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문화일보

<살며 생각하며>도사리

기자 입력 2017.04.21. 14:4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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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인, 동아대 명예교수

말들이 난무한다. 뉴스를 틀면 어느 후보의 공약, 또 어느 후보의 공약이 나온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에 후보들의 목은 쉴 대로 쉬어 그 쇳소리마저 들리는 거친 목소리 속에서 말들은 잔뜩 학대를 받고 있는 느낌이다. 개중에는 우리말이 저랬던가, 아니 내 말도 저런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표현과 분을 못 이기는 듯한 거친 목소리들이 막 끼어들기도 한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표현의, 이른바 ‘막말’도 많다. 그 막말을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공식적인 장소에서, 공인들이 마구 떠든다. 그래야 마치 진실이 드러난다는 듯이.

일생 동안 아름다운 한국말들만 모으다가 세상을 떠난 분 중에 장승욱 선생이 있다. 그는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라는 책을 발간했다. 나는 책을 받는 순간, ‘도사리’가 뭐지’ 하면서 그 해설을 찾아봐야 했다. 도사리는, 익는 도중에 바람이나 병 때문에 떨어진 열매, 한자로는 낙과(落果), 또는 못자리에 난 어린 잡풀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라는 설명이 씌어 있었다. 지은이는 다섯 해 넘게 이른 새벽 과원에 나가 이들 도사리를 줍는 심정으로 순우리말 4793개의 어휘를 모아 사라져 가는 우리말의 본뜻과 속뜻, 그것들의 올바른 쓰임을 전한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작가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내면서 도사리를 한 광주리 모아 팔겠다고 시장 귀퉁이에 나앉아 있는 촌부(村婦)의 심정이 된다. 그러나 이 도사리들이 누군가에게는 반짝이는 보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도사리, 감또개, 똘기…이런 작고 예쁜 것들의 이름을 누가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새벽 과수원에 나가 도사리를 줍는 마음으로 쓴 글들을 이름 모를 그대들에게 바친다.’

첫 장을 여니, 감투밥, 강다짐, 구메밥, 매나니, 솥울치… 같은, 밥에 관한 말의 종류들이 소개돼 있다. 한마디도 모르겠다. 나는 공연히 장 선생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국의 시인이란 사람이 ‘밥’을 이르는 한국말들도 모르다니…. 책의 아무 곳이나 편다. 불에 관한 말들- 깜부기불, 불땀, 불무지, 잉걸불, 후림불, 그리고 숟가락·젓가락에 관한 말들- 두매한짝, 매, 술잎, 술총. 그 밖에도 맛바르다, 바특하다, 타분하다 등 한이 없다. 전부 모를 말들이며 표현들이다. 이러고도 한국 사람인가, 나는 절로 탄식이 난다.

말을 담는 그릇인 목소리도 말의 아름다움에 한몫하기는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아나운서의 목소리라든가, 아름다운 테너의 목소리가 꼭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참 이상하게도 간절함이 있다거나, 착함이 엿보이는 목소리, 말소리, 절대로 웅변술학원 같은 데서는 배울 수 없는 그 사람만의 목소리. 그러니까, 말과 말의 그릇인 목소리는 그 사람의 ‘그 무엇인가’(흔히는 인격이라고 하지만)를 전해준다.

가끔 사투리를 들으면, 그 정감 있는 말소리에 가다가도 돌아서게 되는 목소리가 있다.

아마도 나는 그 할머니의 목소리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시장 골목의 죽집 할머니다. 단호박죽이 특히 맛있던, 그리고 가게에 들어서면 가득 늘어 놓여 우리를 맞던 누런 단호박들…. 거기서 들려오던 그 목소리, 필요한 게 뭐 없나 하고 물으며 ‘물김치 한 보시기’를 더 갖다 주던 그 목소리…. 죽집을 나오려면 ‘잘들 가시오…’ 하고 배웅하던 포근한 목소리. “참 괜찮지?” 누군가 말했다. 일제히 우리는 간판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다음에 다시 오자” 누군가 말했다.

현대의 혁명적인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강의록에서 불협화음을 중요한 음의 한 요소로 논하면서 음악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이 현실에서도 의미 있는 말을 한다. “확실히 짚고 넘어갑시다. 대담함이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행동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센세이션을 일으키려고 대담함을 분별없이 무질서와 노골적인 욕망에 쏟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참에 사투리로 아름다운 시를 만들었던 백석의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 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도 개 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모둥발이가 된 슬픈 력사가 있다’(백석, ‘모닥불’ 전문)

여기서 새끼오리는 새끼줄이고, 니빠디와 ?은 각각 이빨, 깃의 평안도 사투리이다. 모닥불이 타는 밤 풍경이 고즈넉이 그려지지만, 그러나 여기의 모닥불이 식민지의 슬픈 모닥불임이 어떤 구호 없이도 드러나지 않는가.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 기나긴 우리 민족의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말들, 아름다운 말들.

뉴스를 보며 스트라빈스키의 말처럼 대담하지만, 아름다운 인격을 드러내는 말, 백석이 일찍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우리말의 정경들, 장 선생이 모아 놓은 아름다운 도사리들을 새삼 생각한다. 비도 그 내리는 정도에 따라 ‘는개, 먼지잼, 못비, 작달비, 잠비’ 등으로 말하던 우리의 포근한 말들- 이런 말들로 대선후보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약속할 수는 없는가. 상대방을 헐뜯지 않으면서도, 소리소리 지르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이길 순 없는가. 부드러움과 따뜻함으로 결국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태양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