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숭늉에 대한 찬사

2017. 4. 2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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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수(정산 鼎山) 인문학자

지금처럼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 밥을 솥에다 지어 먹을 때에는 밥을 푸고 나서 솥 바닥에 누른 밥에 불을 더 때거나 열을 가하여 누룽지를 눌렸습니다. 그 누룽지를 긁어 별식으로도 먹고 물을 부어 끓여서 뜨끈한 숭늉과 눌은밥을 반드시 올려야 어른들은 진지를 마치셨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숭늉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심지어 제사에도 물밥이라고 숭늉을 올립니다. 또 어른들은 뜨끈한 숭늉을 드시면서 시원하다고 하십니다.
 
숭늉의 어원은 숙냉(熟冷)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뜻을 풀어보면 냉한 것을 데워준다. 또는 냉한 것을 덥게 한다. 즉 속이 냉해진 것을 숭늉으로 데워 뱃속의 온도를 올려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민족은 양물(陽物ㆍ따뜻한 성질)인 쌀과 콩을 주식으로 음물(陰物ㆍ차가운 성질)인 보리나 밀은 부식으로 하면서 언제나 뱃속을 훈훈하게 했습니다. 뱃속이 따뜻했을 때 소화력도 왕성하여 보리나 밀 같은 차가운 성질의 음식도 잘 소화해 냅니다. 쌀은 성질이 따뜻한데 열을 가하여 눌린 누룽지는 더욱 따뜻한 열기를 품고 있어서, 뱃속을 보호해 주고 냉해진 속을 풀어주는 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합니다. 특히 술을 과음해서 탈이 난 속을 풀어주고 다스리는 데는 눌은밥만한 게 없습니다. 술로 탈이 난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밥을 잘 먹지 못합니다. 그럴 때 눌은밥을 끓여주면 금방 한 그릇을 비웁니다. 모든 술은 마시면 열을 내지만 그 체는 차가운 성질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술을 마시거나 중독이 되면 몸의 체온을 떨어뜨리고 결국 간에 무리를 주어 간경화를 가져옵니다. 술로 탈이 난 뱃속도 냉해져 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밥이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냉기가 몸에 침범해 몸이 차가와 지면 기혈이 막히고 기혈이 막히면 병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님들은 숭늉으로도 몸에 들어온 냉기를 잘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뜨끈한 숭늉을 드시면서 '어이쿠 시원하다'고 하신 것은 막힌 기혈이 뚫리니 시원하다고 하신 것이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식생활에 실로 큰 변화가 발생합니다. 거의 모든 가정에 냉장고가 보급된 것입니다. 냉장고는 인공으로 낮춘 저온에 음식을 보관해 두기에 엄청난 냉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겨울에 바깥 기온이 낮을 때 자연상태의 냉수는 몸에 해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위적인 냉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몸을 해칩니다. 그래서 냉장고 음식을 먹을 때에는 최소한 20분 전에는 미리 밖에 꺼내 두었다가 먹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 몸에 치명적 냉기를 머금게 합니다. 이 냉기가 몸에 머물다가 체력이 저하되거나 노쇠해지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사풍(邪風)이 됩니다.

그러나 바쁘고 빨리빨리 병이 붙은 요즘엔 그 중요한 섭생(攝生)의 영역이 무척이나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만 무안하게 됩니다. 특히 음물인 밀과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서양인들은 우유를 먹을 때도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마십니다. 오랫동안 차가운 성질의 밀과 감자로 살아온 미국인들은 음체질이어서 당장은 심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동양사람과는 확실히 차이가 납니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가공할 물량공세에 전 지구가 미국화 되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우리민족의 체질과 삶의 전통적 습관은 무시된 채 미국 따라하기 열풍이 만연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따뜻한 양물 위주의 식생활에 습성화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외국문물의 무조건적 경도와 심취는 심성과 체질에 이상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의 일상적이고 보편적 사용으로 사람들의 체온이 평균 1℃가량이 떨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평균체온이 1℃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실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체는 정상체온에서 0.1℃만 오르고 내려도 당장 혈류에 문제가 발생하고 혈관에서 혈액이 엉기기 시작합니다. 차가운 냉기를 계속해서 몸속에 주입하면 뱃속은 냉병이 들고 열은 머리로 치솟아 화를 잘 내고 다들 짜증 속에 살아갑니다. 뱃속은 따뜻하고 머리는 시원해야 몸이 건강한데 요즘은 거꾸로들 삽니다. 그러니 당연히 온갖 질병에 노출되는 것이죠.

이럴 때 조상들의 지혜를 되살려 냉장고로 인해 생기는 냉기와 냉병을 숭늉으로 다스려 국민들의 건강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은 현미를 노릇하게 볶아 숭늉을 끓여 먹을 수 있도록 상품화된 것도 있습니다. 조금만 정성을 들이면 현미를 솥에다 볶아 주전자에 볶은 현미를 넣고 끓인 숭늉을 우리의 식탁에 다시 올릴 수 있습니다. 맛도 일품이고 특히 더운 여름에 숭늉이 잘 상하는데 현미를 볶아서 끓이면 더운 날에도 상하지 않는 장점도 있어 좋습니다. 꼭 현미가 아니더라도 백미를 볶아서 끓여도 좋습니다.

가정에서 주부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최소한 냉장고로 발생하는 그 무서운 냉기를 우리 전통의 숭늉을 되살려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습니다. 밥은 지은 지 만 하루가 넘으면 먹어봐야 배만 부르지 진기와 영양가는 거의 없습니다. 이때는 누룽지를 눌려두었다 과자대용이나 눌은밥으로 활용하면 좋습니다.

요즘은 모든 것이 돈으로 결부되는 세상이라 자기들 유리한 방향으로 모든 것을 엮어가고 논리를 귀결시킵니다. 아무리 과학적 논리가 타당해도 지엽적일 수 있습니다. 전체를 아울러 부분을 살피는 안목이 결여되면 국민들, 곧 최종 소비자만 고생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민족의 체질과 건강을 고려해 무엇이 진정 몸을 이롭게 하는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 유구한 세월동안 고집해 왔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작금의 세태는 남 흉내 내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왔으며, 우리들의 음식문화에 깃들어 있는 조상들의 얼과 숨결은 무엇인지, 도외시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를 이제는 차분히 반성해 볼 때가 아닐까요.

김덕수(정산ㆍ鼎山)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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