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9) 분단사회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2017. 4. 1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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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은 분단의 얼굴이자 통일의 민낯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탈북민의 정착과정은 우리 사회의 통일 준비와 남북 통합의 능력을 검증하는 실험이었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하나, “그릇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함부로 만지지도 담지도 마라”

작고하신 이기택 교수님은 한국전쟁 때 월남하신 분으로 국제정치학계에서 명망이 높았던 분이셨다. 내가 학부생활을 할 무렵 은퇴 후 명예교수로 강의하셨던 교수님은 자주 나를 중국음식점에 데려가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었다. 휴전선을 넘어온 나를 두고서 당신이 어린 나이에 38도선을 넘어왔던 1950년을 회고하시곤 했다. 자신이 생전에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면서 내게 “잘 준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하셨다. 식사자리에서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두고 또 하나의 당부를 하셨는데 “그릇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만지지도 담지도 마라”는 말씀이셨다.

만들어져 가는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손자국을 낸다면 기형적인 모습으로 완성된다는 비유셨다. 보수성향의 정치학자이셨던 교수님이 혈기왕성한 탈북청년이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도 전에 정치적 논리에 즉흥적으로 정향되는 것을 우려하신 것으로만 이해했었다. 사실 논리가 단순한 무리는 휘둘리기 쉽다.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이지만 정치적 색채가 강한 탈북민일수록 상투적인 구습에 경도될 수도 있다. 뒤늦게야 그분이 하고자 했던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것 같다. 분단국가의 정치는 늘 분단·통일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끊임없이 피해자를 양산하며 오늘까지도 뜨거운 논란의 지대를 이뤄 왔다. 남북한 모두에 더 이상 연고가 없는 탈북민이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도 하다. 그때 교수님은 분단사회의 환경에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북쪽 출신의 사회초년생을 걱정하셨던 것이다.

2014년 2월 16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찰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증거조작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국정원이 북한 화교 출신 유우성씨에게 간첩 혐의를 씌운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탈북민들이 '잠재적 간첩'으로 취급받는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 김기남 기자

둘, “언제까지 탈북민을 잠재적 간첩으로 간주하려나”

공부를 잘하는 편도, 형편이 넉넉한 편도 아닌 내가 그럭저럭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던 요령은 꿋꿋이도 앞자리에 앉는 필사적인 태도와 ‘적자생존’(적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의 강박관념 비슷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아침도 ‘탈북자 100명 간첩 혐의 내사’라는 톱기사가 장식된 어느 일간지의 1면을 띄엄띄엄 훑어본 채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북한에서 온 자네는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나?” 교수님의 기습적인 질문에 그제야 물음이 내재한 응축된 코드와 나와의 착종관계를 의식했고, 나중에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됐다. 그 일이 있은 후 나의 수업자리는 앞자리에서 뒤쪽의 구석자리로 바뀌었다. 출처마저도 확인할 수 없는 기사를 낸 언론사는 단 한 줄의 후속기사도 없었고, 하늘 같은 교수님은 미안하다는 제스처도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기사로 전국에 있는 많은 탈북민이 한동안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아니면 말고 식’이지만 탈북민이 평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안고 가는 언론 보도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남북한은 분단 이래 지금까지 서로를 전복하고 타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간첩을 보내거나 포섭하고 있는데, 이는 통일을 이루기까지 포기할 수 없는 공작이다. 독일이 통일될 때 서독에 침투해 있은 동독의 간첩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통일 후 기밀문서 해제 결과 확인된 것처럼 말이다.

과거에 비해 간첩의 신분위장과 입국의 경로도 정교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탈북을 가장한 침투가 새로이 뜨고 있다. 통일될 때까지 보통의 탈북민은 잠재적인 간첩으로 피 말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보다 성숙해질 때 온전히 구별되어 모두가 개의치 않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주범인 조승희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 영주권자였지만 미국인들은 조승희와 한국인 모두를 전체화·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민자 출신의 국민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한 미국 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서독에서는 간첩사건이 터질 때에도 서독에 정착한 동독 이탈자들이 불이익을 받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체제의 자신감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독 이탈주민들도 서독의 국민이라는 이념적 포용력과 성숙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독일이 보여준 ‘성숙한’ 의식을 우리는 언제쯤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셋, “분단사회의 양면성에 방황하는 탈북민

한국 사회와 언론이 만들어낸 탈북민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색채들로 얼룩져 있다. 탈북민이라는 꼬리표와 차별의 모습을 확인하는 ‘낙인효과’, 일등국민인 한국인과 조선족·이민자 다음의 ‘삼등국민’, 자본주의 경쟁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 차별과 편견, 배제의 대명사인 ‘아웃사이더’, 남북·남남갈등의 진앙지로서의 ‘갈등의 씨앗’, 투표권은 있으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거류민’, 탈남하여 국제미아로 떠도는 ‘비국민’, 그리고 주변인과 소수자, 이방인 등 한국 사회의 인식과 태도를 반영한 이미지는 매우 창백하다. 언론이 쓰는 명칭을 보면 그 태도에 더 착잡해진다. 북한 출신들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가 필요할 때는 ‘탈북민’, 이들의 사건·사고를 다룰 때는 ‘탈북자’, 정치적 용도에는 ‘귀순자’, 종교적 내용에는 ‘탈북이주민’, 그리고 정부의 브리핑을 받아 쓸 때는 ‘새터민’ 혹은 ‘북한이탈주민’으로 변신되는 호칭은 스크럼을 짜듯 일목요연하기까지 하다. 이제는 기사에 등장하는 호칭만 봐도 내용의 전개나 스토리를 대충 알 수 있을 정도다.

체내화된 잣대와 우리 사회가 지닌 복선적인 인식은 통일을 상정할 때 밑도 끝도 없이 얼떨떨해진다. 탈북민은 남북 사회 통합에 필요한 ‘가교이자 주역’, 먼저 온 ‘통일의 마중물’이자 통일 후 남북한 통합과 상생을 판단할 ‘리트머스 시험지’이며, 그 능력을 검증하는 ‘통일의 시금석’으로 높임도 받고 추앙도 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동등한 존재로조차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 통일국가에서 주역으로 활용되기 만무하다는 견해는 오래전부터 넘쳐나고 있다. 정작 살고자, 살아남고자, 살아가고자 하는 그 주인공들은 ‘동등한 국민’으로의 수준을 포기하는 대신 편하게 살게만 내버려달라는 아우성이다.

지난해 1월 6일 JTBC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강춘혁씨가 출연해 북한의 욕을 소개했다. TV 프로그램은 탈북민들을 통해 북한 문화와 실정을 알리는 동시에 필요에 따라 희화적으로 소비하기도 한다.

넷, “분단정치의 이중고를 겪는 탈북민”

남북한을 비교하며 북한체제를 비판할 때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것이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는 헌법 21조의 조항이다. 그러나 분단사회에서 살아가는 탈북민의 위치와 특성상 그들은 이곳에서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의식 표현에 있어서 경로의존성(經路依存性)을 드러낸다. 이곳이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북한지역과 문화, 관습과 연관된 가치관과 정체성을 거세하는 구조에 탈북민은 위축되고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가 가진 이러한 불가항력의 이념 중심적이며 특유의 배타성은 정치적 역동성이 작동하는 환경적 정중앙에 위치한 탈북민에게 심리적 공포심을 유발하며 늘 자기검열을 강화하며 살게 한다. 자유와 민주제도를 온몸으로 넉넉히 받아들이기에 앞서 두려움과 이데올로기를 의식하며 비민주적 방법으로의 생존 추구를 유도하는 분단사회의 영향 안으로의 복속은 늘 불편하지만 언제나 결정적이다.

모순적이게도 탈북민은 자신들과 관련한 정착제도나 운영문제에 불만을 갖거나 북한주민에 대한 호의적 발언을 하면 그것을 북한체제에 대한 찬양으로 받아들여 비난을 당한다. 심하면 ‘간첩’ 아니냐는 부당한 의심도 통과해야 한다. 민족성마저 파괴하는 불신의 악순환은 분단사회가 인위적으로 생산한 ‘나는 문명’, ‘너는 원시’라는 차별적 구분이자 여전히 분화 중인 아(我)와 비아(非我)의 경계 지대이다. 차라리 ‘벙어리새’로 입 닫기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이미지와 존재감으로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탈북민이 경험에서 비롯된 피해의식이나 북한 인권 문제를 비롯한 탈북자 문제가 보수의 독점담론으로 다루어져서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는 측면도 있다. 한쪽에 편중된 믿음과 확신뿐만 아니라 단편적이고 편향적인 시각으로 북 출신들을 이용하거나 매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탈북민 스스로의 문제인 동시에 이들을 오랫동안 정치도구화로 삼아온 분단정치의 폐습이기도 하다.

다섯, “젊은 엘리트 탈북민들의 과제”

현재 한국에 있는 3만명의 탈북민 중 약 59%가 20~30대인데, 한국 사회와 남북통일에 교두보 역할을 담당해야 할 청년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특히 젊고 교육열이 높은 탈북민이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에서 학령(7∼20세)이 된 탈북청소년의 수는 2500명을 넘어섰고, 전문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는 탈북대학(원)생은 2000명에 육박한다. 지금까지 많은 탈북민이 제대로 된 민주시민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과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젊은 탈북자들이 이미 사회의 여러 영역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다. 향후 이들이 탈북민 사회의 지형뿐 아니라 통일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리더로 성장할 것임은 분명하다.

탈북민은 분단의 얼굴이자 통일의 민낯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탈북민의 정착과정은 우리 사회의 통일 준비와 남북 통합의 능력을 검증하는 실험이었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그런 점에서 탈북민이 우리 사회에 원만히 정착할 수 있게 돕는 지원도 통일 준비의 한 영역이며 탈북민과 함께 하는 사회 통합도 분단 극복을 통한 통일과정으로 삼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분단사회의 마지막 숙제와 실질적 선진 민주사회로의 도약은 탈북민을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의 민주적 포용력과 성숙된 의식, 사회통합 능력에 있다고 본다. 인권, 차별, 배제, 인식, 가치, 공동체 등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를 교정하고 바로잡는 바로미터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그들로부터 해결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다. 비통한 자들이 존재하는 분단사회를 넘어 다함께 상생할 수 있는 통일국가를 향한 ‘창조적 실험’을 두 번 다시 없는 기회로 잡아야 한다.

<주승현(전주 기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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