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논픽션 비선권력] <7화> 원조 비선 '최태민'의 혼란스런 과거
1-7화, 최태민의 혼란스런 과거
1975년 5월22일 최태민이 구국선교단 입영선서식에서 전투모와 소총을 멘 채 대표 선서를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
최태민의 아버지 최윤성(1892-1945)은 1919년 3·1운동 당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독립선언서 1000여장을 인쇄해 배부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자 피신했다. 그는 1920년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1년여 옥고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최윤성은 1990년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다만 경성지방법원은 1920년 4월10일 판결문에서 최윤성이 3·1운동을 주도한 경력은 드러나지 않았다고 적시했다.
“1920년 1월초 황해도 평산군에서 남궁욱 신환과 함께 3명이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군사공채모집 취지서와 동 통지서를 등사기를 사용해 60여부를 작성하고 사리원면 용천리 조인선, 동면 부형리 조영근으로부터 각각 군자금 200원, 또한 유양우로부터 200원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다 일경에 피체됐다.”(윤석진, 1993. 11, 206쪽 재인용)
최태민은 인터뷰에서 어릴 적 아버지가 독립운동으로 재산을 탕진했고 논밭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기억했다(김외현, 2016. 10. 29, 6면 참고). 3-4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모두 일찍 죽었다. 특히 최태민의 동생은 부산 세관에서 일하다가 밀수꾼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태민의 이야기다. “형제가 3-4명 있었는데 다 죽었어요. 이제 나 혼자고 게다가 월남한 신세여서 친척도 없습니다.”(유인종, 1990. 12a, 255쪽)
1975년 5월22일 최태민(왼쪽)이 구국선교단 입영훈련 관계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
최태민의 딸 최순실은 최태민이 죽은 직후인 1994년 인터뷰에서 “아버님이 일제 때 일본 순사로 근무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정부가 (할아버지 최윤성에게) 훈장을 줬겠어요?”라고 되물으며 최태민이 일제 순사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국견, 1994. 8, 204쪽 참고).
1975년 6월21일 서울 배재고에서 박근혜(오른쪽 두번째)와 최태민(왼쪽 두번째)이 구국십자군 창군식 행사에 참석해 연단에 나란히 앉아 있다. 국가기록원 |
최태민은 1948년 무렵 임선이(1920-2003)와 처음 만났다. 임선이는 그때 과부였다. 임선이는 1920년 11월20일 경남 동래군 사상면 모라리(현재 부산시 사상구 모라동)에서 임객범의 장녀로 태어났고 1940년 경남 함안에서 지주의 아들 조동찬과 결혼해 그해 조순제(1940-2007)를 낳았다. 조동찬이 1947년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뒤 6개월 만에 숨지면서 임선이는 과부가 된 것이다. 최태민과 임선이는 경남 양산으로 들어가 살았고 1952년 그곳에서 최순득을 낳았다(윤석진, 1993. 11, 208쪽; 조용래, 2017, 19-21·189쪽 참고).
최태민은 1954년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많은 김제복과 6번째 결혼해 동거했다. 하지만 여자문제로 김제복에게 고소를 당하자 경남 동래군 ‘금화사’로 도피, 머리를 깎고 ‘최퇴운’이라는 이름으로 승려가 됐다.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최태민 보고서’에는 최태민의 비리 내용, 복잡한 여자관계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일요신문 |
최태민과 임선이는 1956년 최순실을, 1958년에는 최순천을 차례로 낳았다. 최태민은 6명의 부인 사이에 모두 3남6녀를 뒀다. 첫째 부인과는 장남 최광언(1946년 황해도 풍산 출생)을, 둘째 부인 박영애와의 사이에서는 딸 최광숙(1948년 경남 양산 출생)과 2남 최광현(1949년 경남 양산 출생)을 가졌다. 셋째 부인과는 딸 최광희(1951-1972)를, 여섯째 부인 김제복과는 3남 최재석(1954년 서울 출생)을 각각 낳았다. 임선이와는 최순영(1947년 경남 양산 출생), 최순득(1952년 경남 양산 출생), 최순실(1956년 서울 출생), 최순천(1958년 서울 출생)을 두고 있다. 장녀인 최순영은 임선이의 전 남편 소생이었고, 임선이와 전 남편 사이에 조순제도 있었다(안승호, 2007. 7, 79쪽 참고).
최태민과 재결합한 임선이는 생활력이 매우 강했다. 임선이는 부산에서는 양말장사와 암달러상을 하면서 돈을 벌었고, 1955년 서울로 올라와선 장사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일수놀이’를 했다. 이재(理財)에 밝았던 임선이는 최태민 사후 박근혜와 최태민이 형성한 재산의 관리 및 세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조용래, 2017, 26-33쪽 참고).
최태민은 1955년 임선이와 재결합하지만 그는 혼란스러운 삶을 이어간다. 중앙정보부의 보고서 「최태민 관련 자료」(1979. 10. 23, 2-3쪽 참고) 등에 따르면 최태민은 1955년 경남 양산군 개운중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지만 2년 만에 그만뒀다. 그는 1956년 12월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 1957년 2월 국민회 경남도본부 사업부장, 1959년 6월 전국 불교청년회 부회장, 1960년 5월 임의단체인 한국복지사회건설회 회장 등을 차례로 맡았다. 최태민은 1963년 5월에는 공화당 중앙위원, 1965년 1월에는 천일창고 회사의 회장이 됐다. 하지만 천일창고 회장에 취임한 지 1개월만인 그해 2월 서울중앙지검에서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입건되면서 약 4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최태민의 직업이 일본 순사→해방 후 경찰→스님→교주 등 혼란스럽게 바뀌는 것에 대해 신분 세탁으로 해석되기도 했다(전여옥, 2016, 103쪽 참고).
최태민의 월남 후 행적과 관련, 최순실은 1994년 인터뷰에서 최태민이 월남 후 부산에서 건국의숙(후에 동아대로 흡수됨)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적성에 맞지 않아 주로 사업을 했다고 주장했다(국견, 1994. 8, 204쪽 참고).
비선권력기록팀=김용출·이천종·조병욱·박영준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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