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360˚] "죽어서까지 차별하다니".. 세월호의 어떤 선생님들

신혜정 입력 2017. 4. 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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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김초원ㆍ이지혜 선생님의 순직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린 30일 오후 서울 양재동 행정법원 앞에서 고 이지혜 교사의 아버지 이종락(오른쪽)씨의 발언을 듣던 고 김초원 교사의 아버지 김성욱(가운데)씨가 눈물을 닦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온 국민의 관심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쏠렸던 30일 오후, 불과 4㎞ 남짓 떨어진 서울 양재동 서울행정법원 앞에선 두 중년남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날은 세월호참사 당시 사망한 단원고 기간제 교사 고 김초원(당시 26) 선생님과 고 이지혜(당시 31) 선생님의 순직 인정을 촉구하는 행정소송의 변론기일. 변론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던 두 교사의 아버지는 결국 슬픔을 참지 못했다. 김 교사의 아버지인 김성욱(57)씨는 “제자들을 구하다 떠난 초원이가 단지 기간제 교사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죽어서까지 차별할 수는 없다”며 흐느꼈다. 정부는 참사로 사망한 정규직 교사들은 모두 순직자로 인정했지만, 두 교사의 순직인정은 3년째 제자리다.

선생님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참사 당시 김초원 선생님은 2학년 3반, 이지혜 선생님은 2학년 7반의 담임선생님이었다. 두 사람이 머물렀던 곳은 가장 탈출하기 쉬운 5층 객실. 하지만 배가 기울자마자 두 선생님은 곧바로 4층으로 내려갔다. 두려움에 떨고 있을 제자들에게 달려간 것이다. 살아남은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선생님은 목이 쉬도록 ‘갑판 위로 빨리 가’라고 소리치며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을 챙겼다. 김 선생님은 제자들의 구명조끼를 일일이 챙기고 ‘뱃멀미가 심한 사람부터 차례로 올라가라’며 끝까지 아이들을 다독였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자취였다.

안산 세월호 분향소에 안치된 김초원 선생님의 영정 사진. 안산=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그날은 김초원 선생님의 생일이었다. 15일 자정, 3반 아이들은 선생님을 위한 깜짝 파티를 열었다. 케이크에 초를 꽂아 불을 붙이고, 푼돈을 모아 산 귀고리와 목걸이를 선물했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였을까. 김 선생님은 참사 사흘 뒤 아이들이 선물한 귀고리와 목걸이를 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김 선생님은 공주대 사범대를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성적이 우수했지만, 유독 교사 임용시험과는 연이 닿지 않았다. 교육 연구원으로 대학에 남아달라는 제안도 받았었지만 오직 학생들이 좋아 기간제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교사와 다를 바 없이 일했다. 담임을 맡고 매일 밤10시30분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학생들과 함께 했다. 주말에도 제자들과 스스럼없이 등산을 가고 맛난 것을 먹으러 다닌 친언니 같은 선생님이었다.

이지혜 선생님 역시 학생들을 끔찍이 아꼈다. 1년 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했지만 5년이나 단원고에 있었던 이 선생님이다. 워낙 열심히 학생들을 잘 가르치니 떠나려 할 때마다 상사들이 붙잡았고, 이 선생님 스스로도 단원고 학생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 이종락(63)씨에 따르면 이전까지 여학생 반만 맡았던 이 선생님은 그 해 처음 남학생 반 담임을 맡게 돼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우였다. 7반 학생들은 이 선생님을 졸졸 따랐고 선생님 역시 제자들에게 푹 빠져 밤늦게까지 학생들과 함께 했다. 임용고시의 문이 바늘귀 같이 좁다며 재도전을 꺼리던 이 선생님은 그 해 재도전을 시작했었다. ‘아이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선생님의 꿈은 7반 소년 서른 두 명의 꿈과 함께 물거품이 됐다.

고 이지혜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종락씨 제공

기간제 교사는 교원 아니라는 정부

유족들은 아직 두 딸을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을 좋아했고 그들을 위해 몸바친 숭고한 죽음이 단지 기간제 교사라는 지위 때문에 차별 받는 현실이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유족들은 순직 인정은 꿈도 못 꿨다. 2014년 6월 경기도교육청에 두 선생님을 의사자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했지만 담당부처인 보건복지부가 두 번이나 ‘보류’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증거나 증인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강민규 전 교감은 홀로 구조됐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아이들 조차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한 현실에서 증인이 필요하다는 복지부의 말은 가혹했다.

2015년 5월, 경기도교육청이 세월호 참사로 숨진 교사들을 순직 교원으로 추서했고, 두 선생님만 배제됐다. 기간제 교사가 교원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에 유족들은 일어섰다. 두 딸의 명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한 달 뒤 유족들은 단원고에 순직신청서를 제출했다. 정진후 전 정의당 의원이 국회입법조사처에 법적 해석을 의뢰해 기간제 교사 역시 교원에 해당한다는 해석을 받아냈고, 대한변호사협회 역시 같은 내용의 의견서를 정부에 전달하는 등 도움의 손길도 많았다. 하지만 인사혁신처는 두 교사를 순직심사 대상에조차 포함시키지 않았고, 공무원연금공단 역시 두 사람이 민간 근로자라며 순직 불가 판정을 내렸다. 법적 해석과 관계없이 그 동안의 관행과 정규 교사들의 의견이 중요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지난해 6월 유족들은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 및 유족보상금 청구서 반려처분 취소 소송’까지 제기하게 됐다.

외로운 싸움으로 유족들 역시 지쳐가고 있다. 김초원 교사의 아버지 김씨는 최근 인공성대 수술을 받았다. 참사 이후 비참한 상황에 너무 많이 울어 성대가 녹아 내린 탓이다. 순직 연금은 받지 않을 테니, 명예만이라도 지켜달라고 말하기가 그렇게도 힘들었다.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2014년 5월 14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 고 이지혜 선생님의 아버지 이종락씨가 남긴 노란리본이 비에 젖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8월 경기도는 도내 기간제교사들에 대한 교원 단체사망보험 가입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정규직이 아니라서 교직원 단체보험은커녕 여행자보험도 가입되지 않았던 두 교사의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해 기간제 교사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기로 한 것이다. 이마저도 참사 2년 뒤에야 이뤄진 일이다. 죽어서도 다른 대우를 받는 기간제 교사는 2016년 현재 4만 7,000여명, 전체 교원(48만9,000여명) 가운데 약 10%가 그들이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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