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맞벌이 부부를 '전쟁터'에서 구하라
[경향신문] 외벌이 부부의 아이 키우는 부담도 가볍지 않지만, 맞벌이 부부는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아침에 밥 챙겨 먹이고 어린이집이나 학교 등교시키는 일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다. 심각한 문제는 방과 후다. 어린이집은 저녁까지 애들을 봐주지만, 초등학교 1, 2학년은 오후 1~2시경, 나머지 학년은 3~4시경이면 하교한다. 아이를 봐주는 조부모, 즉 ‘할마’ ‘할빠’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경우라면, 퇴근할 때까지 아이 돌볼 방법이 막막하다.
도우미를 둘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 결국 방법은 아빠나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학원 뺑뺑이를 돌리는 것이다. 제 몸보다 큰 가방을 멘 아이들이 학원을 전전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안쓰러워서 마음도 아프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맞벌이 부부가 외벌이 부부보다 학원비 지출이 더 많은 이유는 성적 욕심 때문이 아니라, 아이 맡길 곳이 없어서라는 사실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방학이 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우리 집도 맞벌이를 한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후에 와서 우리 부부가 퇴근할 때까지 애들을 봐 준다. 방학이 가까워오면 우리 부부는 곤욕을 치른다. 출근시간부터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는 오후까지 아이들을 맡길 학원 시간표를 짜야 하기 때문이다. 둘 다 직장 일에 쫓기다가 시간을 놓쳐, 애들 보낼 학원조차 없어 발을 동동 굴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지금도 방과후교실이 있다. 그러나 정원 제한도 있고, 대부분이 한두 시간짜리 개별 프로그램으로 되어 있어서, 맞벌이 부부의 아이 키우는 걱정을 덜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몇 년 전 초등학생인 두 아이와 함께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부러운 점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 하교시간부터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을 통째로 봐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학교가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교회나 YMCA 등이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하교 시간에 돌봄교사들이 학교로 와서, 애들을 모아서 데리고 갔다. 여기서 아이들은 숙제도 하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면서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의 시간을 보냈다. 방학 때에도 이런 프로그램이 다양한 기관에 의해 운영되었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통째로 아이들을 봐주는 프로그램이 모든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운영된다면, 맞벌이 부부의 양육 걱정과 사교육 부담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지방의 한 초등학교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입학생 수가 줄어들어서, 폐교 위기에 몰렸던 그 학교는 이제 대기번호를 받아야 입학할 수 있을 만큼 인기학교가 되었다. 그 비결이 방과후학교였다. 부모들이 퇴근하기 직전 시간까지 아이들을 돌봐주는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이다.
둘째, 유연한 근무시간을 보장해서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같은 도시에 살던 첫째 처제는 의무기록사이다. 그런데 병원에는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반나절만 출근한다. 그 외에는 집에서 원격으로 근무한다. 처제는 새벽에 일어나서 애들이 깰 때까지 한두 시간을 일한다. 아이들 등교와 남편 출근 때 잠깐 일을 멈췄다가 다시 일을 해서 오후 2~3시경이면 하루 일을 마친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러 집을 나선다. 원격근무까지는 아니더라도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정할 수 있거나, 더 나아가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단축할 수 있다면, 아이 돌보는 문제 때문에 아빠나 엄마가 직장 생활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셋째, 짧은 노동시간이었다. 둘째 동서는 미국의 한 대학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조교수이다. 우리나라 대학병원의 조교수는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 근무시간이 가장 긴 사람들일 것이다. 환자 진료, 승진을 위한 연구와 논문 작성, 전공의 지도, 그 외 해당과의 온갖 궂은일을 떠맡아 한다. 새벽에 출근해서 자정까지 근무해도 하루 일을 다 마치지 못한다. 그런데 둘째 동서는 어린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저녁에 데리고 오는 일을 도맡아했다. 오후 5시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세계 최장 수준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그 어떤 것보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고, 일·가정 양립을 보장하는 강력한 정책이다.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데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사람 또는 집단은 저출산 문제와 일·가정 양립을 말할 자격이 없다.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완전 돌봄, 유연한 근무시간, 짧은 노동시간, 여기에 더해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은 매일 전쟁을 치르는 맞벌이 부부에 우리 사회가 주어야 할 생존 비품이다. 아이 키우는 일을 국가가 함께 책임져서, 맞벌이 부부를 전쟁터에서 구출해 주어야 한다.
<이진석 |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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