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아파트 수명이 30년

김광일 논설위원 2017. 3. 31.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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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들어 살림살이가 크게 펴면서 해외 주재원도 부쩍 늘었다. 그때 부대꼈던 외국 도시를 요새 다시 가본다. 짬을 내 옛날 살던 집도 들른다. "어쩜 그리 하나도 안 변했을까." 워싱턴에서 연수를 했던 한 고위관리는 30년 만에 그 집을 다시 찾았다고 한다. 창틀부터 돌계단 이끼까지 그대로였다. 필자도 파리특파원 때 지낸 아파트를 20년 흘러 가봤다. 고풍스러워진 데다 품위마저 붙었다. 배불뚝이 아르메니아인이 여전히 경비원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많다. 주재원으로 살 때 이미 수십 년 됐던 아파트가 지금 가봐도 멀쩡하다. 그런데 귀국해서 새로 분양받은 서울 아파트는 벌써 벽에 금이 가고 개수대에 녹물이 나온다. 바닥 파이프가 썩어 난방도 시원찮다. 겉으로 고속 인터넷망을 깔았다고 으스대는 사이 철근콘크리트 안에 파묻힌 수도관과 전선은 비명을 지르다 숨을 거둔 셈이다. 수명 짧은 아파트를 짓고, 금방 부수고, 또 짓는다. 세계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다.

▶요즘 본보에 연재되고 있는 '노후 아파트 50만 가구' 시리즈는 충격적이다. 부산의 '48년밖에 안 된' 어떤 아파트는 '재난위험시설 D등급' 표지판이 붙었다. 천장이 내려앉고 복도가 갈라져 있다. 창문도 한번 열면 닫히지 않는다. 다섯 개의 위험 단계에서 'E등급'은 사용금지, 'D등급'은 어서 빠져나오란 뜻이다. 이 아파트에는 주로 70대 노인들 4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주거 위기를 증언하는 현장 르포를 읽다 마음이 아팠다.

▶이 지경이 된 데는 우리 건축 풍토와 인구 문제가 겹쳐 있다. 턱없이 모자라게 짜인 장기수선 충당금부터 잘못됐다. 어차피 몇 년 살다 이사할 집이니 수십 년 뒤 어떻게 될지는 나 몰라라 했다. 1㎡당 충당금이 필요액의 7분의 1도 안 됐다. 철근 콘크리트 두께도 형편없었다. 100년은 고사하고 30년 넘으면 부술 요량으로 층수만 높였다. 눈에 안 보이는 배관은 녹건 말건 값싼 자재를 썼다. 밥그릇은 고급인데 정작 중요한 수도관은 녹에 약한 아연 제품이었다.

▶영국·캐나다에는 '색다르게 고쳐요' '홈스씨가 고치는 집' 같은 리모델링 TV 방송이 인기다. 얼핏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했던 동화 같다.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10층 넘는 아파트를 낡았다고 그냥 헐 수도 없고, 고쳐 쓰기도 쉽지 않다. 인구는 줄고 고령화는 가파르다. 기부채납과 용적률에 막혀 재건축도 만만찮다. 서울 노른자 땅이 아니면 건축업자가 거들떠도 안 본다. 일본은 새집만 짓다가 폐가와 빈집이 800만 채나 쌓였다.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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