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80세 딸이 100세 엄마 부양하라고?

정종훈 2017. 4. 1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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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보제, 과도한 부양의무 논란
평균수명 늘면서 '자녀 노인'도 늘어
자신도 부양 받아야 할 노인한테
100세 부모 부양 의무 부과는 과해
장애인 딸 둔 노인도 지원 탈락 '한숨'
노-노,장애인-노인 가구부터 면제해야
생계를 위해 차가 달리는 도로변에서 폐지를 줍고 있는 한 노인의 모습. 전문가들은 노인이 노인을 부양하는 가구, 장애인을 부양하는 가구부터라도 부양의무제를 면제해줘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중앙포토]
올해 100세가 된 임판례 할머니는 전북 전주의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지근거리에서 어머니를 챙기던 첫째 딸 장은순(80)씨가 지난해 8월 암 진단을 받으면서 거처를 집에서 요양원으로 옮겼다. 생활비는 매달 자녀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주는 20만원이 전부다. 슬하의 자녀는 아들 넷·딸 셋. 대부분 노년기인 이들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다. 그나마 일곱 남매 중 세 명만 어머니의 요양원 비용(월 50만~60만원)을 나눠서 내고 있다.

하지만 임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이 아니다. 현행법상 부양의무자인 자녀들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첫째 아들 장은기(82)씨는 "100세 노모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사실 수 있겠나"라며 "차라리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나라에서 지원해주는데 자식 있다고 지원을 아예 못 받는 건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평균수명이 증가하면서 90세 전후의 노부모를 모시는 '자녀 노인'도 증가한다. 자녀 노인 자신도 부양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노부모 부양 의무를 지우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제도이다.

서울 영등포구의 정종훈(66)씨는 뇌성마비 1급인 딸 정수연(38)씨와 함께 산다. 정수연씨는 손발을 못 움직이고 목도 제대로 못 가눠 전동 휠체어조차 쓸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다. 가족 중 한 명은 곁을 지켜야 하고 매달 약값과 물리 치료비 명목으로 들어가는 돈만 150만원이다. 그 때문에 정종훈씨는 딸이 다니는 장애인 학교에서 운전기사와 청소를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다. 부인도 식당에서 시간제로 일하며 생활비를 보탠다.

하지만 정수연씨가 사회에서 받는 혜택은 장애인연금 22만원뿐이다. 기초생활수급 신청은 부양의무자인 부모가 건강하다는 이유로 꿈도 꾸지 못한다. 정종훈씨는 "예전에는 어떻게든 벌어서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걱정이 앞선다. 부모가 평생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 남겨지면 어떻게 살게 될 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챙겨줄 가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가 버려두고 있는 것"이라며 "사회에서도 책임을 나눠서 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노 부양 가정, 장애인 부양 가정은 일반적인 가정에 비해 생계 유지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때문에 시민단체와 장애인단체를 중심으로 부양의무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앙포토]
이처럼 노노(老老) 부양 가정, 장애인 부양 가정은 부양 의무의 덫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 장애인단체를 중심으로 부양의무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진다. 큰 딸(24)·작은 딸(19)과 함께 사는 엄마 이형숙(51)씨는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다. 일을 할 수가 없어 기초생활 수급을 받았지만 부양의무제 때문에 탈락했다. 큰 딸이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면서 법적인 부양의무자가 됐기 때문이다.
부양의무제 폐지 운동을 주도하는 이씨는 "유일한 소득인 큰 딸 월급으로는 세 가족을 책임지기 턱없이 부족하다. 차라리 큰 딸이 취업하지 못 했을 때가 상황이 더 나았다.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양의무자 기준은 특정 계층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해당되는 제도다. 복지 예산을 확대하면 부양의무제 폐지에 따른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9월 한 장애인 단체 관계자가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장애인 관련 예산 확충 등을 요구하며 시위하다 휠체어에서 떨어진 모습. [중앙포토]
대선 후보들도 대부분 부양의무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다. 유승민(바른정당) 후보는 지난 2월 기자회견을 갖고 "부양의무자 기준 탓에 소득과 재산이 최저생계비 이하임에도 기초생활보장의 혜택을 못 받는 국민이 대략 100만명 정도"라며 방아쇠를 당겼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부양의무제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재인(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단계적 폐지를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22일 열린 토론회에서 "복지가 국민의 존엄성을 지키는 출발이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개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저의 대표적 공약"이라며 부양의무제 폐지 의사를 밝혔다. 안철수(국민의당) 후보도 단계적 폐지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실질적 부양 능력을 감안해 제도를 보완하고 취약계층이나 주거급여부터 차차 폐지해나간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구체적 재원 마련 방안은 '오리무중'이다. 유승민 후보는 부양의무제 폐지에 따른 소요 예산을 연 8조~10조원으로 예상하면서도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이 정도 예산은 국가가 마련해야 한다"고만 주장했다. 다른 후보들도 예산을 마련할 청사진이 보이지 않는다. 오건호 '내가 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공약은 나와 있지만 재원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시민단체의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주장 기자회견. 시민단체와 장애인단체를 중심으로 부양의무제를 폐지해야 한다는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 참여연대]
전문가들 사이에선 사회적 파장, 재원 문제 등을 고려해 제도를 완전히 없애기보다 보완·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비수급 빈곤층 중에서 더 급한 가정부터 책임을 면제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적용 대상이 제한적이라 소요 예산도 '완전 폐지'(연 9조~10조원 추정)와 비교해 적은 편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기초수급자와 부양의무자가 ^노인-노인이거나 ^노인-장애인 ^장애인-노인 ^장애인-장애인인 가구에 한해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면 연 1750억원(지방예산 포함)이 들어간다. 중증 장애인(1,2급 장애인과 3급 중복장애인)이 있는 모든 가구로 범위를 넓히면 1조4300억원(지방예산 포함)이 필요하다.
오건호 위원장은 "이제는 부양의무제를 손 볼 때가 됐다"면서 "완전히 폐지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사회적 논란이 클 수 있다면 힘든 가구부터 폐지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대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장애인은 빈곤층 비율이 높고 가족들에게도 상당히 큰 부담이 된다. 장애인 등 특수한 어려움에 처한 계층부터 부양의무제 폐지의 첫 삽을 떠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의 고시원에 사는 저소득 노인이 고시원 복도를 걷고 있다. 전문가 사이에선 부양의무제를 보완ㆍ개선해 기본적인 생활도 보장받지 못 하는 소외계층을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사진 서울시]
부양의무제가 적용되는 소득·재산 기준도 단계적으로 낮추자는 주장이 나온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부양의무제를 유지하는 대신 재산·소득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가 1명이고 자녀가 4인가구일 경우 자녀가구의 월 소득이 513만원(중위소득) 넘으면 부모가 기초수급자가 될 수 없다. 양 교수는 "현재는 기초생보제의 4가지 수당 중 교육급여 수급자만 부양의무자를 적용하지 않는데 단계적으로 주거·의료급여 수급자까지 제외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국회입법조사처의 최병근 입법조사관도 지난 5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기초생활 수급 기준에 따라 주거급여-의료급여-생계급여 순으로 부양의무제를 순차적으로 폐지하면 국가 재정 부담을 완화하고 부정수급 등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정종훈ㆍ백수진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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