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누나' 박보나씨가 회상한 세월호 3년

정리|김형규 기자 2017. 4. 1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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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박보나씨(23)는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2학년5반 박성호군의 큰 누나다. 참사 후 3년 동안 박씨는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탐욕과 무능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차례로 목도하며 좌절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유가족’이 된 충격과 슬픔도 부모와 동생들을 챙기느라 돌아볼 틈이 없었다. 깊이 패인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준 것은 오히려 먼 이국땅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외국인이었다. 평범한 국문과 대학생이던 그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단단한 ‘어른’으로 자랐다. 경향신문은 ‘세월호 세대’를 자처하는 그의 기억을 통해 세월호 3년을 돌아봤다.
박보나씨가 지난 10일 경기 안산시 고잔동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 쉼터인 ‘우리함께’에서 지난 3년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강윤중 기자

■그 날의 기억

그 날,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 친구가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여줘서 알았어요. 단원고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그 친구도 사촌동생이 세월호에 타고 있었어요. 바로 강의실을 나와서 가족들과 연락하며 안산으로 내려갔어요. 첨에 구조됐다는 기사 보고 안심했다가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소식 듣고 다시 친구랑 같이 오열하고… 계속 기도했어요. 부모님이 진도 내려가시는 차 안에서 생존자 명단을 받았는데 거기 성호가 있다고 그래서 당연히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도에 도착해서는 또 명단에 없다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다시 어떡해야 되나. 제발 살아있기를… 빌면서 기도했어요. 그 날 밤 잠을 못 자고 계속 뉴스 보면서 동생들이랑 뜬 눈으로 새웠어요. 그 안에서 성호가 엄청 춥고 무서울텐데 우리만 따뜻하게 있는 게 미안해서 보일러도 못 켰어요. 이불 덮는 것도 미안했어요.

엄마는 진도 내려가서 한 사흘쯤 지나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어요. 저한텐 충격이었어요. 그래도 기적이 있을 거라고 믿어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또 동생들에게 얘기했지만 저도 진도에 가보니 왜 그러셨는지 알겠더라고요. 성호는 일주일 만인 23일에 돌아왔어요. 그날이 제 영명축일이어서 축하해주러 올라와달라고 했는데 정말로 와줘서 고마웠죠. 사고 소식을 같이 들었던 친구는 그때 아직 사촌동생이 안 나왔을 때였어요. 그 친구는 저한테 축하한다고 하고 저는 미안하다고 그랬어요.

전에도 우리나라에 부정부패가 많다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할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어느 것 하나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이상한 사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왜냐면 진도에서 별 일이 다 있었잖아요. 경찰이 유가족 행세하면서 가족들 염탐하고. 기자들도 가족들 이용하고 거짓말 하고. 그런 일들이 하나도 언론엔 보도가 안 되고.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됐던 거 같아요. 이 나라에서 우리가 계속 살 수 있을까 고민이 될 정도로.

휴학계 내러 학교에 갔을 때 학생처장님이 저를 보자마자 처음 한 말이 ‘어른들한테 화 나지?’였어요. 위로가 아니라. 황당했죠. 그분은 자기가 궁금한 것만 물어보더라고요. 가족들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냐, 이런 얘기들. 힘이 없으면 그런 일을 당하니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도 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에 대한 불신과 실망도 커졌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 취직하고 돈 많이 벌라는 건데, 이제 저한텐 그런 게 아무 의미가 없어졌잖아요. 원래 문화산업 쪽 일을 하고 싶었는데 세월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됐어요. 다른 형제자매들도 비슷해요. 언론 쪽이나 사회복지, 심리학을 공부하려는 친구들도 많아요. 우리가 참사를 겪으며 정말 부족하다고 생각한 부분들, 나라도 제대로 배우고 일을 해야겠다. 그래서 나중에 우리 같은 피해자 만났을 때는 우리가 받았던 그런 상처들 되풀이하지 않게 하자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죠.

안산교육지원청에 마련된 ‘단원고 4·16 기억교실’ 2학년5반 동생 성호군의 자리에 앉은 보나씨가 동생의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기나긴 싸움의 시작

처음엔 가족대책위에서 인터넷 비방글 모니터링 하는 일을 했어요. 그러다 유가족 소식 전하는 ‘4·16TV’ 활동도 같이 했었고. 그해 여름엔 세월호 선장·선원들 공판 때 법정에 가족 대표로 최후진술도 했어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선원들 보면서 화났던 기억이 나요. 세월호 참사를 ‘단순 교통사고’라고 하고 유가족을 모욕하는 말들도 힘들었지만 ‘돈 타령’만 하는 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우리 가족이 나가던 성당 사람들 중에도 ‘그 정도면 많이 받은 것 아니냐’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비유하면 저희는 상을 치르는 상황인데, 장례식장에 와서 ‘근데 너 보상금 얼마나 받았어?’ 묻는 게 일반적이진 않잖아요. 근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한테 와서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했어요. 아무리 정부가 보상금으로 그런 프레임을 만들고 언론 플레이를 한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 목숨 앞에서 돈을 따지는 사람이 많은 이 사회가 정상은 아니구나 싶었어요.

성호는 저희 4남매 중에서도 제일 착하고 순했어요. 말도 잘 듣고 속 썩이는 법도 없고. 어릴 땐 너무 눈물도 많고 그래서 애기 같았는데 고등학교 가면서 부쩍 듬직해졌죠. 성호가 어렸을 때 몇 번 큰 사고를 당했는데 그때마다 기적처럼 멀쩡했어요. 다들 ‘주님이 지켜주시는 아이’라고 했어요. 그런 특별한 경험들도 성호가 신부님 되겠다고 결심한 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다니던 성당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이 오시면서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도 관심 가지게 됐었고, 본인도 어떤 사제가 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한 것 같더라고요. 지금도 성호가 정말 하고싶었던 게 뭘까, 내가 그걸 해야 하는데 생각을 해요.

작년 여름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도 강제 해산되고 참 막막했어요. 세월호 지겹다, 가족들 그만 하라는 소리도 점점 많아졌고. 단원고 기억교실도 사라지게 됐잖아요. 그거 지키자는 것도 그냥 추모공간 하나 두자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라’던 이 나라의 교육을 제대로 바꾸자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던 건데. 교실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단원고 다니는 형제자매 중에선 너무 상처 받아서 자퇴를 고민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매번 지기만 하고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우리가 이 싸움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고 너무 지치더라고요. 주변에 남은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애초부터 20년, 30년 걸릴 싸움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천주교 사제를 꿈꿨던 동생 성호를 기리며 참사 후 안산 세월호 합동분향소 앞에는 작은 목조 건물인 ‘기다림의 성당’이 만들어졌다. 보나씨가 지난 10일 성당을 찾아 기도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힘이 되어준 사람들

한번은 ‘치유공간 이웃’의 정혜신 원장님이랑 형제자매들이 집단상담을 했어요. 다들 그동안 ‘유가족’으로만 살면서 너무 감정을 눌러왔던 거에요. 부모님 앞에서 울 수는 없잖아요. 보는 사람마다 ‘네가 잘해야 된다’ ‘부모님 잘 돌봐라’ ‘네가 형제 몫까지 잘 살아야 된다’ 하는 말들도 부담이 되고. 근데 너 자신의 삶을 잘 살아야 누구의 누나로도 잘 살 수 있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겸사겸사 나를 돌아보고 세월호도 알릴 겸 다른 유가족 언니랑 몇분이 함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다녀왔어요.

세월호 참사를 설명한 영어·스페인어 전단지를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어요. 노란 리본도 나눠주고요. 근데 사람들 반응이 한국이랑 다른 거에요. 이미 2년이 지난 일인데 거기 청년들이 다들 자기도 그 사건 기억한다고, 서로 노란 리본 달라고 하고 위로를 해주더라고요. 도착지인 산티아고 성당에선 세월호를 기억하는 미사를 봉헌해줬어요. 산티아고 시장님이 저희를 보고싶다고 해서 시청에서 시장님을 만나기도 했어요. 저희가 전단지랑 노란 리본 배지를 드리니까 바로 그 자리에서 배지를 해주시는데… 안산시장도 리본 배지 안 하거든요. 대통령도 그렇고. 오히려 한국에선 아직도 리본 달고 다니냐고 사람들 타박하던 땐데. 남의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기억해주고 위로를 해준다는 게 정말 큰 힘이 됐어요.

‘기다림의 성당’에서 기도하는 보나씨의 모습 / 강윤중 기자

■대통령이 구속됐어도… 여전한 2014년 4월16일의 풍경

국정농단 사태가 점점 커질 때 촛불집회에도 여러 번 나갔어요. 저희가 매달린 일들이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에 사실 큰 기대는 없었어요. 근데 사람들 시선이 달라진 건 느꼈어요. 저희가 행진할 때 박수도 쳐주고 같이 우는 분들도 계시고. 예전 같으면 지겹다, 나라 망신 시키고 있다는 그런 말 많이 들었을 텐데. 첨엔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구나 했죠. 조금은 희망도 느껴졌고. 근데 그런 마음도 잠깐이고 사람들이 지치고 이 모든 게 금방 끝나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더 컸어요. 탄핵이 되고도 마음을 놓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탄핵됐다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지금도 박근혜가 구속됐지만 그 사람만 죄 지은 게 아니잖아요. 이 사건에 가해자가 너무 많거든요. 책임자 처벌은 이제 시작인데, 사람들이 다 끝났다고, 잘 해결됐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이 돼요. 오히려 지금 가족들에게 많은 힘이 필요한 상황이고 우리 모두 더 힘을 내야 하는 상황인데…

인양된 세월호 모습 보는 게 사실 정말 힘든 일이에요. 제 동생이 학살당한 장소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보지 않을 수 없어요. 진상규명 할 수 있게 선체 온전히 인양하라고 3년 동안 얘기했는데 올라오자마자 배에 구멍 뚫고 선미 램프 자르고… 펄 안에 유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그냥 밟고 지나다닌다는 기사 보면서 지난 3년 간 내내 지켜본 모습이지만 정말 한국은 아직 멀었구나 생각했어요. 부모님들이 목포신항에 다시 천막 치고 노숙하는 거 보면 2014년 4월16일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요. 정치인들은 와서 보여주기식으로 몇마디 하고 옆에서 사진이나 찍고 있고. 3년 동안 우리는 좀 더 상식적인 사회,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렇게 싸우고 그렇게 거리에서 외쳤는데 바뀐 건 없는 거 같아서 더 힘이 들어요.

‘기다림의 성당’ 앞에서 보나씨가 동생과의 추억을 설명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진실 밝히고 세상 바꾸는 일을 어떻게 포기해요

참사 얼마 뒤에 세월호보다 먼저 일어난 다른 참사 유가족들이 모여서 단체를 만든 걸 알게 됐어요. 그분들 말씀이 그때 우리가 제대로 했으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났을텐데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그게 저한텐 크게 다가왔어요. 내가 지금 이 순간에 너무 힘들다고 한국을 떠나거나 이 일을 외면할 때는 더 큰 사건이 또 일어날 지도 모르잖아요. 이미 세월호 이후에도 많은 죽음들을 마주해야 했는데 그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죄책감이 크게 느껴졌어요.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해서 또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그때가 세월호 아이들에게 미안했던 것 이후에 가장 미안한 순간들이었어요. 물론 너무 힘들어서 안산을 떠난 분들도 계세요. 저는 그래도 끝까지 안산에 남아서 하나하나 바꿔가면서 여기 안산 시민들과 같이 사는 게 의미가 있을 거 같아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살던 곳이잖아요.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준비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요. ‘용산 참사’처럼 세월호 전후에 있었던 국가 폭력의 발생지를 찾아 해당 사건에 대해 배우고 우리 고민도 넓히는 기행을 떠나려고 해요. 가능하다면 그곳에서도 유가족 형제자매들을 만나고 싶어요. 유가족 형제자매로 사는 건 어떤지 여쭙고 그걸 통해 우리의 미래도 더 잘 준비하고 싶어요. 안산에 제대로 된 세월호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고요.

<정리|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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