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발단부터 결과까지 "당시 학살 사망자만 14,043명..피해자 3만명"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이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 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광복 이후 남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5.10 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남로당·제주도당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를 급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 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 따르면, 당시는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던 분위기였습니다.
또한 콜레라와 대흉년 등 악재가 겹친 상황이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광복 이후 남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5.10 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남로당·제주도당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를 급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여기에 제주도민들의 당시 반감, 공포가 부딪혀 양 측의 대립이 시작됐습니다.
이 다툼은 한국 전쟁 내내 계속됐으며, 당시 사망자만 14,043명에 달합니다.
사건의 주역 이덕구는 경찰관의 발포로 사살되고, 김달삼은 그 해 제주도를 벗어났습니다.
가장 문제가 됐던 점은 학살이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점입니다.
결국 총 학살 피해자는 당시 2만 5천~3만명의 규모입니다.
- ▷▷ MBN 뉴스 더보기
- ▶ [다시보기] 아쉽게 놓진 MBN 프로그램도 원클릭으로 쉽게!
- ▶ [건강레시피] 밥상을 바꾸면 건강이 달라집니다! 건강밥상 레시피 지금 확인하세요!
< Copyright ⓒ MBN(www.mbn.co.kr)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MB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