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매화 향기 물씬..고양이도 꽃놀이 하네요

김영주 2017. 3. 3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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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나무 가지에 올라 꽃을 음미는 고양이. 섬진강에 흐드러지게 핀 봄꽃은 사람의 가슴만 설레게 하는 게 아니다. 이원규 시인이 직접 촬영한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이원규]
한국의 대표 작가 10명이 추천하는 ‘봄에 가고 싶은 국내 여행지’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한 달간 김주영(68)의 외씨버선길, 김용택(68)의 섬진강, 한창훈(54)의 여수 거문도, 조경란(48)의 서귀포 등의 여행지를 차례대로 소개했습니다. 3월의 끝자락, 봄비가 내린 이후 더디 오던 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번 주말부터 봄맞이 여행이 절정에 이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추천 여행지 6곳을 한꺼번에 쏟아놓습니다. 이원규(55)의 지리산 옛길, 문태준(49)의 제주 사려니숲길, 성석제(57)의 상주 우복동, 구효서(59)의 진안 운일암반일암, 윤대녕(55)의 충남 예산, 김민정(41)의 인천 북성포구입니다.

⑤ 시인 이원규의 지리산 옛길 바야흐로 산정의 흰 눈이 녹아 한사코 아래로 흘러내린다. 하동의 쌍계사 불일폭포, 구례의 수락폭포도 언 몸을 풀기 시작했다. 상선유수의 그 흰빛이 지리산 850 리의 푸른 치맛자락을 물들였다. 어화둥둥 매화꽃이다.

어느새 지리산의 품에 안긴 지 20년, 그동안 8채의 빈집을 떠돌았다. 지난해 섬진강 건너 백운산에 새 둥지를 틀었으니 철새처럼 살다 텃새가 된 셈이다. 큰 산의 품속에서는 오히려 큰 산이 잘 보이지 않는 법. 참 오랫동안 강 건너 백운산을 바라보다 이제는 하루 종일 지리산을 바라보며 살게 됐다. 봄이오는 길목에 터를 잡았으니 지리산 공부의 새 방책이 되었다.

꼿꼿한 정신의 골격은 여전히 꽃샘추위 북서풍이지만 생명의 온기는 동남풍이다. 봄 마중의 자세는 등 뒤에 찬바람을 진채 활짝 가슴을 열고 슬슬 북상하는 꽃바람을 품어보는 것. 그리하여 초봄의 지리산행은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북 남원에서 밤재를 넘어 산수유 환하게 피어나는 구례군 산동면으로, 다시 구례에서 섬진강을 따라 경남 하동으로, 문득 강을 건너 백운산 자락의 전남 광양시 매화마을로 강물처럼 흘러보는 것이다.

하지만 매화며 산수유 축제장만 찾아다니는 것은 하수들의 여행이다. 봄 마중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여행의 참맛이 훼손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먼길 달려와 정체된 길 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관광지의 상술에 상처를 입는다. 환한 봄은 유명한 축제장만 찾지 않는다. 고수들은 축제기간보다 한발 앞서 오거나 나중에 온다. 오더라도 옆길로 빠져 한적한 곳으로 가야 제대로 몸을 푸는 봄의 정체를 만날 수 있다. 여행이나 삶이 늘 그렇듯이 봄 그 자체도 과정이기 때문이다.

봄 마중을 나서려면 일단 차에서 내려 걷는 것이 좋다. 지리산 자락 그 어디에도 매화와 산수유 꽃은 피어나며, 그 꽃그늘 아래에는 봄까치꽃, 광대나물꽃 등이 더 예쁘게 지천으로 피어있다. 눈 밝은 이들은 노루귀, 복수초,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 얼레지, 산자고 등 야생화를 만날 수도 있다. 지리산 둘레길도 좋고, 섬진강 자전거 길도 좋다.

봄날에 가장 운치 있는 길은 하동군 화개면 신흥교-의신마을을 잇는 ‘지리산 옛길’이다. 화개동천의 맑디맑은 계곡물을 따라 이어진 십리 길, 서산대사가 출가하던 길이기도 하다. 고운 최치원 선생처럼 세파 소음에 찌든 귀를 씻기에 아주 좋다. 더불어 화개장터에서 강을 따라가는 섬진강 백리 길 또한 봄 마중에 제격이다.

매화향 그윽한 봄기운에 온몸이 좀 녹녹해지면 바로 그때 돌아서서 봄바람과 어깨동무하고 슬슬 북상하는 것이다. 뼈가 시린 겨울로 왔다가 마침내 환한 봄이 되어 돌아간다면 그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먼저 봄이어야 그대 또한 봄이요, 내가 먼저 꽃일 때 그대 또한 꽃이 된다.

이원규(시인)

이원규(시인)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84년 『월간문학』, 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육필시집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등 출간 현재 순천대 문창과, 지리산행복학교 강사.

⑥ 소설가 성석제의 상주 우복동
소설가 성석제의 고향인 속리산 자락 상주 우복동.
진달래 흐드러진 산골청학동같은 ‘지상 낙원’

‘고향의 봄(이원수 작사 · 홍난파 작곡)’이라는 노래처럼 봄은 꽃 피는 산골에서 체감할수 있다. 내 고향은 봄이 되면 산과 들, 마을과 강둑 할 것 없이 수많은 꽃을 피워내는 경북 상주다. 봄이 돌아오면 고향의 음식을 못내 맛보고 싶어지게 마련이어서 일이 없어도 차를 몰고 고향을 찾곤 했다.

찾아갈 고향이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인데 한반도의 깊은 속살이라 할 수 있는 내륙의 부드러운 길을 느긋하게 따라가면서 약간의 허기와 함께 고향의 음식, 고향의 벗들, 산천 경개를 미리 상상하는 것 역시 행복이라 할만했다.

나의 ‘인생 절경’이라 할 만한 그곳은 충북 괴산의 청천면에서 속리산 서쪽의 지방도를 타고 달천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남쪽으로 가던 중에 만났다. 산모퉁이를 돌던 중에 문득 진달래가 꽃밭을 이루며 무더기로 환히 피어 있는 것이 광휘로운 봄과 생명의 오케스트라의 총주(tutti)를 듣는 느낌이었다.

본디 진달래는 음지식물이라 산비탈의 그늘진 곳이나 다른 나무 아래에 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곳은 산굽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연극 무대가 펼쳐지듯, 적멸에 가까운 고요함 속에 분홍 진달래 위로 봄철 한낮의 광명이 환하게 내리쬐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그걸 보았을 때는 어린 시절 낯선 동네에 잘못 갔다 그 동네 아이들과 맞닥뜨린 뒤 복부를 한 대 얻어맞은 소년처럼 신음을 내며 차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복통은 내가 그곳이 내 고향이 아닌 충북 괴산, 보은인 줄로 알고 부러움과 질투에 사로잡힌 데서 기인했다. 상주의 경계가 속리산 서쪽까지 뻗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30대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1986년 문학사상 『유리닦는 사람』으로 등단 소설로 『투명인간』『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조동관 약전』 『호랑이를 봤다』『왕을 찾아서』 등 다수.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수상. ⑦ 시인 문태준의 제주 사려니숲길
시인 문태준이 제주에 갈 때마다 찾는 사려니숲길.
조릿대·삼나무숲 일품몸도 마음도 청량해져

제주도에 갈 때마다 나는 오름을 오르고, 새로운 길을 찾아 걷는다. 근래에는 모슬포를 찾아갔고, 산방산 주변을 걸었고, 선흘리 먼물깍 습지를 보았다.

제주는 새봄의 빛깔이 선명했다. 노란 유채와 남색 바다와 붉은 동백이 곱고 신비로웠다. 등대와 먼 수평선과 수평선 너머의 너른 해역을 바라보며 걷는 바닷가의 시간도 좋았지만, 돌담길과 밭길과 곶자왈과 산을 오르는 시간도 좋았다.

그런데 내가 제주도를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찾아가는 곳이 있다. 사려니숲길이다. 사려니숲길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비자림로에서 시작하는 약 15㎞의 숲길이다. 가까이에 절물휴양림이 있다. 해발 500~600m에 위치한 길로 아주 평탄하고 먼 길이다.

‘사려니’는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평일 오전 시간대에는 찾는 사람이 적어 더 한적하다. 꿩이나 까마귀의 꾸짖고 탄식하는 듯한 울음소리가 오히려 정겹다. 나무와 덩굴이 서로 마구 엉클어져 있어도 어지럽게 보이지 않는다. 돌에 낀 푸른 이끼도 싱그럽고 폭신하게 탄력이 있다. 근래에 갔을 때는 바람 소리를 실컷 들을 수 있었고, 바삭하게 마른 수국도 볼 수 있었고, 곳곳의 잔설도 각별하게 눈에 띄었다. 그야말로 막바지에 이른 겨울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나는 이 숲길을 세 시간 정도 걸으면서 단순한 시간을 즐긴다. 볕과 바람과 나무와 돌과 새와 흙과 하늘과 함께 있는 단순한 시간을 즐긴다. 말을 줄이고, 생각을 줄이고 오직 걸어갈 뿐이다. 걷다 보면 어느새 근심의 체중이 줄어들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는 맑고 깨끗한 공기가 들어찬다. 그만큼 간결한 길이다. 그만큼 어떤 것에 대해서도 중언부언하지 않는 길이다.

조릿대 구간과 삼나무 구간을 지날 적에는 몸도 마음도 한결 청량해진다. 특히 조릿대는 한파를 참고 견디는 식물로 60년~100년을 살고, 딱 한 번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은 후에는 곧 죽는다고 한다.

나는 조릿대 위로 바람이 불어갈 때 생겨나는 소리를 좋아한다. 내 어릴 적 어머니께서 조리로 쌀을 일 때의 그 소리인 것이다. 삼나무숲 또한 일품이다. 아름드리 삼나무는 거대한 침묵의 몸체 같다. 요지부동이고 고집스레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오히려 그들이 넉넉해 보인다. 지혜도 엿보이고, 배짱도 두둑해 보이고, 성품이 후덕해 보이기까지 한다.

몽골의 시인 이스 돌람은 시 ‘자유’에서 “꽃과 나뭇잎의 진한 향기에 취하고 / 맑은 저녁 공기에 마음은 관대해지고 새로워지리 / 달이 밝은 밤에 목청껏 노래하고 / 초조해하는 일 없이 떠돌고 싶다”라고 노래했다. 나는 사려니 숲길을 걸어갈 때 부드러운 자연을 만나고, 그리하여 넓은 마음을 얻고, 나를 바로 봄으로써 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다.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9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맨발』 『가재미』『그늘의 발달』 『가만히 사랑을 바라보다』 『먼 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등. ‘유심작품상’‘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애지문학상’ 등 수상 ⑧ 소설가 윤대녕의 충남 예산

소설가 윤대녕의 고향 충남 예산 수덕사.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걷는 스님들이 정겹다.
수덕사·온천· 추사 고택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가끔 술자리에서 서로 고향이 어디냐고 묻다, 내 고향인 예산(禮山)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이 물어온다. 거긴 뭐가 유명해요? 나는 충청도 사람답게 뜸을 좀 들이다 이런 단어들을 섞어서 늘어놓는다. 사과, 담배, 덕산온천, 만공스님이 주석했던 수덕사, 이응로 화백의 문자 추상 작품이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는 수덕여관, 추사 고택, 그 집 화단 앞에 세워져 있는 ‘석년(石年)’이라는 입석 해시계, 대원군의 아비인 남원군의 묘, 윤봉길의사 등등.

그럼 사람들이 이렇듯 대꾸한다. 아, 예산이 그렇게 유서 깊은 고장이에요? 근데 왜 통영, 여수, 속초처럼 관광상품이 제대로 개발돼 있지 않은 거죠? 우린 개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요. 남한테 뭘 드러내는 것도 썩 즐기지 않고요. 그렇구나, 하긴 양반동네라고 하더구만.

언젠가 모 시인과 함께 예산에 간 적 있었다. 식당에 들어갔더니 풋고추와 된장이 반찬으로 딸려 나왔다. 시인이 물었다. 이 고추 매워요? 주인아주머니는 대꾸가 없었다. 시인이 거듭 물었다. 이 고추 매워요, 안 매워요? 그러나 주인은 역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나오며 시인이, 왜 사람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하는 거냐고 투덜거렸다. 그제야 주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먹어 보면 알 거 아뉴. 뭐, 매운 것도 있고 안 매운 것도 있것지. 충청도 얘기가 나오면 이와 유사한 유머(?)들이 으레 입에 오르내린다.

나는 예산 신양면 사람이다. 박헌영이 태어난 신양리와 인접한 만사리 출신으로 아홉 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남들이 보기엔 지극히 평범해 보일 수도 있는 그 자연의 풍광 속에서 나는 유년기를 보냈고, 정서라든가 감수성이 대부분 그때 형성되었다. 조용한 사람들, 사계의 신비로운 변화, 여름엔 푸른 들판에 학들이 떼지어 앉아 있고 가을이면 온동네가 사과 냄새에 감싸여 있었다. 씨족 공동체였으므로 집들이 문을 열어놓고 살았으며, 그건 도둑이 든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치매에 걸린 노인들이 집을 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횃불을 들고 찾아다녔다. 그 밤의 불빛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고향을 다시 찾은 것은 열한 살 때였다. 그 무렵에 전기가 들어와 밤에도 마을이 훤했다. 마음에 원형으로 남아 있던 고향의 모습이 그렇게 70년대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후 명절 때나 들르다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는 고향에 내려가는 일이 더욱 뜸해졌다. 최근 십 년 동안은 아예 그곳에 간 일이 없다.

새우젓으로 유명한 광천과 이웃하고 바다를 끼고 있는 서산, 당진과도 가까운 예산은 내 부모의 고향이기도 하다. 4월에 그곳에 갈 일이 생겼다. 팔순을 훌쩍 넘긴 부친이 더 늦기 전에 묫자리를 봐둬야겠다며 내게 동행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수구초심이라고,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향이 더욱 그립다. 시인 정지용이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향수에 젖어 노래했듯이. 1962년 충남 예산 출생. 1990년 문학사상 등단. 현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소설집 『은어낚시통신』『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대설주의보』『도자기 박물관』,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미란』『눈의 여행자』『피에로들의 집』등. ‘이상문학상’‘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등 수상. ⑨ 소설가 구효서의 진안 운일암반일암
소설가 구효서가 ‘애인과 함께 가고 싶었다’는 운일암반일암. [사진 강레아]
입이 쩍 벌어지는 비경애인과 가면 정드는 곳

이름처럼 아스라한 곳이다. 운일암반일암. 구름도 반나절 해도 반나절. 그토록 물 많고 깊은 계곡. 아스라한 만큼 나에겐 오래도록 아름다운 곳이다. 두 차례 갔었으나 모두 오래전 여름의 일이다. 1983년에 처음 갔었고 3년 뒤인 1986년에 다시 갔었다.

1983년의 나는 시와 소설을 쓴답시며 잔뜩 폼을 잡던 예비역 복학생이었다. 1986년은 총각으로서의 마지막 해였다. 1983년에는 대학 문학 서클 친구들과 와르르 어울려갔고 1986년엔 애인과 단둘이 다녀왔다.

운일암반일암은 이름 그대로 암석과 암벽의 계곡인데 안 알려진 곳이라서 좋았고 안 알려진 것에 비해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비경이라 좋았다. 일반 계곡에서 흔히 보는 매끈하고 둥글둥글하고 넉넉한 너럭바위와는 어딘가 다른 바위들이었다. 시 쓰는 친구들이 시시덕거리기를, 던진 만두 반죽 던진 찐빵 반죽 던진 곰보빵 반죽이라고 했다. 여느 화강암과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아닌 게 아니라 계곡의 바위들은 산신령이 빵 반죽을 하다가 말고 급히, 그것도 아무렇게나 떼어 던져놓은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애인이 만나자는 바람에 산신령이 좀 급했나 보다고 친구들은 실없이 웃었다. 늘 풍부한 물 기운에 흥건히 젖어 검게 번들거렸으니 바위가 빵이라면 오징어 먹물 빵이었다.

계곡의 바위에다 산신령이며 그의 애인까지 들이대는 건 좀 뭣할지 모르나 그럴만한 까닭이 없지는 않다. 젊은 날의 관심사의 팔할은 연애가 아니던가. 게다가 엠티고, 남녀의 비율이 적당히 반반이고, 민박이야 남녀따로 정했지만 술 마시고 문학을 열광적으로 논하다 보면 한 방에서 밤이 깊어지게 마련 아니던가. 그러다 보면 없던 애인도 생기고 아닌 척했던 애인 관계도 탄로 나고 애인이었던 사이가 벌어지고 그러는 것.

그날도 여지없이 그랬다. 한 놈이 울고불고 그랬다. 그럴 줄 알았다. 문학은 무슨. 놈은 성질을 내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는데 밖엔 비가 쏟아졌다. 칠흑 같은 밤에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천길 낭떠러지였다. 일행은 놈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어두운 계곡과 암벽을 샅샅이 뒤졌다. 날이 밝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놈을 찾았는데, 술에 취한 놈이 비틀거리며 헤맸던 칼바위 길을 아침에 맞닥뜨렸을 때의 아찔함이라니. 절로 오금이 꺾였다. 그런데 오해라며 놈에게 달려들어 눈물 콧물 쏟으며 와락 얼싸안던 여자 시인 지망생의 지극한 오열이라니. 영화를 찍는구나. 아, 참, 나,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한마디씩 했지만 어쨌든 놈 탓에 운일암반일암 구경은 밤낮으로 제대로 한 셈이었다.

나에게 애인이 생겼을 때 운일암반일암 생각이 가장 먼저 났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까. 하루쯤 캠핑하자고 그곳으로 지금의 아내와 함께 떠났던 여행이 그만 3박 4일이 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무엇보다, 운일암반일암의 매력과 운치 때문이, 었, 겠, 지. 멀고 아스라해서 더 아름다운 기억이다. 지금도 그때의 그 운일암반일암일까. 어련할까. 선캄브리아기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지질층이라지 않은가. 애인이 있는 사람도 애인이 없는 사람도 가 볼 곳이다. 1958년 인천 출생.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마디』로 등단 소설 『타락』『동주』『랩소디 인 베를린』『나가사키 파파』『비밀의 문』 등. ‘이효석 문학상’‘황순원 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수상. ⑩ 시인 김민정의 인천 북성포구
시인 김민정이 유년 시절 뛰놀던 인천 북성포구.
별 볼것 없는 작은 포구빈 마음을 뭔가 채워줘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난 꼭 그런다. 저요? 인천 짠년인데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보고 배운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짠에 년까지 붙이고 마는지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부지불식간에 툭 튀어나가는 습관이니 태생적인가 하면서도 실은 발음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게도 되는바, 이 대목에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부분은 어쨌거나 내가 지갑 열기의 선수라는 거다. 그러니까 자린고비의 그 소금이 아니라 인천 앞바다의 그 소금에 혀를 대는 게 나란 거다.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나 더는 인천에서 먹고 자지 않는 나는 그런데도 종종 인천에간다. 평생 인천 남구에 둥지를 틀어온 부모님이 여직 그곳에서 여전한 둥지를 지키며 살아가는 까닭이다. 인천에 가면 집 말고는 참 갈 데가 없어 하면서도 나는 아빠를 앞장세워 집을 나서기 일쑤다. 73년 인천 토박이를 따라 자주 가던 인천 곳곳을 산책할 적에 드는 익숙한 편안함이 추억을 빙자한, 꽤 누릴 만한 사치 같기도 해서다.

특히나 평생 노동자로 근무한 동일방직을 중심으로 동구 안팎을 다닐 때면 유난히 목소리가 커지는 게 아빠다. 어린 나를 무동태워 신나게 드나들던 단골 가게에 작정하고 들를 때면 더더욱 목청을 높이는 게 아빠다. 몇 대에 걸쳐 이어지는 가게마다 고주망태 아빠를 기억하는 부엌 할머니들이 꽤 있었으니, 어느 날은 대구탕 할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와 아빠를 와락 끌어안았고, 어느 날은 주꾸미 할머니가 아빠를 보고 주저앉아 눈물 바람인 적도 있었으며, 어느 날은 중국집 할머니가 아빠에게 고기 튀김 한 접시와 고량주 두 병을 품에 안긴 적도 있었다. 돈깨나 뿌린 덕분이지, 안 그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뻘 되는 가게 주인 아주머니는 죄다 양어머니 삼던 아빠의 연한 기질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나는 아빠만의 분명한 미각에 더한 신뢰를 품어왔다. 최소한 맛없는 집은 두 번 다시 안 가는 단호함이 또한 아빠에게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아빠랑 자주 술을 마시고 북성포구에 걸으러 다녔다. 초입에 조개 까는 할머니들 보러 간다는 게 핑계기도 하였지만 실은 아빠랑 걷고 싶어 북성포구에 가곤 했는지 모른다. 북성포구라 쓰인 간판을 따라 들어가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쇠락한 횟집 몇이있고 그 옆으로 난 바다가 보인다. 물이 차면 유한락스 통이나 사이다 병이나 검은 튜브가 둥둥 떠 있는 바다지만 물이 빠지면 살이 어지간히도 쪄서 뒤뚱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갈매기들 천지가 되는 검은 땅.

작년 여름에는 공연히 지는 노을이 너무 빨갛다 싶어 그 노을 사진만 200장을 넘게 찍어가며 소주 두 병을 비우고 온 적이 있었고, 지난겨울에는 북성포구 입구에 쌓아 놓은 검은 새 연탄들 옆에 다 타가는 희뿌연 연탄을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고만 온 적도 있었다. 그냥 그래보고 싶은 어떤 순간들에 충실해져보는 자유, 그 거리낌 없음. 무엇을 보겠다는 작심이 없으니 가볍고 빈 마음인데 그러다보니 무언가를 채워서 가게도 되는 곳, 그곳이 내게는 북성포구다. 아마도 예닐곱 편을 시로 쓰지 않았나 싶다. 1976년 인천 출생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산문집으로 『각설하고』 등. 정리=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사진=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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