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그라스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역사와 현실]귄터 그라스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취미 하나가 늘었다. 세계를 움직인 예술가와 학자, 정치가를 직접 만나는 일이다. 직접이라고 했지만 실은 인터넷을 뒤져 그들과의 인터뷰 동영상을 감상하는 것이다. 엊그제는 20세기의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그의 진솔한 자기고백이 이어져 정말 감동적이었다.

노년의 귄터 그라스는 자신의 직업이 네 가지라고 했다. 작가이자 화가, 조각가이자 노벨상 수상자라고 말하였다. 도시빈민 출신이라서 그는 대학을 다니지 못했다. 삽화가를 기르는 미술학교를 겨우 졸업했을 뿐이다. 학창시절에 조각도 배웠기에,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직업이 ‘노벨상 수상자’라니, 어찌하여 그것도 직업이 될 수 있는가?

그라스의 설명에 따르면, 노벨상 수상자로 사는 것이 부럽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그 상을 타고 나면, 여기저기서 부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한다. 피치 못해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노벨상을 타기 전에도 그라스는 그라스였는데, 세상은 왜 큰 상을 받아야만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이번에도 대통령 탄핵이 마무리되자 말들이 확 바뀌었다. 2016년 4·13 총선 때도 그러했다. 예상과 달리 야당이 승리를 거두자 주류 언론과 몇몇 종합편성 채널들은 평소와 다른 주장을 쏟아냈다.

민심의 소재를 누구도 몰라봤다는 둥, 정치권보다는 시민들의 의식이 몇 단계 앞서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둥 평소에 하던 말과는 상반되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잘도 읊었다.

시도 때도 없이 금세 태도를 바꾸어 대는 것은 보기에도 처량하다. 배알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못할 일이다. 지금도 태극기를 온몸에 휘감고 “여왕마마”를 죽어라 연호하는 삼성동의 시위꾼들도 사회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구실로 오락가락하는 주류 언론의 변덕스러운 꼴도 시민들이 보기에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그라스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았다. 그의 별명은 ‘까칠이’였다. 권력과 재산과 명예를 뽐내는 사람들에게 그는 허리를 굽히지 않은 것으로 이름이 났다. 그라스의 인생은 그 자신의 말을 통해 몇 마디로 요약된다.

“나는 늘 약자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기로 작정했고, 나의 시, 나의 소설은 언제나 그런 시각을 유지했다. 이것이 나의 문학이다.”

살펴보면 그라스와 같은 문인들이 이 땅에도 있었다. 그가 만일 한국인으로 살았더라면, <홍길동전>과 <임꺽정> <전봉준> 등을 썼을 테고, <태백산맥> 같은 소설도 지었으리라. 그는 흉포한 독재정권으로부터 감시와 모욕을 당하다가 김남주 시인처럼 죽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라스였다면 <오적>이란 시는 썼을망정, 중간에 변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설사 그의 아버지가 ‘빨갱이’였다 해도, 그런 이유로 비겁하게 권력자들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는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땅의 그라스는 진정한 ‘운동권’이 되어 자본의 횡포를 비판하고, 수구적 정상배들에게 온몸으로 저항하는 진보적 지식인이 되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그라스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당(SPD·사민당) 당원으로서 누구보다 적극적인 유세를 벌였다.

하지만 그는 ‘친이’ ‘친박’ 또는 ‘친노’를 자처한 이 땅의 ‘폴리페서’나 유사 지식인들과는 유가 달랐다. 그라스는 사민당 출신의 총리들, 곧 헬무트 슈미트,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과 친했다. 동독과 화해정책을 추진한 빌리 브란트와는 유난히 뜻이 잘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스는 한자리를 노린 권력의 ‘충견’이나 ‘호위무사’는 아니었다.

[역사와 현실]귄터 그라스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그라스는 자신의 정치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선거 때가 되면 나는 어김없이 사민당을 위해 유세활동을 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나는 당권자를 여지없이 비판했다. 나는 사민당의 정책에 대해 쓴소리를 쏟았다. 다음 선거철이 될 때까지 나는 줄곧 그들의 허점을 공격해댔다. 그것이 지식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될 사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라스가 만약 이 땅의 지식인, 작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두말할 필요 없이 그는 촛불시민의 뜻을 따르는 정치가의 편에 설 것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자신이 지지했던 바로 그 정당조차 여지없이 비판할 것이다.

그라스의 정치참여는 언젠가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기 위한 사전포석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범한 시민들이 어깨 펴고 살 세상을 위해 나설 따름이다.

그라스는 우리에게 신도, 우상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절박한 시점에 그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는 꽉 막힌 내 가슴에 한줄기 통쾌한 빛줄기를 선사했다.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 비판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기울어진 균형추를 바로잡는 행위이다. 여태껏 나는 그렇게 살아볼 생각조차 못했지만, 그라스는 용기를 내라고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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