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할매 떠나신 화창한 봄날

입력 2017. 4. 1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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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일본군 위안부 이순덕 할머니의 “참혹했던 50년, 행복했던 50년”

마지막으로 ‘우리집’을 찾은 고 이순덕 할머니의 영정을 보고 김복동 할머니가 울고 있다(위). 이순덕 할머니의 딸과 손녀(아래). 박승화 기자

“신발도 주고 기모노도 주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데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밭두렁에서 찬거리가 될까, 쑥 캐고 있는데 태어나 처음 본 남자가 그랬다. 타지로 돈 벌러 간 부모님, 밥 굶는 남동생이 눈에 밟히던 차에 따라나서기로 했다.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가겠다”고 하자 남자가 야멸차게 거절했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하룻밤은 전북 이리(현재 익산으로 통합) 읍내 여관에서 묵었다. 또래 15명 정도와 함께였다. 제일 어린 동생은 열다섯. 열여덟인 내가 제일 언니였다. 다음날 일본군 3명의 손에 붙들려 열차를 탔다. 중국 상하이로 간다고 했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 이름은 이순덕. 1918년 전북 김제 출생. 1남1녀 중 장녀.

위안부 생활이 어땠느냐고. 상하이 시절인지 만주 시절인지 모르겠지만, 일본군 군홧발에 맞아 눈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매질은 매일이었다. 그때 뒤틀린 엉치뼈는 평생 아팠다. 시간은 머리, 가슴, 둔부의 상흔으로 흘렀다. 오두막에서 오가지도 못한 채 일본군만 받았다. 내 오두막에 그놈들이 많이 오는 날이 일본군의 쉬는 날인가 했다. 한 일본군 장교는 딴 남자랑 잤다고 칼을 내리쳤다. 뜯어먹어도 시원찮을 징그러운 놈. 몸과 영혼이 완전히 갉아 먹힌 시간, 7년이다.

인정하라! 사죄하라! 보상하라!

어느 날 조선인들이 오두막으로 몰려왔다. “해방이 됐으니 가자”고 했다. 한순간에 일본군이 사라졌다. 몽롱한 정신으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끌고 지붕이 없는 화차에 올랐다. 몇 날 며칠이 걸려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불렀다. 없었다. 행방불명된 나를 찾다가 그만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딜 다녀왔느냐 묻는 동생과 동네 사람들에게는 “식모살이를 하고 왔다”고만 했다. 어머니 산소 앞에서 까무러치게 울었다. 얼마 뒤 남동생마저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끝내 과거를 말하지 못한 채 나는 살았다. 내가 당한 일이 ‘범죄’라는 걸 알게 된 건 1992년, 일흔다섯 때였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 유족회’의 도움이 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7명과 함께 일본 정부에 소송을 냈다. 증인심문을 받는다고 몇 번 일본을 다녔다. 한 일본 기자가 묻더라. “돈을 받으면 되겠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내가 거지인 줄 아느냐, 여기저기서 돈을 모아서 주게.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사죄해야지.”

싸움은 질겼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나를 ‘동백꽃 할매’라고 불렀다. 추운 겨울에도 지지 않는 꽃. 1993년 우리가 소송을 제기한 이후 고노 요헤이라는 일본 장관이 위안부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이 개입했다는 점과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사과했다(고노 담화, 1993년 8월). 공식적인, 첫 사과였다. 1심 판결은 1998년 4월에 나왔다.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는 “위안부 제도는 나치의 만행에 준하는 중대한 인권 침해다”며 나를 포함한 원고 3명에게 각각 30만엔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때 <한겨레신문> 1면에 내 사진이 나왔다.

그 뒤 나는 어디든 다녔다. 수요시위, 인권캠프에 가서 “인정하라, 사죄하라, 보상하라”고 외쳤다. 그 사이 나의 판결은 뒤집혔다.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나의 승소를 최종 ‘기각’했다. 그리고 총리가 된 아베 신조는 지금까지 “조사 결과 발견된 자료 가운데선 군과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것과 같은 기술이 발견되지 않았다”(2007년 3월)고 말했다. 내 나이 아흔 살에 도로 그 자리가 됐다. 포기했느냐고, 아니 나는 지지 않는 ‘동백꽃 할매’다. 그해 7월 말 미 하원이 일본 총리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했다. 우리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덕이라고들 했다. 사람들이 내게도 “축하한다” 인사를 건넸다. 그날도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나는 활짝 웃었다.

“순덕 할매, 안 아픈 세상 갔어요”

그래도 2015년 12월28일에는 참 슬펐다. 왜 이 나라가 자국민에 대한 피해 구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포기하는지 화가 났다. 김복동(91) 할매는 “열심히 싸워서, 아베의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 무렵, 나는 아파서 요양소에 갔다. 그 전까지는 김복동, 길원옥(89) 할매와 함께 살았다. 위안부 할머니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서 손영미 소장과 우리 셋이 마지막까지 살았다. 처음엔 여럿이 함께였는데, 황순희, 손판임, 김요지, 박우득, 이옥금 할매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나까지 떠나왔으니 살아 있는 위안부 할매는 38명뿐이다.

입관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우리집’에 들렀을 때, 길원옥 할매는 이제 막 깨어나 정신이 없었는지 내 사진을 보고 “언제 왔느냐”며 “왜 새벽부터 돌아댕기냐”고 물었다. 사진 속 나는 반가웠는데, 사람들이 꺼이꺼이 울더라. 김복동 할매는 “저승에 가거든 할매들 만나 잘 살고 계쇼. 아베가 협조 잘하게 좀 도와주고. 이 김복동이가 살았을 동안에 열심히 열심히 싸워서 항복을 받고 곧 따라갈게요. 잘 살길 바라요. 잘 가요” 인사를 했다. 우리 셋은 언제나처럼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옆에는 늘 그렇듯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가 앉아 복동 할매를 나무랐다. “할매, 가긴 어딜 따라가요. 순덕 할매는 안 아픈 세상으로 간 건데요.” “그래, 좋다. 안 아픈 세상으로 가니 좋다. 내 뒤따라갈게. 싸워서 아베한테 항복받고. 거기 다 모여 있으라. 그냥 있지 말고. 여튼 고상(생) 많이 했다.”

내 살아 소원이 “내가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밥 배부르게 먹고 가는 것”이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학생 40여 명이 따랐다. 수요집회를 취재한 뒤 손자처럼 살가웠던 ‘미디어몽구’(http://mongu.net)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내 마지막 가는 길을 올려준 덕이 컸다.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날 보겠다고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4호실 앞에 줄 선 사람들을 보니 뭉클했다. 나 가는 길 마지막으로 불러줬던 노랫말처럼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이 없도다/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봄날 되도다”. 나 이제 간다. “살아 50년은 참혹했지만, 50년은 너무 행복했다.”

*이순덕 할머니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참고 문헌 <이순덕 약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원혼>, 이국언 지음, 시민의소리 펴냄, 2007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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