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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부드러운 처세의 재상 맹사성 몸을 낮추어야 머리가 부딪치지 않는다

입력 : 
2017-04-13 10: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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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시대의 명재상 맹사성. 그의 처세의 기본은 절제와 중용이었다. 물론 그의 젊은 시절은 파직, 좌천, 유배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맹사성은 이를 약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마음은 겸손과 배려로 연결되었고 궁극에는 ‘적을 만들지 않는’ 처세로 완성되었다. 결벽에 가까운 도덕성을 기본으로 한 청렴하고 정직한 재상이었던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세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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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관리의 아들, 조선의 명재상이 되다 조선 4대 국왕인 세종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성군이었다. 그는 성리학적 이념을 기반으로 위민과 애민을 몸소 실천했고 그의 통치는 한마디로 ‘민본사상’에 입각한 ‘백성을 위한 정치’였다. 1등 리더에게는 당연히 1등 참모들이 나타난다. 세종 시대 이념 확립과 행정 부서에 필요한 인재들은 집현전에서 배출되었지만 세종에게는 복심의 명재상들이 존재했다. 황희, 맹사성, 윤회, 김종서를 필두로 허조 등의 기라성 같은 명신들이 바로 세종 치세를 빛낸 주인공들이다. 흔히 조선 왕조 4대 명재상을 꼽을 때 황희, 맹사성, 이원익, 류성룡을 거론하는데 이 중 두 명이 세종 시대에 있었다는 것은 그 시기가 얼마나 번성하고 안정된 통치의 시대였는지를 증명한다.

세종의 쌍두마차는 단연 황희와 맹사성이었다. 황희는 18년간 영의정으로 재직하며 세종의 통치이념을 실천했고 맹사성 역시 좌의정, 우의정으로 8년을 봉직하며 세종의 든든한 한 팔이 되었다. 역사는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을 거론하며 이 두 사람을 완벽하게 용인한 세종의 통찰력을 칭찬한다. 과감하고, 외향적인 성격의 황희는 이조, 병조를 맡아 국사를 돌봤고 황희에 비해 온화하고 문화예술적 소양이 풍부했던 맹사성은 공조, 예조 등을 맡았다. 또 한 명의 재상 윤회는 외교를 전담했고 황희와 맹사성이 발굴하고 조련한 명장 김종서는 국방을 맡아 세종을 보필했다. 이 중에서 맹사성에 주목해본다.

맹사성은 동시대를 같이 했던 황희에 비해 조금은 가려진 느낌이 있다. 하지만 그는 세종 시대를 유교에 입각한 ‘예악 禮樂’의 시대로 이끈 주인공이다. 유교는 법치보다 예치를 더 높게 평가해 예악의 정비야말로 국가의 기본을 세우는 것으로 평가했다. 맹사성은 이 프로젝트를 박연 등 젊은 인재들을 등용해 이끌었다. 우리 음악인 향악과 중국의 음악 아악의 조화를 통해 종묘제례학을 완성한 것이다. 맹사성은 행정, 문화는 물론 국방문제에도 관여해 조선에서 문관 출신 최초로 군 사령관인 삼도군도진무를 역임했다.

이처럼 다방면에서 활약한 맹사성을 무엇보다 빛내는 것은 그의 결벽에 가까운 청렴과 정직한 공직생활이다. 한 나라의 정승을 지냈지만 그의 집은 비가 새고 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집이었다. 그는 평생을 녹봉으로만 살았고 그것조차 아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공무가 아니면 역참을 이용하지 않고 검은 소를 타고 다녔으며 특정 세력과 당파를 만들어 권력을 만들지도, 부리지도 않았다.

그의 처세술은 한마디로 ‘중용과 온화’이다. 그것은 맹사성의 출신 성분에서 기인한다. 맹사성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에서 벼슬을 지냈다. 그의 조부 맹유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새로 들어서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지조로 두문동에 들어가 불에 타 죽은 72현 중 한 명이다. 정몽주와 매우 친했던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 역시 두문동에 들어갔지만 마지막에 나와 한산으로 낙향한 선비였다. 그런 조부, 아버지 밑에서 교육 받은 맹사성은 비록 스승인 권근의 권유와 아버지 맹희도의 허락으로 조선에서 관직을 받았지만 마음 속 갈등과 번민마저 다 지운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맹사성의 부인은 최영 장군의 손녀딸이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을 잡은 이성계는 최영을 숙청했고 그 여파로 인해 맹사성은 연좌에 걸린 뻔 했지만 이성계의 배려로 몸을 보존할 수 있었다. 즉 맹사성의 가계도를 보면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거나 높은 관직에 올라서기에는 애초부터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맹사성은 태조 이성계에게 발탁되었고, 태종 이방원에 의해 관리로서의 자격과 실력을 검증받아 세종의 명재상이 되었다. 즉 맹사성은 “절개를 지켜 한 목숨 버리는 것도 영광스러운 선택이지만 무엇보다 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는 길도 글을 배운 선비의 자세”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부터 맹사성은 비정치적, 비파벌적 처신을 모토로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관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공정하고, 청렴하고, 겸손하고, 배려심 있는 관리, 즉 자신을 낮추고 백성을 높이 대하는 처세를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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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재주가 넘치면 인격을 해친다 맹사성은 1360년 고려 공민왕 때 충남 온양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맹의는 이조전서, 할아버지 맹유는 이부상서, 아버지 맹희도는 수문전 제학을 지내는 등 대를 이은 관리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발휘했다.

맹사성은 5세 때부터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권근에게 사사했다. 맹사성은 1386년 문과에 급제하며 춘추관 검열이 되면서 관리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최영 장군의 손녀딸과 결혼했다. 당시 고려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사대부세력이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기 위해 최대의 걸림돌인 최영을 숙청했다. 최영은 귀양을 떠났고 그의 아들, 즉 맹사성의 장인인 최담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맹사성도 연좌에 걸려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하자 황희를 비롯한 고려의 충신들은 두문동에 들어가 고려와 운명을 같이하려 했다. 이곳에는 맹사성의 조부 맹유, 아버지 맹희도도 있었다. 하지만 두문동의 72현은 재주가 뛰어난 황희를 내보냈고 맹희도 역시 한산으로 낙향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이때 맹희도는 맹사성에게 새로운 왕조에 협조해 ‘백성을 위한 진정한 관리가 되라’는 당부를 했다. 권근, 하륜, 성석린 등의 천거와 이성계의 배려로 맹사성의 조선 개국을 현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맹사성의 평생 가치관을 확립한 일화가 있다. 소년 급제한 맹사성은 우쭐했다. 자신의 빛나는 성과와 스스로의 재주에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지방관으로 가면서 맹사성은 당시 덕망과 학식으로 이름 높은 노스님을 찾았다.

“스님, 어떻게 하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을지 알려주길 바랍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면 됩니다.”

“그거야, 세상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 아니겠습니까?”

실망한 맹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스님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차나 한 잔 하고 가시지요.”

맹사성은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아 차를 받았다. 그런데 스님이 차를 따르는데 찻잔에 물이 넘쳐 방바닥에 흘렀다.

“스님, 찻잔의 물이 넘쳐 방바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요? 어찌 찻잔의 물이 넘치는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 얕은 재주가 넘쳐 인격을 망치는 것은 모르십니까?”

순간 얼굴이 빨개진 맹사성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급하게 일어나 방을 나가다 그만 문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스님의 말이 이어졌다.

“항상 몸을 낮추세요. 그러면 머리를 부딪치고 다닐 일이 없습니다.”

맹사성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실용적 가치를 중시하고 물욕과 권력에 대한 유혹을 버리게 되었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몸가짐을 하는 한편, 상대의 귀천과 고귀를 따지지 않고 하나의 인격으로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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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으로 ‘죽음의 시험’을 통과하다 맹사성의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태조의 비 신덕왕후 강 씨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와 왕비의 조카 사위인 개국공신 정희계의 시호를 올리는데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태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 당했다 복직한 적이 있었다. 태종 때에도 맹사성에게 시련은 계속되었다. 민공생 탄핵사건에 연루된 장서정의 사건 처리를 지연시킨 민공생의 잘못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공주목사로 좌천당하기도 했다. 얼마 후 복직했지만 이번에는 이거이의 노비소송 문제를 잘못 처리해 온수로 유배를 떠나기도 했다. 1408년 조대림 사건은 맹사성의 일생 중 닥친 가장 큰 위기였다. 조대림은 태종의 사위이자 태종의 최측근인 조준의 아들이었다. 그의 여종이 관노 출신 호군 목인해와 결혼했다. 목인해는 그 인연으로 조대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대림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영감께서도 큰 공을 세워 아버지이신 조준 대감 못지않은 공신이 되어야 합니다.” 조대림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목인해의 계책에 빠져 들었다. 목인해는 무사를 사 궁에 침입해 태종을 노리는 것처럼 하고 이를 사전에 일망타진해 태종에게 큰 공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자작극을 펼치자는 것이다. 조대림을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목인해는 이를 먼저 ‘조대림의 역모’로 의금부에 고발한다. 국청이 벌어졌고 당시 사헌부를 맡고 있던 맹사성이 이 사건을 담당했다. 사건의 진상은 밝혀졌다. 하지만 맹사성은 고민에 빠졌다. 법대로 하면 조대림에게 큰 벌을 내려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조대림을 무죄방면하기 원하는 태종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이고, 만약 조대림을 무죄로 방면하면 법을 엄정하게 집행할 사헌부 관리가 임금의 눈치를 보고 죄인을 풀어주었다는 평가를 받을 판이었다.

맹사성은 오랜 고민 끝에 법대로 처결했다. 태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태종은 맹사성을 고문하고 ‘모약왕실 謨弱王室’ 즉 ‘거짓자백으로 왕실을 욕보이려 했다’는 자백을 받게 했다. 태종은 맹사성을 죽이라 명령했다. 그러자 조야의 대신들이 모두 태종에게 맹사성의 사면을 건의했다. 맹사성의 스승인 권근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태종을 찾았고, 당시 영의정 하륜, 좌우정 성석린을 비롯해 양녕대군조차 “맹사성의 처신이 사형에 처할 정도의 중죄가 아닙니다”라고 태종에게 호소했다. 태종은 맹사성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고 한산의 향교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태종 이방원의 심오한 계산이었다.

태종은 본래 신하들을 믿지 않았고 특히 고려 출신으로 조선에 출사한 관리들의 충성심을 의심했다. 그 시범 케이스에 맹사성이 걸린 것이다. 물론 맹사성의 원칙에 입각한 행동을 심하게 나무랐지만 태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맹사성을 ‘믿을 수 있는 신하’로 인정했다. 그 증거는 이듬해 태종은 맹사성을 방면하고 쌀 20석을 하사하면서 맹사성을 위해 특별한 잔치를 마련해 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맹사성은 이조참판, 예조판서,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태종이 점찍은 다음 세대 즉 세종 시대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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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하나, 검은 소 한 마리를 남긴 정승 1418년 세종이 즉위했다. 세종은 맹사성을 공조판서로 임명했다. 맹사성은 이후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의정부찬성사 등을 역임하며 좌의정에 올라 황희와 함께 쌍두마차로 세종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예악을 정리했고 또한 <신찬팔도지리지>를 펴내는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세종시대의 충실한 기획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국방 분야에서도 맹사성은 능력을 발휘했다. 세종 초부터 북쪽의 오랑캐들이 자주 국경을 침범해 백성을 괴롭혔다. 세종은 이를 토벌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계획했지만 황희, 윤회 등 조정의 온건파 대신들은 반대했다. 명목상으로는 오랑캐의 주둔지가 명나라 영토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토벌의 효과, 전비 지출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맹사성은 세종의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평소 그의 온화한 성품에 비하면 파격적인 강경 발언이었다. 이에 세종은 좌의정이던 맹사성을 문관 최초로 삼군도진무 즉 합참의장으로 임명해 여진토벌을 지휘하게 했다. 맹사성은 최윤덕을 장수로 내세웠다. 토벌군 모집과 훈련, 공격 시기, 기습과 정면승부 등 다양한 작전 계획을 세운 끝에 맹사성은 총 1만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공격했다. 몇 번의 전투 끝에 여진족은 퇴각했고 맹사성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맹사성은 크게 기뻐하는 세종에게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은 최윤덕 장군이 세웠습니다. 그에게 좌의정을 제수해 그 공을 칭찬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제청했다. 즉 후배의 공을 높이 인정하고 자신의 자리를 내주겠다는 뜻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파격적인 승진이라 반대했고 세종은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임명해 맹사성과 최윤덕 모두의 공을 치하했다.

세종의 통치를 뒷받침했던 맹사성도 세종의 뜻에 반대 의견을 낸 적이 있다. 그것은 세종의 불교 귀의였다. 세종은 궁중에 내불당을 짓는 등 불교에 큰 관심을 가졌다. 맹사성은 이를 정면에서 반대했다. “조선은 유교국가입니다”라고 주장하며 세종의 친위부대인 집현전의 학사들까지 설득해가며 세종에게 반대 의견을 올렸다. 또 맹사성은 <태종실록>을 완성해 세종에게 올렸다. 1431년, 춘추관에서 올린 <태종실록>에 대해 세종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세종은 맹사성에게 “부왕이신 태종의 실록을 내게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맹사성은 듣지 않았다. “전하, 군주가 실록을 보게 되면 사관이 사실대로 기록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되면 후세에 전하는 역사의 기록으로서 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앞으로는 임금도 실록을 볼 수 없다는 전교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세종에게 건의했고 세종 또한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조선 왕조의 어떤 임금도 실록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맹사성의 온화함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강직한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이렇게 임금에게도 ‘노’라고 할 수 있는 맹사성은 한마디로 외유내강형이면서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성품이었다. 벼슬이 낮은 사람도 손님으로 오면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했고 상석을 양보했다. 또한 평소 효심이 깊어 지방에 있는 아버지를 뵈려 갈 때도 남루한 옷에 피리 하나 들고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가 고향으로 갈 때면 인근의 지방관들이 정승을 만나려고 길을 쓸고 닦고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정승은 오지 않고 웬 늙은이가 소를 타고 지나가자 지방관이 역정을 냈다. 아전이 가서 “누구신데 이렇게 정승을 맞이하려는 길을 먼저 지나가는가?” 묻자 “정승은 아니고 그저 맹고불이 지나갔다고 전해 달라” 해 지방관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고불은 맹사성의 호다. 이만큼 맹사성은 허례허식을 싫어했고 민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절제했다.

그가 타고 다닌 검은 소 역시 마을 아이들이 괴롭히는 것을 가엽게 여겨 데려다 길렀는데 훗날 맹사성이 죽자 검은 소 또한 곡기를 끊고 주인인 맹사성의 뒤를 따라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검은 소의 충절을 높이 사 맹사성의 묘 옆에 검은 소의 무덤도 마련했다. 1435년 나이가 들자 맹사성은 은퇴를 청했지만 세종은 불허했고 몇 번에 걸쳐 은퇴를 청해 낙향할 수 있었다. 은퇴기간에도 세종은 국가의 대소사를 맹사성과 상의했다고 한다. 1438년 맹사성은 79세의 나이에 온양 자택에서 사망했다. 세종은 국정을 미루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조선의 명재상 맹사성은 허름한 집 한 채, 흰 피리 하나를 남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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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세학

실록은 맹사성을 이렇게 평가했다. ‘천성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일을 처리할 때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었다.’ 하지만 맹사성의 재상으로서의 능력과 세종에 대한 과감한 진언 등으로 비추어 볼 때 그에 대한 이런 평가는 가계의 영향일 것이다. 그는 고려 관료 가문 후손, 최영 장군 가문과의 인연으로 아마도 조선의 개국 공신과 왕조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부친의 허락으로 조선에 출사했지만 두문동에서 최후를 맞은 조부와 낙향한 부친의 선택에 당연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이 평생을 청빈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적을 만들지 않는 부드러운 처세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맹사성은 자신을 인정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세종에 대해서는 진심전력으로 보필했다. 세종은 맹사성을 비롯해 황희, 윤회 등 일당백의 재상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의 집중을 우려해 한 사람에게 권한을 집중시키지 않는 분권형 통치를 했다. 이로 인해 맹사성은 정치적 행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세종 시대를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맹사성 역시 어떤 정치세력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았고 완벽한 자기 절제와 도덕성으로 세종에게 보답했다. 한마디로 공직자의 표상이었다. 맹사성이 태종 시대 조대림 사건으로 큰 곤욕을 치룰 때 그를 위해 변론을 해준 수많은 대신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맹사성은 성석린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맹사성은 성석린을 거의 부모와 같이 섬겼다. 그 집 앞에서는 항상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고 지나갔고 성석린이 죽은 후에도 사당 앞에서도 똑같이 행동했다고 한다. 이만큼 맹사성은 사람에 대한 의리, 예의를 중시했다. 맹사성은 벼슬의 높고 낮음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다. 시골 선비와의 ‘공당 公堂’ 문답 일화가 있다. 맹사성이 시골에 다녀오는 길에 누각에서 잠시 쉬었다. 그때 한 선비가 비에 젖은 맹사성을 그저 촌로로 알고 공당문답을 하자고 제안했다.

“한양에는 무엇하러 가는 공”

“과거시험 보려고 갑니 당”

“내가 뽑아줄 공”

“농담하지 맙시 당” 하고 헤어졌다. 과거 시험을 주관하던 맹사성의 눈에 그 선비가 들어왔다. 시험 성적을 보니 합격이었다. 맹사성은 모른 척 하고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되었는 공”

선비는 자신이 놀렸던 그 촌로가 정승인 것을 알았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 당” 하자 맹사성은 “길가의 견공이라도 항상 배울 것이 없을까 생각하는 것이 공인이자 선비의 자세임을 항상 잊지 마시게”하고 따뜻한 격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맹사성이 은퇴하고 시골에 있을 때 일이다. 지방관이 인사차 들렸다. 맹사성은 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그냥 서 있기가 어색해서 지방관과 그 일행들도 맹사성과 같이 호미질을 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맹사성이 호미질을 멈추고 “내가 현감이 오셨는데 계속 호미질을 한 것은 백성들의 농사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조금은 겪어보라는 뜻이네”라고 하며 밥을 같이 먹자고 권했다. 보리밥, 파국에 간장, 고추장뿐이었다. 현감이 수저를 들고 주저하자 맹사성이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현감, 이런 밥도 못 먹는 백성이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목민관은 위로는 왕을 충성으로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해서 진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백성들의 진정한 삶을 경험하는 것도 좋은 목민관이 되는 방법입니다.”

겸손과 절제, 즉 위로는 사심 없는 충성과 정직함 그리고 절제를, 아래로는 따뜻한 배려와 부드러운 마음으로 스스로 모범을 보인 맹사성. 이것이 명재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맹사성 처세의 근본이다.

▷리더의 뜻을 내게 맞추어 각색하지 마라

‘온유 溫柔’, 말 그대로 따뜻하고 부드러움이다. 적을 만들지 않는 처세의 기본이기도 하다. 물론 자칫 줏대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지만 ‘부드러운 것은 절대 부러지지 않고 휘어질 뿐이다’라는 말은 직장생활 처세학 10계명 중 최우선이다. 적은 뜬금없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나의 행동, 말 한마디가 나비효과처럼 부풀려져 의도되지 않은 오해와 불신을 불러오고 그것이 적을 만드는 DNA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고개를 숙이고 자기 주장 없이 행동해서도 안 된다. ‘왼 뺨을 때린다고 오른 뺨을 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동네북을 자처하는 행동이다. 부드럽고, 따뜻함 뒤에는 엄청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 꼭 누군가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허물과 과오를 지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목표로 가는 가장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파벌에서 자유롭고, 도덕성, 정직성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은 업무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는 것과 같은 급이다.

조직이 클수록, 역사가 깊을수록 리더십이나 처세에서 ‘조직의 안정화’와 ‘조직의 지속 성장’에 무게를 둔다.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리더에게는 오히려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처세의 자세가 소통이나 실천에서 더 궁합에 맞는다. 리더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전파하는 방법에서 중간관리자의 주관적인 의견이 첨삭된 전파 방법을 제일 싫어한다. 사실 그런 방법은 중간관리자의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리더의 주장으로 포장된 중간관리자의 의견 반영은 조직의 체계를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급, 직책에 따라 리더의 생각을 각색하는 것은 일시적인 효과는 분명 있다. 하지만 오늘 단 1도가 빗나간 과녁은 10일, 한 달, 1년 뒤에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리더에게 정직하다는 것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숨기지 않는 것이고 부하에게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것은 솔선수범이 먼저인 것이다. ‘따뜻한 햇살이 두꺼운 옷을 벗긴다’는 말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말과 행동 하나가 상대의 경계심과 불신을 풀어내는 유일한 열쇠임은 불변의 진리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74호 (17.04.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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