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토끼 '베니' 열 살.. 화살 대신 맞아주신 엄마 덕이죠"

김윤덕 기자 2017. 4. 1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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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듣는 어려움 이긴 '구작가'
일러스트 120점 모아 전시회

"베니가 열 살 된 소감요? 음… 말로 표현하기 너무 힘들어요. 내게 아무것도 없을 때 베니를 그렸거든요. 베니와 함께 기쁜 일, 슬픈 일을 모두 겪었어요. 듣지도, 잘 보지도 못하는 내가 베니와 함께 여기까지 왔다는 게 대견하고 신기해요."

서른네 살 '구작가'(본명 구경선)가 베니 이야기를 하다 목이 메었다. "나 대신 세상 이야기 들어달라"는 소망으로 두 귀를 크게 그린 토끼 베니와 함께 상처받고 좌절한 사람들 가슴에 모닥불 같은 위로를 지펴온 지 올해로 꼭 10년. 베니를 그린 120여 점 일러스트를 모아 서울 롯데갤러리 잠실점에서 이달 30일까지 전시를 연다.

온통 분홍색 벽면의 첫 주제는 베니의 탄생이다. 두 살에 열병으로 소리를 잃고 말할 수 없게 된 경선이 싸이월드 배경화면 작가가 되어 베니라는 캐릭터를 처음 만들었던 초창기 이야기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벌러덩 누운 베니가 "다 귀찮아!" 하며 푸념하는 '귀찮은 토끼'. 한 달에 100만원 벌 수 있다기에 도전했는데 수입이 20만원도 채 안 되자 실망한 경선씨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그린 그림인데, 무려 16만 명이 다운받았다. 피겨 스타 김연아도 홈페이지에 이 그림을 걸고 훈련에 지친 심정을 전해 구작가는 단숨에 스타가 됐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엄마 토끼'다. 경선씨의 오늘이 있기까지 밀어주고 이끌어준 엄마 유미순(62)씨 이야기. "고집불통 딸에게 매일 새 단어를 수백 번씩 반복해 가르쳐주신 덕분에 지금 어눌하게라도 말할 수 있어요. 보험설계사로 일하시며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도 보내주셨는데 외돌토리 학교생활이 싫어 자퇴했더니 엄마가 많이 슬퍼하셨지요."

'엄마는 방패'라는 그림 앞에선 눈시울이 화끈해진다. "내가 맞을 화살의 대부분을 엄마가 대신 맞아주셔서 내가 덜 아팠다는 걸 철들고서야 알았거든요." 강철보다 씩씩한 엄마도 4년 전 딸의 망막색소변성증 판정엔 무너져내렸다. 지금은 구멍으로 보듯 시야가 반경 10㎝이지만, 5㎝로 좁아지다 아예 캄캄해질 수 있다고 했다. 베니 10주년을 맞아 구작가가 펴낸 '엄마, 오늘도 사랑해'에는 "그때가 오면 너를 데리고 하늘나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엄마의 탄식이 나온다.

"다시 태어나면 엄마의 엄마가 되고 싶다"는 경선씨는 "돌아보니 내게 장애는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장애가 없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아이, 타인의 아픔엔 관심 없는 사람이 됐을 거예요. 또 시력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직 보인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몰랐을 테지요. 무엇보다 나의 베니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거고요."

경선씨는 틈틈이 아프리카와 동남아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다닌다. 남아공을 시작으로 베트남, 우간다 등 5개국에 다녀왔다. "사진가가 꿈인 필리핀 남자아이가 내가 그려준 '사진 찍는 베니' 그림을 끌어안고 행복해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어요. 누군가에게 소망을 안겨줄 수 있다면 눈앞 한 줌의 빛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그림을 그리려고요. 소리와 빛은 잃었지만 내겐 따뜻한 손이 있으니까요."(02)411-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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