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그를 잊었나..세계가 다시 부르는 이름, '윤이상'

김수연 2017. 4. 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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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언제 오는지 며칠째 쌀쌀했던 서울. 남도의 항구도시엔 벚꽃이 조금 더 일찍 찾아왔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로 바다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곳, 남해의 아름다운 도시 경남 통영입니다.



통영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 예향으로도 꼽힙니다. 시인 김춘수와 유치환, 소설가 박경리, 화가 이중섭 등 대표적인 예술인들이 태어나 유년을 보내며 예술혼을 키워왔던 곳입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해마다 봄이 되면 통영이 다시 피워내는 인물이 있습니다. 통영 앞바다의 파도 소리, 항구의 뱃고동 소리, 뱃사람들의 노랫소리. 통영의 모든 소리가 음악적 탯줄이 됐던 작곡가.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입니다.

긴 겨울을 이겨내고, 새 생명을 맞이할 올봄,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통영은 어느 때보다 풍성하게 윤이상을 다시 불러냅니다.

현대 음악의 세계적 거장 윤이상

윤이상은 서양과 동양의 음악을 융합시킨 세계적 현대 음악가로 꼽힙니다. 특히 유럽 음악계는 그를 '서양 악기로 동아시아적 이미지를 연상시킨 최고의 작곡가'로 높이 평가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탄생 100주년 기념곡으로 그의 '교향곡 1번'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독일 공영방송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은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인' 가운데 그를 유일하게 20세기 최고의 음악가로 꼽았습니다. 2년 전, 유네스코는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 통영을 '창의 음악 도시'로 지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국내에서 아는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부끄럽지만 저조차도 취재를 하기 전까진 그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높게 평가받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국내 아티스트가 해외 유명 차트에 이름만 올려도, 국제무대에 데뷔만 해도 그들의 '국위선양'을 뿌듯해 하는 우리지만, 왜 우리만 윤이상이란 인물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을까요?

왜 우리는 그를 모르나…죽어서도 '블랙리스트'
최근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본 적이 있다면, 여기서 일 겁니다. 바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입니다.

윤이상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창립된 '윤이상 평화재단'은 최근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 있었습니다. 실제 윤이상 평화재단은 지난 2013년도를 마지막으로 지원이 끊겼죠.


매해 가을 통영에서 열리던 '윤이상 국제콩쿠르'는 지난해 말, 올해 받을 예산이 특별한 이유 없이 전액 삭감되면서 좌초 위기에 놓일 뻔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 산하 국제음악콩쿠르 세계연맹에 가입된 콩쿠르인데도 말입니다.

그의 음악은 국내에서 한동안 연주되는 일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어쩌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 걸까요?

1967년, 박정희 정부는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대규모 반정부 간첩단 사건이 일어났다고 발표합니다. 옛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윤이상은 이를 빌미로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해외 음악가들의 국제적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예술가 200여 명이 석방운동에 참여하는 등 나라 안팎의 저항이 거세자, 결국 정부는 2년 만에 윤이상을 독일로 돌려냅니다. 이후, 그는 언제나 고국에 돌아오길 갈망했지만, 끝내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일본 땅에서 타계했습니다.

지난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은 정부가 과대 포장한 사건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고국에서 블랙리스트. 50년 세월이 흐를 동안,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그를 지워 왔습니다.

첼로에서 가야금의 울림을… 음악으로 잊지 않은 고국

윤이상의 음악은 현대음악치고도 난해하기로 유명합니다. 연주자들조차, 곡을 표현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한국의 전통음악기법을 서양음악에 옮겨왔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윤이상 음악을 들으면, 서양악기로 국악을 연주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개막 무대에서 윤이상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한 첼리스트 니콜라스 알트슈태트의 연주는 격렬했고, 또 매우 바빴습니다. 연주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활줄이 끊어졌고, 한동안은 아예 활을 내려놓고 손가락이 터질 듯 현을 튕겨야 했습니다.

그의 악보에 따라, 곡을 한번 따라가 볼까요? 한국전통음악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곡 '낙양'을 살펴보겠습니다.


현악기의 현을 튕기면, 가야금과 같은 울림이 전해집니다. 가야금이나 거문고처럼 국악기의 줄을 짚고 흔드는 방식으로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연주하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음에서 낮은음으로, 혹은 그 반대로 갑자기 미끄러지듯이 연주하기도 합니다. 우리 국악 특유의 '꺾임'을 현악기를 통해 재현합니다.


음마다 가늘게 떨며 소리내는 플루트는 '대금'의 맑은소리를, 오보에는 '피리'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연주기법은 특히, 유럽 연주자들에게 매우 낯설게 다가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곡 저변에 깔린 한국적, 동양적 이미지가 세계 연주자들에게 새로운 매력이 되는 건 틀림없습니다.

"서양 음악은 개별 음보단, 음을 쌓아서 만드는 화성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윤이상의 음악은 음 하나, 하나가 살아 있습니다. 한국 전통음악처럼 하나의 음이 작게 시작했다가 갑자기 커지고, 폭발하는 긴장감을 갖고 있습니다."
-발터 볼프강 슈파러 국제 윤이상 협회 회장-

"윤이상 음악을 동료들하고 연습하면서, 동양과 서양 음악의 다양한 특징이 함께 섞여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들으면 들을수록 음악에 빠져드는 느낌이었어요."
-빈필하모닉 앙상블 슈켈첸 돌리 대표-

서구 현대 음악에 한국의 전통음악을 녹여 넣은 윤이상. 우리는 그를 잊었지만 그는, 그의 음악은 고국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최초 내한 빈필하모닉...세계가 다시 부르는 윤이상

지난달 31일 시작한 통영국제음악제는 19개국 나라에서 627명의 연주자가 찾아옵니다. 특히 세계적 거장들의 사운드로 윤이상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개막공연은 세계 정상급 첼리스트 니콜라스 알트슈태트가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윤이상의 '첼로 협주곡'으로 시작했습니다.

빈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단원들로 이뤄진 빈필하모닉 앙상블은 이번이 첫 내한입니다. 윤이상이 경험한 무속의식이 반영됐다고 평가받는 '밤이여 나뉘어라' 등을 들려줍니다.

특히, 올해엔 윤이상 작품에 조예가 있는 독일 연주자들이 특별히 팀을 꾸려 '윤이상 베를린 솔로이스츠'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오릅니다. '낙양, '협주적 단편'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트리오' 등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집중 조명합니다.

오는 4일에는 최수열이 지휘하는 독일 쾰른 체임버오케스트라가 <8중주>를 연주하고, 선생의 유명한 오페라 '류퉁의 꿈'도 무대에 오릅니다. 9일 폐막공연에선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가 이끄는 서울시향이 윤이상의 음악을 선보입니다.

늘 서양과 동양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방인으로 살아왔던 윤이상. 자신을 날지 못하는 '상처받은 용'이라 칭했던 그였지만, 올봄 그의 음악은 통영 앞바다를 배경으로 열흘 동안 비상합니다.

김수연기자 (kbsks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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