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채은의 인생소설]한강, 채식주의자

구채은 2017. 4. 1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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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불화, 그 시작은 인간의 잔인한 동물성


'우두망찰 서 있다'(27쪽),
'우두망찰 건너다보았다'(180쪽)

얼떨떨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를 일컫는 말. '우두망찰'이란 단어가 소설 '채식주의자'에는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주인공 영혜가 주어고 두 번째는 그의 친언니 인혜가 주어다.

영혜는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다. 고기와 생선, 가죽구두는 몽땅 갖다버린다. 육식을 일절 금한 몸이 빼빼 말라 자학적으로 보일 정도다. 남편과 성관계도 거부한다. 고기냄새가 난다는 게 이유다. 유두가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부부동반 모임에 나가고 주변의 경멸과 회유에도 고집스럽게 채식을 고수한다. 육회를 즐기는 아버지와 활어회를 뜨는 어머니, 닭 한 마리는 정육점 칼로 너끈 잡는 언니는 그런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위협과 폭력을 가한다. 아버지는 영혜의 입에 억지로 탕수육을 쑤셔 넣는다. 어머니와 언니는 만류하는척하면서 스리슬쩍 방관한다. 영혜는 자해의 방식으로 이들에게 항거한다. 영혜의 남편 '나'는 영혜가 세상과 사회와 불화하는 모습을 '우두망찰'하다고 표현한다.

인혜는 그런 영혜 때문에 고통스럽다. 자신의 남편과 육체적 관계를 맺어 가정 파탄에 이르게 하고 거식증에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보이는 여동생 영혜를 보며 인혜는 삶에 근본적인 환멸을 느낀다. 영혜가 정신병원에서 나무흉내를 내며 열에 들뜬 표정을 지을 때, 인혜는 그의 두 눈을 응시하면서 황망하다. 인혜의 남편은 처제의 몽고반점에 홀딱 빠져 예술을 빌미로 그와 성관계를 맺는다. 생계부양자이자 소도시에서 목재상과 구멍가게를 하는 평범한 집안의 맏딸로 검약하게 살아온 인혜는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른 여동생과 남편 사이에서 깊은 체념에 빠져 '우두망찰'한다.

그러니까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폭력에 극단적으로 저항해 세상의 규범과 관습에 철저히 불화하는 인물 영혜와 그 반대편에서 서서히 폭력에 물들어가는 인혜가 세상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그 지점을 추적한다. 작가는 두 인물이 세상과 부조화하면서 보이는 공포와 체념, 처절함과 아연함에 천착한다. 영혜는 그런 세상에 엉거주춤 걸터앉아 순진무구하게 저항하지만 인혜는 묵묵히 폭력에 적응하고 견뎌내다 파국을 맞는다. 영혜가 온몸으로 폭력에 대항해 불타버리는 초처럼 소멸해간다면 인혜는 세상 속에 규범화되고 합리화된 폭력을 그저 견디고 버티며 살다 일 순간 마멸해버리는 인물이다.

221쪽, 연작소설 세 편을 묶은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인물들을 따라가는 작가의 시선은 너무나 진지하고 무거워 읽는 사람을 진 빠지게 한다. 이 소설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타고 (수상을 계기로) 집중 조명을 받은 후에도 많은 독자들로부터 "난해하다"는 평을 받은 이유다. 작가는 어떤 활극이나 서사의 리듬감, 우회로를 택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인물들의 삶을 밀고 나간다. 작가가 영혜의 무의식 속 끔찍한 잔상으로 남은 '개고기를 먹은 날'을 한강 작가 특유의 이텔릭 체로 표현한 대목(53쪽)이 그렇고 '버텨야만 하는 것'으로서의 인혜의 삶을 낮은 목소리로 전하는 후반부가 그러하다. 거기엔 분명 보고 싶지 않고 굳이 봐선 안 될 것 같은 인간이 가진 동물성의 잔인함과 치욕스러움, 합리화되고 내면화된 폭력을 서늘하고 엄정하게 바라보는 무거운 시선이 자리한다. 너무 익숙해 무던해진 폭력을 대하는 인간의 흉물스런 민낯이다.

작가가 주목하는 폭력은 외연이 넓다. 육식이나 물리적 폭력만을 향하진 않는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도 죽일 수 없으니까"라고 말하는 영혜는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라고 소리친다.

채식, 여성성, 식물성, 자연 그리고 무의식과 꿈을 연결 짓는 매듭이 너무나 전형적이다. 수사가 서사를 압도하는 한국소설 특유의 경향성도 짙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소설을 '눈으로 읽는 이야기'가 아니라 '감각하고 만지는 소설'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출판사 창비 공식집계 기준 80만부가 팔려 밀리언셀러에 근접한 이 소설에 대해 맨부커상 선정위원회는 "위험하고 충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평했다.

'채식주의자'|한강 지음|창비 출간|값 1만2000원|2007년 초판 발행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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