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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다른 삶]낯선 사람이 넘어져도..손 내밀 수 있는그런 인생이었으면

입력 2017.04.07. 21:0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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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선현경의 ‘잠시멈춤’

일러스트 | 이우일

포틀랜드는 작은 도시다. 얼마나 작은가 하면 한국영사관이 없을 정도로 작다. 만약 한국 관련 서류를 처리하거나 영사를 꼭 만나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영사가 이곳에 들르는 날을 기다려야만 한다. 영사는 워싱턴주 시애틀에 있는데 세 달에 한 번씩 오리건 한인센터(포틀랜드에서 조금 떨어진 비버튼에 있다)로 와서 이틀 동안 업무를 보고 떠난다. 첫째 날은 오후 업무를, 두 번째 날에는 오전 업무를 본다. 시간을 아껴 빨리 왔다 가시려는 의지가 보여 좀 그렇긴 하지만, 그나마도 안 오면 필요한 사람이 가야 하니까 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꼭 영사의 공증이 필요한 서류가 있어서 영사님이 오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무슨 서부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위해 몇 달에 한 번씩 들르는 판사를 손꼽아 기다리는 개척시대의 시민이 된 기분이었다.

한번은 깜빡하고 기회를 놓쳐 우편으로 업무를 본 적도 있는데, 정말 번거로웠다. 만나서 처리했더라면 여권만 보여주고 끝나는 내 신원을 우체국에서 돈까지 내면서 공증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우편으로는 현금을 보낼 수 없어 서류를 만드는 데 드는 수수료를 수표로 만들어 넣어야 했다. 수수료는 고작 2달러인데 수표로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5달러라니 속이 쓰렸다.

급한 서류가 필요해 시애틀까지 달려간 적도 있다. 이곳에 살면서 뭐 그리 급한 서류를 필요로 할 일이 있겠냐고 생각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일은 꼭 생긴다. 딸의 여권이 어느 날 사라진 것이다. 그때는 연말이었고 딸은 원하던 대학에 지원해야 할 시기였다. 영사님은 두 달 뒤에나 올 예정이라니 급한 사람이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덕분에 딸과 함께 당일치기로 고속버스를 타고 시애틀에 다녀왔다. 사람들은 시애틀이 여기서 차로 3시간 정도 걸린다며 옆 동네라고들 말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이삿짐이 시애틀에서 왔는데 그 짐을 들고 오신 분들도 그렇게 말했다. 차가 막혀도 3시간 반이면 오니 진짜 가깝다고. 그땐 미국 사람들, 뻥이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3시간이 가깝다니. 내게 3시간이면 서울에서 KTX로 부산까지 갈 수 있는 멀고도 먼 거리였다. 그런데 그 3시간을 서류 하나를 위해 동사무소 가는 가벼운 기분으로 쓰고 나니 그동안 내가 가졌던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너졌다. 시애틀은 포틀랜드 옆 동네가 맞다. 가깝다. 미국에서 3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으면 다 가까운 거리다. 땅이 넓어서 필요한 게 정말 띄엄띄엄 있는 미국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포틀랜드가 조금 외지고 작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이곳은 명성(?)에 비해 동양 사람이 조금 너무하다 싶게 없다. ‘힙’한 도시하면 늘 거론되는 도시가 포틀랜드다. 슬로 라이프, 킨포크를 알린 도시이기도 하다. 커피와 맥주가 흐르는 땅이라는 소개 글도 여러 잡지에서 읽었다. 그동안 다녀온 도시들을 보면 조금이라도 알려진 곳에는 언제나 무리 지은 아시아 관광객들이 있었다. 잠깐 다녀온 옆 동네 시애틀만 해도 거리에서 한국말이 들릴 정도였다. 어디에서나 다양한 동양인들의 무리가 여행하고 있는 광경은 이젠 그 지역의 풍경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곳은 예외다. 동양인 관광객이 이렇게나 안 보이는 도시는 근 십여 년 만에 처음이다. 차이나타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구시가지 한복판에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거대한 중국식 문이 세워져 있고 중국식 정원도 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별로 없다. 차이나타운 안에 중국 음식점마저 손꼽을 정도로 적다. 중국 슈퍼도 없다. 이곳 오리건주 포틀랜드는 확실히 백인들의 도시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고 난 뒤부터는 조금 위축되는 게 사실이다. 트럼프가 취임 후 무슬림 7개국의 입국을 금지했을 땐 너무 난감해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 금지령이 내려지자마자 대처 요령과 긴급 전화번호를 돌리기 시작했다. 시내에서는 여전히 트럼프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곳이다. 자주 가는 레코드 가게에서는 ‘트럼프는 돼지’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한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켜보는 중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3분의 1은 된다. 트럼프 당선 당시 우리가 자주 가던 베트남 식당에 수상한 백인 아저씨가 들어왔었다. 방금 일어난 듯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엇갈리게 단추를 여민 셔츠, 가슴팍엔 케첩 종류의 뻘건 소스를 잔뜩 흘린 걸로 봐서 살짝 정신이 이상해 보였다. 그 남자는 들어올 때부터 나를 쏘아보더니 카운터로 걸어갔다. 직원은 뭘 주문할 건지 물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곧 자신이 트럼프 지지자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서 들어왔다는 한마디를 건네더니 주위를 찬찬히 훑고 나갔다. 식당 직원과 난 서로 눈을 맞추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긴 했지만 무서웠다. 어두워지면 괜히 길을 다니기가 싫고 남들의 시선이 전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사실이다.

예전에 서울에서 이사할 때였다. 새벽부터 이삿짐센터 직원 다섯 명이 와서 짐을 싸는데 험한 소리가 들렸다. “야! 빨리빨리 못해? 야! 야! 이 X놈아! 그걸 그렇게 바보같이 하면 어떡해!”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인상 쓰던 대장 아저씨가 짐을 나르고 있는 직원 한명에게 소리를 질렀다. 욕을 듣고 있는 그 사내는 잘생겼지만 어딘지 좀 우울해 보이는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그는 아무 대꾸 없이 그 욕을 그저 듣기만 하며 묵묵히 짐을 나르고 있었다. 센터 직원들은 모두 비슷한 나잇대의 사람들이었는데 대장은 유독 그 잘생겼지만 연민을 자극하는 한 아저씨만을 거칠게 몰아세웠다.

듣다 못한 나는 이런 식으로 시끄럽게는 이사 못하겠다고 항의를 했다. 그랬더니 대장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이며 동남아시아 노동자라서 어쩔 수 없다며 미소를 지었다. 우락부락한 대장 아저씨도 미소를 지어 보이니 조금 순진해 보여 깜짝 놀랐다. 어쩐지 욕을 먹던 그 사내의 생김새가 좀 다르긴 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우뚝 솟은 날카로운 코. 이국적인 얼굴이었다. 대장은 당당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절대 말을 듣지 않는 종족이라며, 이렇게 해야 이사를 오늘 안에 마무리할 수 있다며 윙크까지 날렸다. 나는 오늘 안에 이사 못해도 되니 이런 식으로는 못하겠다고 대항했다. 다행히 내가 잔금을 치러줘야 하는 ‘갑’의 입장이어서 우리의 논쟁은 내가 원하는 쪽으로 원활하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이사도 무사히(거의 밤이 되어서야 간신히) 끝내고 사이좋게 헤어질 수 있었다. 문제는 사이좋게 헤어졌다는 거다. 나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그 대장 아저씨는 아마도 다시 똑같이 막말을 하며 그 동남아 출신의 노동자를 부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내 앞에서 안 하니 눈감고 입 닫았다. 모르는 척 피했다. 그때 그날을 생각하면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나는 오로지 내 입장만을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섞여 살고 있는 이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도 겉모습으로만 취급받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생김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척 보면 구분이 간다. 난 동양인이고, 쟤는 아랍인이며, 저 사람은 백인이고, 이 사람은 흑인이다. 생김새는 바꿀 수가 없다.

며칠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젊은 아랍인 남자 둘과 함께 탄 적이 있었다. 둘은 조금 심각하게 아랍어로 이야기하며 내게 눈길도 한번 안 주었다. 하지만 좀 늦은 저녁이었고, 그들의 생김새가 조금 험악하게 보였으며, 자기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점 때문에 혼자 있던 난 한기를 느꼈다. 그리고 괜히 빨리 내리고 싶어 하는 나를 보았다.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자책이 들었다. 그들이 하던 행동들은 나도 자주 해 오던 일상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우리끼리 한국말로 떠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신이 나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더러운 똥 이야기도 맘껏 하고 상대방의 패션을 품평한 적도 있다. 나도 이곳에선 약자다. 생김새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며 다른 언어를 쓰는, 작고 볼품없는 동양인이다. 그랬던 내가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어 무서웠다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식이다. 그럼 누군가는 이곳에서 한국어로 떠드는 나를 보고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르게 생겨서 누군가의 기분을 망치게 된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나와 생긴 것이 다르고 하는 말이 다르다고 해서 거리낌 없이 짱게 깜씨 연탄 쪽발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여행을 권해주고 싶다. 여행이야말로 안전하게 약자가 되어볼 수 있는 최고의 시뮬레이션 게임이니까.’

탁재형의 수필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의 한 구절이다. 우린 여기서 장기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이 게임이라면 ‘동물의 숲’ 정도의 게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고 친절한 도시다. 숲속 친구들 같은 이곳 사람들 덕에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모두 다 같은 게임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잘 닦아 놓은 깨끗하고 반듯한 길을 걷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험한 숲길을 걷기도 하고, 전혀 없던 길을 만들며 걷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지나갔던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다. 각자 주어진 길을 걷는 게 인생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걸어야겠지만, 그렇게 정신만 차리면 뭔 재미가 있겠는가. 넘어지진 않겠지만 나무에 난 새싹도, 부러진 가지도 볼 수 없다. 나는 늘 딴짓을 하며 걷다가 자주 넘어지는 사람이라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다. 하지만 괜찮은지 물어봐주는 주변 사람들 덕에 웃으며 걸어 왔다. 대신 화내주는 사람들 덕에 잘 걸어가는 중이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끼리 걸어가며 챙겨주는 인생이면 참 좋겠다. 낯선 사람이 넘어져도 손 내밀 수 있는 그런 인생이면 더 좋겠다.

▶이우일·선현경 부부는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다. 이우일은 <콜렉터> <좋은 여행> <굿바이 알라딘> 등을 쓰고 그렸으며 <노빈손 시리즈>와 <용선생 한국사>의 그림 작가다. 선현경은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 <가족 관찰기>를 쓰고 그렸으며 <이모의 결혼식> <엄마의 여행가방> 등 동화를 냈다. 지금은 미국 포틀랜드에서 딸, 고양이와 함께 쓰고 그리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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