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천황과 탄핵
[경향신문]
1988년 9월19일 일본 천황(국내 신문에서는 일왕으로 표기하지만 여기서는 천황이라고 쓴다) 히로히토(裕仁)가 병석에 눕고 이듬해 1월7일 사망하기까지 벌어진 일에, 세계도 놀랐고, 일본인도 놀랐다. 2차 대전의 패전으로 일본 사회의 전면에서 사라진 듯 보였던 천황의 죽음에 일본인들이 돌연 ‘1억 총자숙(總自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신문 1면에는 마치 날씨 예보처럼 천황의 맥박, 체온수치가 매일 실렸고, 방송국은 쇼, 예능프로는 물론 CF마저도 중단했다. 거리의 네온사인도 꺼졌다. 심지어 우리의 노량진시장에 해당하는 쓰키지 수산시장의 상인은 텔레비전에 나와 장사를 자제하고 있다며, 왜 그러냐는 질문엔 ‘글쎄요…’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음~ 일본인이니까요”라고 답하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본에서 천황은 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거리의 돌멩이 사이에도, 사람들의 숨결 속에도 살아 있다고 했던 한 일본 지식인의 말이 실감나던 기간이었다.
천황가문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7세기 초부터는 가계(家系)가 확실히 추적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 중 하나일 것이다. 게다가 1500년 동안 왕좌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생각해보라, 신라 김씨 왕조가 지금까지 한국의 왕이라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정치격변이 있었을 텐데, 왕조가 한 번도 교체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희한한 일이다. 정치를 잘못해서 천명이 떠나면 그 왕조는 교체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정치사상(易姓革命)이 통하지 않는 게 자랑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도쿠가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은 이걸 일본의 훌륭한 전통으로 자랑했다. 중국은 군주가 현명하지 않다고, 무능력하다고 감히 쫓아내는 나쁜 관습이 있는 데 비해, 일본은 어디까지나 혈통을 중시한다고. 군주는 혈통이 중요한 것이지, 능력은 그다음 문제라고.
하긴 천황은 성(姓)이 없으니 성을 바꿀(易姓) 수도 없다. 쇼와(昭和) 천황 이름은 히로히토이고, 지금의 헤이세이(平成) 천황은 아키히토(明仁)이지만, 이들에게 성은 없다. 당연히 천황과 그 친족들은 민법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호적도 없다. “천황도 해외에 나가던데 패스포트는 있나?”라고 일본 친구에게 물으니, “음…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네”란다. 조사해보니 1971년 히로히토가 전후 최초로 구미를 방문할 때 일본 정부 내에서 논란이 됐다. 결론은 ‘천황폐하께서 외무성이 발급하는 패스포트를 휴대하고 출입국 수속을 거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였다.
천황은 역사상 오랫동안 권력은 없고 권위만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 천황에게 권력을 갖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근대천황제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는 단호히 거부했다. 권력에는 성패가 있어 천황이 권력을 행사하는 순간 그 권위는 상처 입을 것이라고. 권력과 권위의 분리다.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었더라면, 히로히토는 아마도 패전 후 맥아더의 처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1억 총자숙’ 무드는 권력은 없지만 구름 위의 신성한 권위는 패전 후에도 건재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일본 여행 때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일본 전체가 천황 권위의 그물망에 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네 구석구석에 있는 신사들은 크건 작건 거의 천황가와의 연관을 강조하고 있고, 각종 역사유적들의 안내문 역시 종착역은 천황이다. 관광지를 옮겨 다닐 때마다 ‘메이지 천황이 쉬시던 곳’ ‘쇼와 천황이 들르신 곳’을 표시하는 비석들이 즐비하다. 천황의 가족, 친족들이 왔다 갔음을 알리는 비는 더 많다. 도쿄를 대표하는 우에노 공원에는 아직도 ‘은사공원(恩賜公園·천황께서 하사하신 공원)’이라는 표지가 서 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는 아래로 분양(?)되어 사회 각계의 소권위를 만든다. 권력자도 권위자는 함부로 할 수 없다. 언뜻 보면 점잖은 사회이지만, 살다 보면 숨이 막힌다. 아무도 그 권위를 전복할 수 없으니…. 그것도 1500년 동안(!).
한국에서는 얼마 전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었다. 그와 함께 대통령직, 혹은 국가원수의 권위도 또 한 번 큰 상처를 입었다. 권력과 분리된 권위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권위는 늘 권력의 성패에 의지하게 된다. 국민 대다수가 심복하는 사회적 권위가 쉽사리 형성되지 않는 이유다. 모든 것이 중앙으로 휘몰아쳐 올라가는 사회에서 최고 권력은 제왕적인 힘을 갖지만, 그만큼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
중앙권력을 향한 풍압(風壓)은 가히 초대형 태풍급이다. 그 풍압은 무한한 권력을 주기도 하지만, 한순간에 제왕적 대통령을 날려버리기도 한다. 권위도 산산조각 낸다. 이런 사회에선 안정된 권력도 고색창연한 권위도 존재하기 어렵다. 일본의 권력자가 구름 위에 있다면, 한국 권력자는 칼날 위에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존재다. 이 풍압을 능란하게 다뤄 거대한 발전의 에너지로 전환시킬 인물을, 우리는 지금 찾고 있다.
<박훈 서울대교수 동아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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