈다. 심상정 후보 선대위 제공

“차별화 시동 늦었다”?

원내에서 심상정의 활약은 단연 발군이었다. 17대 국회 첫 국정감사에서 당시 경제부총리 이헌재에게 백기를 받아낸 것은 유명하다. 이헌재는 당시 심상정의 매서운 추궁에 재경부가 역외선물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방어하다 1조8천억원가량의 외환보유고를 날린 사실을 인정했다. 또 삼성의 편법 승계 문제 등을 끊임없이 추궁해 ‘삼성 저격수’로 불리기도 했다. 이런 활약으로 의원 생활 첫해에 ‘여야의원이 뽑은 최고 국회의원’, ‘정치부 기자가 뽑은 올해의 정치인’, ‘초선 의원이 뽑은 베스트 의원 1위’ 등 3관왕에 올랐다. 18대 총선에서 경기 고양 덕양갑에 출마해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기도 했지만, 19대와 20대 때 연속으로 당선됨으로써 수도권에서 3선을 이룬 최초의 진보정치인이 됐다.

심상정과 정의당은 이번 대선을 통해 그동안 통합진보당 사태 등을 거치면서 약해진 진보세력을 다시 묶어 세운다는 방침이다. 대선 이후 예상되는 연정에 당당하게 참여하기 위해서도 의미있는 득표가 필요하다. 두자릿수 득표가 공식 목표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최소한 역대 최고치(3.89%) 갱신을 노리고 있다.

자체적으로는 다른 당과의 차별화에 성공하면 달성 가능한 목표라고 본다. 특히 대선후보 토론회 등을 통해 후보가 가진 상품성이 드러나면 유권자들의 지지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정의당 선대위 공보단장 박원석 의원은 21일 통화에서 “최소 목표는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를 이기는 것이고, 최대 목표는 두자릿수를 얻는 것인데 지금 그런 추세로 가고 있다”며 “마지막 남은 숙제는 유권자들이 사표방지 심리를 넘어서 가치에 투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상정이 지난 19일 한국방송(KBS) 후보 토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문재인에 대해 대립각을 세운 것은 이러한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러나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적지 않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지금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지지자 가운데 계속 지지하겠다는 비율이 문재인과 안철수, 홍준표 등은 60~70%인 반면에 심상정과 유승민은 30~40% 정도에 불과해서 지지자들의 충성도가 낮다. 더구나 심상정의 지지층은 문재인과 연동성이 높아서 막판으로 가면 문재인 쪽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다”며 “정의당으로서는 진즉에 다른 당과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서 표를 모았어야 하는데 차별화 시동이 늦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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