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술탄' 오른 에르도안..부정투표 의혹에 '갈라진 터키'

김효진 2017. 4. 17.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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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개헌안 국민투표 통과
'의원내각제→대통령제' 찬성 51.4%
대통령에 국가비상사태 선포 전권
'세속주의 100년 실험' 끝내나 주목
야당, 부정투표 의혹 제기하며 반발
서유럽은 "이제 등 돌리나" 우려
대테러전·난민문제 곤란 겪을수도

[한겨레] ‘문명의 교차로’에 선 터키가 서구화와 세속주의 100년의 실험에 마침표를 찍은 것일까.

반대세력 탄압과 ‘반민주주의’라는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터키 국민의 절반은 총리 시절부터 시작해 이미 15년간 집권 중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집권 연장의 길을 터주는 개헌안을 지지했다. ‘21세기 술탄’의 등장을 예고하는 결과다. 에르도안이 이슬람주의 강화와 반유럽 정서를 끌어올리며 개헌안을 통과시킨 만큼 향후 터키가 유럽 지향을 벗어나 다른 길을 모색할지 주목된다.

터키 국영매체 <아나돌루>를 보면, 16일 실시된 헌법 개정안 국민투표 개표가 99.97% 완료된 가운데 찬성이 51.41%, 반대가 48.59%로 집계돼 통과가 확정됐다. 개헌을 추진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승리 선언을 했다. 3%포인트도 안 되는 근소한 표차였다. 투표율은 85%에 달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개표 직전에 ‘날인이 안 된 표도 유효표로 집계하겠다’고 발표하는 우여곡절 끝에 근소한 차이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야당을 중심으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고 반발도 커지고 있다. 야당은 “이번 투표의 정당성 논란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선관위가 이번 투표를 무효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에르도안의 정치적 입지가 더욱 강화된 상태에서 결과를 뒤집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쿠데타 시도 이후 선포된 비상사태의 연장을 논의하기로 했다.

지역별로 분열된 ‘두 개의 터키’ 터키가 두 개로 갈라진 듯, 득표율은 지역별로 뚜렷이 갈렸다. 에르도안이 터키가 지켜온 세속주의 전통에 흠을 내며 이슬람화를 강조했고, 지난해 7월 군부의 쿠데타 실패 뒤 언론인·공무원을 가리지 않고 반대파를 탄압·해고·구금하는 등 반민주적 행태를 보였으며, 이번 국민투표를 앞두고는 반유럽주의 민족 감정을 부추기는 전략을 펴온 결과다. 에르도안의 반서구·이슬람주의에 호응하는, 도시화가 덜 된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는 찬성표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대도시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포함한 서부 에게해 연안 도시 지역과 에르도안 정부의 탄압을 받아온 남동부 쿠르드족 지역에서는 반대표가 훨씬 많았다.

이번 개헌안 통과로 터키는 1950년부터 이어온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정치체제를 전환하게 된다. 총리제가 폐지되고 부통령제가 신설되며, 대통령이 내각과 행정부의 수반이 된다. 개헌안은 대법관 수를 22명에서 13명으로 줄이고 그중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의 사법부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다. 대통령에게 의회 동의 없는 국가 비상사태 선포권을 주고, 의회의 대통령 탄핵과 조사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개헌안이 대통령의 권한을 과도하게 강화하고 3권 분립을 위태롭게 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대선과 총선을 같은 날에 치르도록 해 대통령과 의회 다수당이 같은 정당에서 배출될 가능성도 키웠다. 야당이 에르도안을 견제할 여지가 적어진다는 뜻이다. 개정안에 명시적으로 나와 있진 않지만, 에르도안이 이번 개헌을 통해 집권을 연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터키 대통령은 5년 임기에 한 번만 연임이 가능해 이미 2014년 대통령에 당선돼 첫번째 임기에 있는 에르도안은 최장 2024년까지만 연임이 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2019년 대선 때 새 헌법에 따른 임기 계산을 시작해 2029년까지 집권을 연장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서구와의 결별 택할까 <시엔엔>(CNN)은 에르도안이 ‘승리 선언’을 한 시점에 “법치주의, 독립적 사법부, 표현의 자유 등을 통해 터키가 민주주의의 길로 계속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길은 훨씬 더 힘겨워졌다”며 “오늘 터키의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직설적 제목의 논평을 내보냈다.

서구 국가들이 터키 개헌을 주목한 이유는 ‘에르도안의 터키’가 서구에 등을 돌릴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리적·문화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에 있는 터키는 지금까지 줄곧 서쪽을 바라봤다. 이슬람권이면서도 세속주의의 길을 걸었고, 유럽연합(EU)에 가입하려고 끊임없이 구애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 대테러전도 수행해왔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집권 뒤 이런 전통과 거리를 두고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의 히잡을 부활시키는 등 이슬람화 정책을 펴며 인기를 끌어왔다. 이번 선거에서는 재외국민의 개헌안 찬성을 유도하기 위해 독일과 네덜란드에 장관을 입국시키려다 실패하자 각국을 “나치”라고 비난하기도 했고, 유세 과정에서 유럽연합에서 금지하는 사형제를 부활시키고 유럽연합 가입 정책을 재검토할 의사를 밝혔다.

외교·안보 측면에서도 에르도안은 유럽·미국과 각을 세우고 있는 러시아와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터키가 서구에 등을 돌릴 경우 유럽과 미국은 당장 난민 문제와 대테러전에서 곤란을 겪게 된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서구 입장에서 터키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원으로서 이슬람국가(IS)의 테러를 차단하고 (내전 중인) 시리아 난민 300만명을 수용하고 있는 나라다. 두 문제 모두 유럽의 아킬레스건으로, 터키와의 관계가 악화되면 유럽에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에르도안은 ‘유럽의 운명을 쥐고 있는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다만 실제로 유럽과 터키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민족주의를 자극해온 ‘선거 전략’이 개헌 이후엔 바뀔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이 교수는 “에르도안은 유럽연합과 관계를 복원하려 할 것이다. 과거 그는 어떤 세속주의자보다도 유럽연합 가입을 지지했고 협력에 적극적이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도 유럽·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진 가운데 그들을 압박할 선택에 불과하다고 본다. 터키가 이슬람주의로 회귀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것이 중동 다른 나라처럼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향하고 있지는 않다”고 짚었다.

김효진 기자 ju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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