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축구의 뿌리, 체사레 말디니

봉예근 2017. 4. 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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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봉예근 기자]

  파올로 말디니의 아버지 '체사레 말디니'
ⓒ 위키피디아
2016년 4월 3일. 정확히 1년 전 이탈리아 AC 밀란의 전설 같은 인물이 눈을 감았다. 그의 이름은 바로 '체사레 말디니'이다.

파올로 말디니의 아버지로 더 유명한 체사레는 AC 밀란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를 대표하는 선수이자 감독이었다. 선수 시절에는 AC 밀란의 첫번 째 중흥기의 일원으로 AC 밀란를 강팀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고, 감독으로서는 이탈리아의 젊은 재능들을 발굴해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을 진두지휘했다.

AC 밀란의 뿌리

1899년 창단한 AC 밀란은 창단 초창기 세 번의 리그 우승을 거머쥐며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이후 40년간 유벤투스·토리노 등의 클럽에게 밀려 한동안 정상에 자리에서 내려와 있었다. 부진을 면치 못하던 AC 밀란은 1950년대부터 반격을 시작한다. 군나르 노르달을 필두로 한 스웨덴 삼총사의 힘으로 1951년에 40년 넘게 기다려오던 리그 우승의 기쁨을 맛본다. 그리고 그 당시 22세의 어린 나이로 트리에스티나 칼초에서 주장을 역임하던 체사레 말디니가 1954년 밀란으로 합류하게 된다.

체사레는 밀란에 합류한 뒤 빠르게 팀에 적응했고 수비의 중심으로서 활약하게 된다. 여전히 팀의 에이스는 노르달이었지만 체사레는 중앙 수비수로 헌신하며 밀란의 성공을 뒷받침한다. 체사레는 밀란 입단 이후 6년 만의 세 개의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밀란의 핵심이던 외국인 선수들이 1960년대 들어서 모두 떠났지만 체사레가 버티는 밀란은 강했다. 1961년 밀란의 주장으로 선임된 체사레는 주장으로서 또 한번의 리그 우승을 일궈낸다. 리그에만 그치지 않았다. 1963년 밀란이 역사상 처음으로 유로피언컵(현 UEFA 챔피언스리그)을 쟁취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결승전 상대였던 벤피카에는 포르투칼의 전설적인 공격수인 에우제비오가 버티고 있었다. 비록 에우제비오에게 한 골을 내줬지만 체사레를 중심으로 한 밀란의 수비진은 더이상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고, 밀란은 2대1로 승리를 거둔다. 밀란의 역사의 첫 번째 황금 시기로 꼽히는 1950~60년대의 핵심 멤버이자 주장이었던 체사레는 밀란 역사의 근간을 만든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밀란에서의 성공 이후 토리노에서의 짧은 선수 생활을 보낸 후 체사레는 은퇴한다. 체사레가 밀란과 함께한 시간이 여기까지였다면 그는 추억 속에 인물 정도로 남았겠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의 아들이 모든 걸 바꿔놨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아들 파올로 말디니는 100년도 훌쩍 넘는 밀란의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선수다. 유소년 시절부터 밀란의 일원으로서 활약한 그는 AC 밀란 1군에서만 26년간 선수 생활을 이어간 밀란의 전설 중의 전설이다. 데뷔 시즌과 부상 기간을 제외하고는 밀란의 핵심 수비수로 활약한 그와 함께 밀란은 26개의 트로피를 쓸어 담는다. 체사레가 들어올린 6개 트로피까지 합치면 말디니 부자는 32번의 우승을 밀란에 가져왔다. 밀란이 우승한 횟수가 총 48번이기에 말다니 부자의 우승 커리어를 빼고 밀란의 역사를 얘기할 수는 없을 정도다.

파올로의 업적을 체사레가 대신 이뤄준 것은 아니지만 체사레가 아니였으면 그의 아들은 밀란의 선수가 아니였을지도 모른다는 게 중요하다. 파올로는 인터뷰를 통해 "축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유벤투스의 팬이었지만 아버지가 나를 밀란으로 인도했다"고 밝혀 본인이 '밀란 사나이'가 된 이유를 고백했다. 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감독 알렉스 퍼거슨 감독도 "파올로를 영입하려 체사레에게 문의했지만, 체사레는 미친 사람 보듯이 멍하니 나를 봤다"는 일화를 밝히며 체사레가 파올로의 지속적인 밀란 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임을 언급했다. AC 밀란 역사에 가장 뚜렷하게 새겨진 파올로 말디니의 근간에는 체사레 말디니가 있었다. 그는 밀란이란 거대한 나무에 뿌리와도 같았다.

2006 독일 월드컵 우승의 뿌리

체사레 말디니는 밀란의 감독으로서도 두 개의 우승컵을 클럽에게 선물하지만 그는 클럽보단 국가대표팀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둔다. 1980년 이탈리아 대표팀 수석코치 자리에 앉게 된 체사레는 당시 감독인 엔조 베아르조트와 함께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우승을 합작한다. 44년 만에 이탈리아가 세계 챔피언으로 복귀하는 데 일조한 체사레였다.

이탈리아의 세 번째 우승에 일조한 체사레는 1986년 이탈리아 청소년 대표팀 감독에 부임한다. 클럽에서 성인 선수들을 이끌 때와는 다르게 체사레는 이탈리아의 청소년을 이끌고 수차례 우승을 경험한다. 10년간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면서 세 차례의 UEFA 유럽 U-21 챔피언십 트로피를 따낸다. 1990년대부터 2000년 초반까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선수들은 모두 체사레의 지도를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체사레의 손을 거친 이탈리아 축구의 새싹들은 결국 2006 독일 월드컵 우승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1996년 유럽 U-21 챔피언십 우승의 주역들이 10년 뒤에는 세계 축구의 정상에 섰다.

1996년 U-21 대회에서 최고의 선수에 뽑힌 파비오 칸나바로는 물샐 틈 없는 수비로 '카테나치오'의 부활을 알렸다. 그 해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이 모두 칸나바로에게 돌아갔을 정도로 칸나바로가 월드컵에서 보여준 모습은 '수비수' 그 자체였다.

  부폰도 체사레의 지도를 받았다
ⓒ 위키피디아
칸나바로와 함께 이탈리아 수비의 중심으로 활약한 잔루이지 부폰도 체사레의 손을 거친 선수다. 월드컵에서 부폰은 7경기에 출장해 단 2실점만 허용했다. 부폰이 허용한 두 골 중 한 골은 동료의 자책골이었고, 다른 한 골은 패널티킥에서 비롯됐을 정도로 부폰이 지키는 골문에는 틈이 없었다.

공격에서는 '로마의 황제'라 불리는 프란체스코 토티가 체사레의 가르침을 받았다. 2006년 이전부터 이탈리아 대표팀의 에이스 자리에 위치해있던 토티는 독일 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정상적인 컨디션을 보여주지 못했다. 최고의 모습은 아니였지만 무려 4개의 어시스트를 대회 기간에 성공시키며 다소 답답한 공격에 윤활제 역할을 했다. 토티는 이탈리아가 의외로 고전했던 16강 호주와의 경기에서는 후반 추가시간에 패널티킥을 성공하기도 했다.

체사레의 지도를 거친 이 세 선수는 월드컵 우승은 물론 클럽에서도 맹활약하며 이탈리아 축구를 선도했다. 올해 만 40세인 토티와 만 39세인 부폰은 아직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이탈리아 축구 선수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부폰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면서 유벤투스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AC 밀란은 힘을 잃고 리그 중위권을 맴돌고 있지만 여전히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클럽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체사레를 거쳐간 선수들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일 년 전 떠난 이탈리아 축구의 별 체사레 말디니는 여전히 이탈리아 축구를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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