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황제 모건과 해적

권홍우 논설위원 2017. 3. 3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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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금융황제 모건과 해적

서로 비슷한 모건(Morgan) 두 사람이 있다. 헨리 모건(Henry Morgan)과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전자는 17세기 카리브해를 주름잡은 해적, 후자는 미국의 금융산업을 영국과 견줄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린 금융인이다. 둘은 혈통으로도 맺어진 모양이다. 모건 가문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저술가로 평가받는 론 처노의 역저 ‘금융제국 J.P. 모건’을 따라가 보자.

‘피어폰트 모건의 호화 요트인 코르세어호에는 미국 성조기와 영국 유니온 잭, 그리고 해적 깃발이 나부꼈다.’ 미국 제일의 금융재벌인 모건 하우스의 뿌리가 런던에서 시작됐으니 영국 국기를 게양했다지만 해적 깃발을 왜 달았을까. 론 처노의 설명은 이렇다. “피어폰트 모건은 평생 동안 자신이 유명한 해적인 헨리 모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리는 문양과 깃발을 애용했다.”

헨리와 피어폰트가 과연 같은 혈통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게 있다. 둘 다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큰 성공을 거뒀다. 해적 헨리 모건의 성공 이유는 ‘선택과 집중’. 스페인의 보물선 대신 주로 도시를 털었다. 해상 약탈은 전리품의 절반을 영국 국왕에 바쳐야 했던 반면 육지 공격의 경우 관련 규정이 없어 수익이 컸기 때문이다. 약탈한 보물을 흥청망청 써버리는 다른 해적들과 달리 농장을 구입해 재산을 불렸다. 잔혹행위 혐의로 송환됐을 때도 처벌은커녕 사면에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4년 뒤에는 자메이카의 부총독 자리까지 꿰찼다.

피어폰트 모건도 비슷하다. 1837년생인 그는 남북전쟁이 터진 1861년 24세 청년으로 징집 대상이었으나 참전 대신 돈 불리기에 나섰다. 일본의 저술가이며 반핵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의 ‘제 1권력(부제: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왔는가)’에는 청년 피어폰트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장면이 나온다. 먼저 정부를 졸라 구식 소총 5,000자루를 정당 3.5달러에 사들인 다음 여러 단계 매매를 거쳐 가격을 올렸다. 최종적으로 정부는 그 소총을 6배가 넘는 가격인 정당 22달러에 되샀다.

‘문제가 있던 구식 소총을 잘 팔아치웠다’고 여겼던 북군은 전쟁이 격화하자 모자란 총기 보충을 위해 다시 살 수밖에 없었다. 분개한 의회가 나섰지만 모건 일당은 중간상들의 책임으로 돌렸다. 피어폰트는 북부 해군의 고위 장교 듀폰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해군 전황을 이용한 금괴 투기에 나서 요즘 가치로 2,000억 원에 달하는 이익을 챙긴 적도 있다. 피어폰트는 300달러를 내고 사람을 사서 전쟁터로 보내며 징집 의무를 피했다. 피어폰트를 대신한 병사는 전쟁터에서 죽었다.

런던의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은 피어폰트의 사업은 날개 돋은 듯 커졌다. 인수 및 합병(M&A)을 통한 구조조정으로 수많은 기업을 거느리며 시세 차익을 얻었다. 핵심 블루칩이면서도 경쟁이 가장 심했던 철도회사에 주로 투자했지만 다른 방법도 써먹었다. 전신회사 주식도 함께 사들여 정보를 선점한 것. 동부 지역의 철도산업을 사실상 장악한 모건은 업종을 넓히되 우량 기업만 상대하는 전략을 펼쳤다. 미국 저술가 찰스 모리스의 저서 ‘타이쿤, 신화가 된 기업가들’에 따르면 전성기의 모건 하우스는 미국 내 산업·상업·금융 유동 자본의 40%를 주물렀다.

기업들이 모건의 고객이 되려고 되레 경쟁하는 가운데 모건 하우스는 철도에 이어 철도, 해운, 농기구 제작업체들의 인수합병까지 영역을 넓혀나갔다. 앤드루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사들인 세계 최대 철강회사인 ‘US 스틸’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독일의 해운선사들이 통합한 세계 최대 해운사 IMM 등도 모건의 작품이다. 피어폰트가 절정을 맞았던 시기는 1893년과 1907년.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폭락하고 주요 투자은행(증권사)들이 도산하며 위기를 맞을 때마다 모건은 자금을 무제한 대출, 위기를 잠재웠다. 중앙은행의 역할을 대행한 셈이다.

모건은 국제적인 인사로도 통했다. 길이 91m에 승무원 70명이 모는 초호화 고속 요트에서 독일의 빌헬름 황제를 비롯한 유럽의 국왕들과 만났다.(모건의 개인 요트는 1898년 미·서전쟁 발발시 미 해군이 쾌속 군함으로 징발했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났다) 콩고 지역을 가혹하게 착취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와도 이 요트에서 만난 뒤 돈을 댔다. 기업인들은 모건의 요트나 서재에 초청받으면 영광으로 여겼다. 모건 하우스의 힘도 자연스레 커져만 갔다.

모건은 별명인 ‘금융황제’처럼 굴었다. 협상을 직접 중재할 때는 결말이 나올 때까지 양측을 요트나 서재에 감금한 적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결혼 4개월 만에 폐결핵으로 죽은 첫 아내를 잊지 못해 다양한 여성과 만나고 다양한 미술품 수집에 병적으로 매달렸다. 모건이 의회 청문회를 마치고 이집트 여행 도중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국제 예술품 시장이 요동쳤다. 그가 사망하면 가격이 폭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올 만큼 큰 손이었다.

모건은 이집트에서 의식을 잃은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913년 3월31일 숨을 거뒀다. 공교롭게도 모건의 생애는 미국 중앙은행의 공백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중앙은행 기능을 제한적으로 수행하던 제2 합중국은행이 없어진 1837년 태어나 연방준비제도가 생긴 1913년 죽었으니까. 모건이 최후를 맞았던 로마의 그랜드호텔에는 교황을 비롯해 각국 국가원수와 정치인, 예술가들이 보낸 조전(弔電) 3,698통이 쌓였다. 역사상 그 누구도 받지 못했던 대접이다.

주목할 대목은 남긴 유산. 6,830만 달러. 요즘 가치로 71억 달러(미숙련공 임금 상승률 기준)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지만 사람들은 뜻밖으로 여겼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남긴 유산치고는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건이 개인적으로 치부하지 않았기에 유산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평가했다. 보다 중요한 점은 모건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을 개인 자산 쌓은데 치중하지 않았기에 모건 하우스도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는 점.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쓴 석유 재벌 록펠러는 모건을 “단지 부자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부자 이상의 부자라는 뜻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탐욕스러운 자본의 시대를 살았던 피어폰트는 최고경영자의 급여에 대해서도 분명한 기준을 남겼다. “사장은 많아야 노동자보다 보수를 20배 정도만 더 받아야 한다”고 했던 것. 오늘날 글로벌 기업과 금융공학을 익힌 월가의 금융회사 최고경영자의 연봉은 노동자의 360배 이상이다. 스톡옵션과 퇴직수당까지 합치면 1,000배인 경우도 없지 않다. 예전에는 몇몇 해적들이 활개쳤다면 요즘 세상에서는 조그만 권력을 가진 작은 해적들이 판치는 세상인지도 모른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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