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2017. 4. 14.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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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한겨레]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엮음, 오래된미래, 2005 사랑은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다. 동료애, 조국애, 우정….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한 한정된 개념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 사랑은, 배타적인 일대일의 성적 관계가 동반되는 짧은 기간의 ‘인간관계일 뿐이다’.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동시에 모든 인간관계에는 애증의 요소가 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이 책과 엮은이 류시화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28쪽)도 좋지만 표제작이 유명하다. 누구나 고민하는 삶의 문제. 상처받았음에도 끊임없이 다시 시도하는 것은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언뜻 득도의 시처럼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잔인한 이야기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알프레드 디 수자 지음, 18쪽)

두 가지가 문제다. 사랑, 춤, 노래, 일, 삶은 병렬적 가치가 아니다. 관계에서 ‘실패(배신, 상실, 두려움…)’한 후 다시 인간을 신뢰하는 것과 관객 없이 춤추는 것이 어떻게 같은 수준의 용기를 필요로 한단 말인가. 인간관계에서 고통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쓴 시 같다.

두 번째로, 단언컨대,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잠언이 아니라 관념이다. 인간관계는 기억, 체현, 흔적이든 상처의 면적의 차이가 있을 뿐, 영원히 몸에 남아 있다. 다룰 수는 있어도,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다시 찾아온 관계가 이전과 체격만 비슷해도, 우연히 같은 단어만 써도 뒤로 물러서게 된다. 내가 변하면 다른 유형의 관계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상처받은 사람이 변하는 것도 어렵고, 좋은 인간관계가 보장된다는 법도 없다.

실패에서 배울 수 있는 영역은 사업이나 공부처럼 한정적이다. 인간관계는 그렇지 않다. 관계는 배움 이전에, 상처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도 다시 한번? 자신이 없다. 피해의식과 분노로 남은 인생을 보낸다면, 이처럼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분노의 시대요, 상처의 시대다. 상처받고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을까.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것이 양극화된다. 계층 구조는 물론이고 인성까지 둘로 나뉜다. 이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빨리 적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사람.

기존의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인권과 자유를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다면, 지금은 스스로 알아서 각자도생을 수행해야 할 ‘자원’이 되었다. 우리의 몸은 ‘존재’에서 ‘자원’으로 변화했다. 개별화된 사람들, 모두가 경쟁자인 구도에서 기존의 집단적 규범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이제까지 개인은 자신의 가치를 확인시켜줄 타인(사회)이 필요했다. 하지만 여성학자 민가영은 이런 시대에 나의 의미는 타인와의 관계가 아닌 자신이 자신과 맺는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타인으로부터의 승인보다 자신만을 믿는 상태에서 윤리는 의미가 없다. 이때 가장 흔한 현상은 자기합리화, 자기도취, ‘마인드 컨트롤’ 등 이른바 ‘정신승리’다.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과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이들은 자신이 피해를 준 이들이 괴로워하면 대화를 요구한다(“응답하라”). 아이러니하게도 나르시스트들은 대화 만능주의자다. 소통 이전에, 자기 잘못을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 고통받는 사람은 대화를 ‘거부’하는 이들이 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누가 더 뻔뻔한가, 나쁜 세상에 빨리 적응하는가,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이기적인가, 면전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에 따라 삶의 ‘승패’가 좌우된다. 억울한 이들만 늘어난다. 힘이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런 시대의 꼬리일 뿐이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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