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부처 출범 50년, 1967년 개도국 최초 전담부처 신설.. '한강의 기적' 주춧돌 역할

남도영 2017. 4. 1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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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설립·과학기술진흥법 제정 '초석'
G7 프로젝트 추진 등 고도성장 뒷받침
2000년대 정부 R&D 투자 가파른 증가
GDP 대비 투자율 미·일 등 선진국 추월
한국 경제·과학기술 세계 10위권 도약

과학기술부처 출범 50년

21일은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 전담부처인 '과학기술처'가 출범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1967년 당시 개발도상국 중 각료급 과학기술 전담부처를 만든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국가적으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현대적인 행정체제를 갖춰 지원한 덕에 한국은 기술원조국에서 벗어나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과학기술 부처 50년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진단해 본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국민총생산(GDP) 대비 과학기술 연구개발(R&D) 투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로 꼽힌다. 총 연구개발비는 한 해 65조9594억원에 달하고 45만3262명의 연구인력이 투입돼 전 세계에서 출판되는 과학 논문 중 3.3%에 달하는 연구결과와 평균 20만 건의 특허를 쏟아내고 있다.

한국의 과학기술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부의 역할이 컸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과 1967년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과학기술처 출범을 시작으로 1970년대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정부 출연연구기관이 설립되며 과학기술 진흥 기반이 마련됐다. 이후 정부는 1982년 최초의 국가 R&D 사업인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시작으로 1990년대 범부처 '선도기술개발사업(G7 프로젝트)' 등 대규모 예산 투입을 통해 선진국 첨단 기술을 재빨리 흡수해 제품화하는 '빠른 추격자' 전략을 본격화하며 고도성장을 뒷받침했다.

2000년대 들어서 정부 R&D 투자는 국민의 정부 23조원, 참여 정부 40조원, 이명박 정부 68조원 등으로 급속히 성장하며 GDP 대비 투자율에서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한국의 경제와 과학기술은 세계 10위권으로 동반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발전 위해 시작된 과학기술 진흥=현재 과학기술 행정체계의 모체는 1959년 부흥부가 설치한 기술관리실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술관리실은 주로 미국의 기술원조를 위한 기술자 해외 파견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1961년 부흥부가 건설부로 바뀌면서 기술관리실은 기술관리과로 승격됐고, 다시 건설부가 경제기획원으로 개편되며 물동계획국 아래 기술관리과가 배치됐다.

기술관리과가 본격적으로 과학기술 진흥 업무를 담당한 것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부터다. 당시 정부는 경제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선 기술 수급계획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를 기술관리과에서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1962년 5월 21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보완'이라는 부제를 단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이 국가계획으로 확정됐다. 비록 이름에는 '과학'이라는 말이 빠졌지만, 이 계획은 과학기술계 인력개발, 선진기술 도입과 이식 촉진, 국·공립연구소 개편, 과학기술 기반 구축, 과학적 풍토의 범국민 운동화 등 과학기술 전반의 진흥을 추진한 첫 종합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계기로 과학기술이 경제 개발에 필수 요소라는 점이 국정에 확실히 반영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 단위 행정기구 '기술관리국' 설치=이후 과학기술 학술단체들은 과학기술 전담 행정기구를 조속히 설치하라는 건의문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출했다.

이 같은 건의를 받은 정부는 일단 경제기획원에 부속된 기술관리과를 확대해 '기술관리국'을 설치했다. 기술관리국은 과학기술 진흥에 대한 종합적인 정책의 입안과 집행을 담당하는 최초의 국 단위 행정기구였다.

기술관리국은 발족 이후 첫 번째 핵심 사업으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현황을 전반적으로 조사해 1962년에 '과학기술백서'를 펴냈다. 이는 정부가 펴낸 첫 번째 과학기술백서로, 과학기술 전반에 걸친 구체적인 현황과 문제점, 전망 등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담았다.

◇최초의 과학기술 전담부처 탄생=1967년 1월 '과학기술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과학기술 전담 행정기구 설립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당시 기술관리국은 국무위원을 장으로 하는 과학기술 행정기구의 설치 시기를 제2차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71년 정도로 계획했으나, 1967년 5월 3일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정부·여당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시기가 앞당겨졌다.

처음엔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학기술을 진흥하기 위해 부총리 수준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판단에 '과학기술원' 설립이 논의됐다. 하지만 정부 내 반발이 심해 결국 총무처는 '과학기술처'가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부'를 제안했으나 당시 부로는 과학기술 종합조정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우려해 결국 과학기술처로 결정됐다.

1967년 4월 21일 문을 연 과기처는 비록 과학기술계의 기대처럼 부총리급 기구가 되지는 못했지만, 과기처 장관이 국무위원으로 임명됨에 따라 과학기술 행정을 전담하는 독립 기구 설치라는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당시 과기처는 2실(연구조정실·기획관리실), 2국(진흥국·국제협력국), 10과를 중심으로 산하에 원자력청, 국립지질조사소, 중앙관상대를 뒀다.

◇'과학기술 붐' 이끌다=과기처는 비록 정부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국내 과학기술 정책 형성 과정에 한 획을 긋는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과기처 설립은 정부의 과학기술진흥 정책의 폭과 깊이를 더욱 넓고 깊게 만들었다. 과기처는 과학기술진흥법 시행령을 비롯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육성법'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육성법' 등 50여 건의 법령을 제정했다. 또 과기처 장관의 정책 결정을 자문하기 위해 과학기술진흥위원회, 인력개발위원회, 원자력위원회를 포함해 14개의 각종 위원회도 신설했다.

과기처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나갈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과학기술개발 장기종합계획(1967∼1986년)' 수립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다. 과학기술개발 장기종합계획은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자주 개발 능력을 강화해 중진공업국가군의 최상위 수준에 도달하는 데 목표를 뒀다. 이를 위해 선진기술 도입 촉진과 흡수, 과학기술계 인력 개발과 활용, 민간 기술개발 활동 강화, 국제 분업 등을 중점 개발전략으로 설정했다. 경제 개발에 연동되는 중·단기 개발계획이 아닌 이 같은 20년 단위의 장기종합계획 수립은 과학기술 전담부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과기처 설립을 전후로 과학기술 관련 기관·제도의 구축 및 정비가 줄지어 진행된 1967년은 한국에서 현대적인 과학기술체제가 형성된 상징적인 해로 기록되고 있다. 과기처 발족일인 4월 21일은 1968년부터 '과학의 날'로 제정됐으며, 과학기술계와 교육계는 4월을 '과학의 달'로 지정해 과학기술 관련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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