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아, 박근혜 시대..

박정훈 논설위원 2017. 3. 31.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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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박근혜 시대를 떠나보내고 있다
舊시대의 잔해 위에 무엇을 세울지는 남은 우리 몫이다

후대의 역사 책에서 박근혜 정부 4년이 실패로 기록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스캔들에 휘말린 박 전 대통령 개인만의 실패가 아니다. 나라 전체로도 4년 세월은 어두운 그늘이 많았다. 경제가 침체되고 민생은 악화됐으며 사회 모순이 심화됐다. 공(功)도 있었지만 과(過)를 누르긴 힘들다. 이렇다 할 국가 발전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우왕좌왕 세월을 보냈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는 아베 정부의 성공과 대비돼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 비슷한 시기 권좌에 오른 두 사람은 여러모로 비교 대상이었다. 출범 초기 여건은 아베 쪽이 불리했다. 4년 전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의 늪에 빠져 있었다. 성장 동력은 쪼그라들고 디플레이션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터진 직후였다.

상대적으로 우리 쪽은 양호했다. 박 대통령 취임 무렵 한국은 금융 위기를 조기 극복한 모델로 꼽혔다. 저성장 기미가 보였으나 일본보다는 경제 활력이 살아 있었다. 삼성전자·현대차의 글로벌 약진이 계속됐고, 한류(韓流)가 유행했다. 박근혜 정부는 시대정신을 등에 업고 탄생한 듯 보였다. 경제를 살리고 양극화를 해소하며 국가 정체성을 바로 세우라는 시대정신 말이다.

4년 뒤 두 사람은 정반대 운명을 맞았다. 아베는 바닥을 헤매던 경제를 악순환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부인 연루 스캔들이 터졌으나 집권 4년의 성과는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역대 총리 중 네 번째 장수(長壽) 기록까지 세웠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은 온갖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파면당했다. 4년 사이 두 사람의 운명이 천당과 지옥으로 갈렸다. 두 나라의 국가 운명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이 모든 것이 대통령 탓이라 한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국정 파행의 상당 부분은 박 전 대통령의 무능·불통 리더십에서 비롯됐다. 비선에 놀아나고, '수첩 인사'로 국정을 망쳤으며, 일방통행 스타일로 불신을 샀다. 소통 대신 청와대 깊숙이 틀어박혀 고립을 자초했다. 대통령의 언행 중 이해되지 않던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최순실 스캔들이 터지고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통령도 거대한 시대 구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모든 원인을 개인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지난 4년의 국가 실패엔 수많은 공범과 조연들이 있었다. 대통령 보좌에 태만한 청와대 참모들이 제1 공범이다. 친박 핵심들도 있다. 권력에 기대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도 어느 하나 직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통령과 측근의 관계는 왕조(王朝) 시대 같았다. 구속영장이 청구된 날 한 친박은 "궁궐서 쫓겨난 여인에게 사약을 내렸다"고 했다. 대통령 주변의 의식 구조가 이런 수준이었다. 내시(內侍) 같은 측근들이 대통령을 더욱 망쳐놓았다.

검찰과 사정 기관은 '짖지 않는 개'였다, '정윤회 문건'이 나돌고 최순실 일당이 암약해도 마냥 눈감고 있었다. 관료 집단은 여전히 영혼이 없었다. 부당한 지시가 내려와도 군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명문대 교수들은 학사 부정을 도왔고, 공기업 회장은 인사 압력에 굴복했다. 스캔들과 관련된 그 수많은 사람 어느 누구도 경보 벨을 울리지 않았다. 국정 농단을 감시하고 견제할 어떤 시스템도 가동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 교체가 필요하다고 야당은 주장한다. 그러나 야당 역시 국가 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제 활성화 개혁 법안들을 그렇게도 발목 잡은 것이 야당이다. 정책에 '박근혜표(票)' 딱지만 붙으면 훼방부터 놓았다. 국회 밖에선 반대 진영이 끊임없이 정권을 흔들었다. 세월호 사태 이후 박근혜 정부는 온갖 음모론에 시달렸다. 국정 리더십을 발휘하려야 하기도 쉽지 않았다.

왜 박근혜 정부는 아베처럼 못 했느냐고 한다. 일리 있는 얘기다. 그러나 아베에겐 리더십을 발목 잡는 허들이 적었다. 거짓 음모론으로 공격하는 세력도, 정책을 훼방 놓는 국회도 없었다. 야당은 아베의 각종 개혁 법안을 군말 없이 동의해주었다. 구조조정한다고 파업하는 노조도 없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진영도 아베의 국정 운영을 발목 잡지는 않았다.

리더십은 물론 팔로어십(리더를 따르는 협조정신) 측면에서 우리는 일본에 뒤졌다. 아베도 잘했지만 그를 뒷받침한 시스템과 정치 문화가 더 훌륭했다. 한국과 일본의 4년을 가른 것은 나라의 실력 차이였다. 이 총체적인 국가 실패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우리는 발전하지 못한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전직 대통령이 인신 구속의 심판정에 오르는 상황만은 어떻게든 피했으면 했다. 두 번 다시 되풀이돼선 안 될 국가적 비극이다. 이렇게 우리는 한 시대를 떠나보내고 있다. 무너진 구시대의 잔해(殘骸) 위에 무엇을 세워 올릴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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