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선 없이 혼자? 말이나 되는가" 들끓는 판사들

이혜리 기자 입력 2017. 4. 19. 23:18 수정 2017. 4. 2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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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조사위 결과 발표 후폭풍
ㆍ내부통신망 “행정처 컴퓨터 조사 않고 블랙리스트 부인”
ㆍ보고서에 학술대회 관련 보고한 실장회의 참석자도 빠져
ㆍ윤리감사관실, 인권법연구회 소모임 설립 때부터 조사도

대법원의 사법개혁 저지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의 조사결과가 나왔지만 일선 판사들은 윗선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라며 반발하고 있다. 각급 법원 판사회의 대표들이 이르면 20일 모여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어서 판사들의 반발이 확산되고 판사회의 등 집단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19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가 폭풍전야처럼 조용한 모습이다. 대법원은 사법개혁 저지 의혹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발표 이틀째인 이날까지도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박민규 선임기자

19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진상조사 결과와 이인복 전 대법관님 글에 대한 단상’이라는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 의혹 초기부터 조사위 구성과 조사방법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던 차성안 전주지법 군산지원 판사의 글이다. 차 판사는 조사위 보고서에 대해 “읽어볼수록 답답해진다”며 “애초부터 갈 방향이 정해진 진상조사라는 의심을 피하기 힘들게 됐다”고 평가했다.

차 판사는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을 이번 사태의 핵심으로 지목한 조사위 조사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조사보고서를 보면 이 상임위원의 존재가 거인처럼 커 보이는데 법원행정처 조직이 이런 직급의 종횡무진하는 거인의 존재를 용인하는 구조였느냐”며 “기획조정실 컴퓨터의 비밀번호 걸린 뒷조사 파일의 존재 여부는 그 하드디스크를 확보해서 살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인데, 이런 결론(블랙리스트가 없다)이 납득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내부통신망에는 차 판사 글 외에도 조사결과를 비판하는 다수의 글이 올라왔다. 상당수가 이 상임위원 혼자 연구회를 압박한 것으로 결론낸 것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행정처의 거부로 컴퓨터와 e메일 서버를 조사하지 못했다면서 조사위가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단정한 것은 잘못됐다는 내용이다.

조사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본 일선 판사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건을 행정처의 조직적 개입으로 봐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이 상임위원이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주재 실장회의와 고영한 행정처장 주재 주례회의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학술대회 연기 및 축소 방안을 보고했다는 점이 가장 큰 근거다. 실장회의는 행정처의 극소수 핵심 책임자들만 참여하는 최고의결기구인데 조사위 보고서에 이 상임위원이 보고할 당시 회의 참석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를 했는지 등이 빠져 있는 것은 문제라고 판사들은 주장한다.

일부 판사들은 행정처 윤리감사관실이 2015년 7월 인권법연구회 내 소모임인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인사모는 2015년 7월7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처음 설립 제안이 나왔는데, 같은 달 윤리감사관실은 인사모 활동이 법관의 품위유지·직무수행에의 지장·공정성 등 법관윤리강령에 저촉되는지를 검토했다. 비위 법관을 감찰하는 것이 주된 역할인 윤리감사관실이 본격 활동도 시작하지 않은 인사모를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윤리감사관실이 윗선의 지시 없이 일을 하겠느냐”며 “행정처가 오래전부터 조직적으로 인권법연구회에 대한 압박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보이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관련성 여부가 조사보고서에 전혀 적시되지 않은 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 상임위원의 직무가 갖는 특성에 비춰봐도 이번 사태가 그의 단독행위일 수 없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양형위원회는 한국과 외국의 양형제도와 국민들의 양형에 대한 인식 등을 조사하는 것이 본 역할이지만 대법원장의 지근거리에서 대법원장의 관심사항을 처리하는 역할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행정처 소속이 아니면서도 행정처의 실장회의에 양형‘실장’ 지위로 참석하는 것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이 상임위원의 움직임은 양 대법원장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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