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8) 다시 차별의 경계선을 넘는 '디아스포라'

2017. 3. 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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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은 북한을 나온 탈출자인 동시에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생아이기도 한 것이다. 분단이 주는 이러한 낙인효과와 무게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국제사회의 미아로, 디아스포라로 남기를 원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A의 신변보호를 담당한 경찰에게서 전화가 왔다. A가 휴전선을 넘어온 직후 유관기관에서 만나볼 의향이 있느냐고 연락해왔지만 지방에 있는 회사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시기라 틈이 없었다. 사회인이 되고도 나를 찾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만났다. 그는 귀순 전 내가 있었던 비무장지역에서 근무했던 엘리트 군관(장교)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을 넘어온 수많은 귀순자들이 있었지만 현역 북한군 보위군관(군의 정보·사찰 담당)의 귀순은 그가 처음이었다. 북측 비무장지대에 있을 때 그를 본 적은 없었지만 나를 잘 알고 있었다는 그의 말에서 귀순 전에 나를 벤치마킹하며 한국행을 준비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의 귀순 동기는 명약관화했다. 17세에 군에 입대하여 10년간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한 그는 성실성과 명민함을 인정받아 보위군관으로 발탁된 후 고향에 갔다. 그러나 어머니와 여동생이 굶주릴 대로 굶주려 제대로 운신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섰고, 비무장지대에 투입 후 DMZ를 넘어온 것이다. ‘권총호출귀순사건’으로도 알려진 A는 첫 인민군 현역 보위군관이었고 정치형 귀순자였지만 한국 사회에 나온 후 공사장과 일용직을 전전해야 하는 처지에도 큰 불평은 없었다. 다만 호출귀순자라는 이유로 안보강연에서 배제한 국방부에 대한 섭섭함이 있을 뿐이었다.

탈북민은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 북한에서는 배신자로, 북한을 떠나는 순간 북한체제의 피해자로 묘사된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는 북한체제의 증언자인 동시에 이등·삼등국민으로 취급된다. 도래지를 찾아 떠나는 새들처럼 ‘탈남’하는 무리는 한때는 동유럽으로, 또 한 시기는 서구권으로 가더니 아직은 지문공유가 닿지 않은 북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로 다시 발길을 돌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탈북 후 정착 못하고 다시 한국 떠나

나를 찾아온 것은 옛 전우에 대한 향수 때문이기도 했고 대학 진학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현장 일을 하면서 돈을 모을 수 있지만 공부를 하며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말에 기꺼이 그의 대학 진학을 도왔다. 나처럼 정치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고 준비 끝에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얼마 남지 않은 첫 학기를 앞두고 그는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TV방송의 사시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고 알려왔다. 걱정은 됐으나 만류할 수도 없었다. 종편의 시사프로그램에 나간 후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호출귀순자’라는 전과(前科) 아닌 전과는 안보강의조차 할 수 없는 결격사유였지만, 방송에서는 그것만큼 솔깃한 소재도 없었다. 게다가 현역 DMZ 보위장교 출신의 경험과 증언은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그런 운명을 시기했을까. 북한출신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폄하 발언으로 아슬아슬한 긴장의 수위를 넘나들었던 진행자와 A의 방송은 폭발의 임계점을 넘어섰고 결국 그는 하차했다. 현장 일을 하면서도 드러난 적이 없었던 분개와 상실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어느 날 그는 ‘탈남(脫南)’했다. 탈남지에서의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돈마저 현지에서 사기를 당했고 다시 귀국한 뒤론 아내와의 관계도 틀어져 결국 징역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미안하다.” 면회실 저편에서 그가 말했다. 학교를 그만둔 것이 미안한 것인지, 그곳에 있는 것이 미안한 것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B를 만난 것은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였다. 북한의 유수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한국방송을 듣고 무작정 두만강을 건너 운 좋게 한국에 입국한 그는 당시의 경제형 탈북민 중에서 비경제적 동기로 이탈한 몇 안 되는 목적형 탈북민이었다. 그의 목적이 한국에서의 학업이었던 것처럼 수도권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해나갔고 가정도 이루고 슬하에 두 아이도 뒀다. 인품이 좋아 그를 형으로 따르는 고향인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가정도 이루고 원하는 공부도 마친 후 남부러워하는 기업에도 입사한 그의 좌절은 문득 두 자식으로부터 찾아왔다. 탈북민 자식들과 함께 공부하는 학교로 아이를 보낼 수 없다는 한국 부모들의 항의를 목격한 후 아내와 조용히 짐을 쌌고 회사에 사표를 낸 후 한국을 떠났다. “미안하다.” 새로운 정착지에서 온 카톡이었다. 미리 얘기를 하지 않고 떠난 것이 미안한 것일까? 몇 달 후 그를 형으로 따르던 동생들이 하나 둘 한국을 떴다. 이곳에서 동고동락하며 이루어온 소중한 인연들이 그와 함께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C는 전형적인 경제형 탈북민이었다. 많은 아사자가 생겼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인신매매로 중국으로 넘겨졌고 여러 번 팔리면서 가까스로 한국에 입국했다. 하나원에서 만난 탈북출신 남성과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일본으로 시집갔지만 다시 한국으로 왔다. 어느 지역 공단 근처의 다방에서 일하던 그는 이제는 조금 편히 살고 싶다며 복지가 좋다는 나라로 갔다. 고단하고도 짠한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서 이상하게도 북한이나 한국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중국이나 일본 생활에서 기억되는 흔한 회고조차도 없었다. 다만 내게 한 번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가 알고 있는 친구들 중 대학공부를 하는 사람이 유일하니 나중에 자신이 겪은 기구한 삶의 여정을 책으로 남길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다. 확신 있게 대답해줄 수 없었던 것이 아직까지도 미안하다. 어쨌든 그는 외국에서 살고 있지만 지금도 자기 삶의 주체로 여전히 동태적이다.

필자도 북한 출신이지만 탈북민을 생각하면 너무 안됐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에서는 배신자로, 북한을 떠나는 순간 북한체제의 피해자로 묘사된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는 북한체제의 증언자인 동시에 이등·삼등국민으로 취급된다. 결국 한반도 분단이 만든 탈북민은 북한을 나온 탈출자인 동시에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생아이기도 한 것이다. 분단이 주는 이러한 낙인효과와 무게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국제사회의 미아로, 디아스포라로 남기를 원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차별의 경계선을 다시금 넘으려는 그들의 생애와 선택을 비난하는 이도 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거나 반성하고 있는 곳은 없다는 것이 바로 분단 조난자들이 겪고 있는 비극이자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탈북인 3만명 중 15%가 ‘탈남’

목숨을 걸고 입국한 이 땅을 다시 등지는 탈북민의 행렬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정확한 통계를 공개한 적이 없어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일각에서는 약 5000명의 탈북민이 탈남했거나 되돌아온 것으로 추산한다. 한국에 입국한 누적 탈북민이 3만명이니 6명 중 한 명이 탈남했거나 탈남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통일의 모델로 벤치마킹하려는 독일의 그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독일이 분단된 후 1990년에 통일을 이룰 때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인은 무려 460만명에 달한다. 탈북민의 탈북이 본격화된 후부터 계산하더라도 약 20년이 된 시점에 와서야 3만명에 도달한 우리와는 확연히 비교된다. 그뿐이 아니다. 460만명의 동독 탈출자 중 서독에 정착한 후 다시 3국행을 택한 이는 극소수인 반면 우리는 3만명의 탈북민 중 15%에 가까운 사람들이 제3국으로의 탈남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탈남입북자(脫南入北者)들도 있다. 심지어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중 북한이 자신의 ‘조국’이라며 공개적으로 송환을 요구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3국으로의 탈남자가 주춤한 추세는 한국에서의 형편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탈북민의 탈남을 정부가 외교채널을 통해 조치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영국이나 캐나다와 같이 탈북민들이 선호하는 탈남 국가들과 지문정보 공유에 합의함으로써 한국 국적의 탈북민이란 사실이 적발되면 추방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삼엄한 북·중 국경선이 3만의 탈북민을 막지 못했듯이 탈북민 문제에 대한 동어반복과 어물쩍 넘기기가 지속되어 추상성만 남발한다면 탈남의 행렬은 다른 경로와 방법으로도 충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지문공유는 순간의 미봉책일 수도 있다. 정작 우려는 다른 곳에 있다. 460만의 동독 탈출자 중 3국을 선택하는 이는 얼마 안 되지만 서독에서 정착했던 동독인들이 다시 동독으로 돌아간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체에서 무려 11%에 달하는 40만명의 서독 정착 동독인들이 동독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당시 동독은 다시 돌아와도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북한이 탈북민이 돌아와도 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준다면 과거 동독의 사례처럼 3국이 아닌 북한을 선택할 함의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미 지난 3월 북한인권정보센터(NKDB)가 진행한 설문에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답한 탈북민이 20.8%에 달한 조사도 있다. 북한도 이를 알고 “비록 죄를 지은 자식이라도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사람들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고 선전하는 한편 “고난의 언덕을 딛고 올라선 조국은 그 사이 천지개벽했다. 탈북자들의 고향과 마을도 몰라보게 변했고 친척·친구들도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며 정치·경제·연계·목적형 탈북에 국한 없이 모든 탈북민의 재입북을 적극적으로 종용하고 있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 20.8%

결국 향후에 일반적인 탈남보다 더 심각하게 대두될 부분이 바로 ‘재입북’의 문제일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재입북 탈북민이 19명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훨씬 많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잊을 만하면 재입북을 하려다가 적발된 탈북민의 실형 소식이 자주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그 숫자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재입북의 원인을 북한에 의한 협박과 회유라는 일면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최근에는 한 탈북청년이 배를 타고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은 채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유유히 북한으로 되돌아간 사건도 있었고, 휴전선을 통해 월북을 시도하려다 잡힌 탈북민도 있었다. 재입북한 사람들은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에 걸쳐 있는데 가족과 함께 동반 ‘재입북’한 사례도 있고 홀로 북한으로 들어가 기자회견장에서 침 튀겨가며 한국을 비난하던 탈북민이 나중에 가족을 동반하고‘재탈북’하기도 한 웃지 못할 후일담도 있다.

재입북자들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면서 나는 몇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다. 북한체제에 유리하도록 각본된 기자회견이겠지만 대본과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격앙하는 부분이 모든 이들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한민족이라고 생각했던 남한 사회와 주민들로부터 북한 출신들이 받고 있는 천대와 멸시, 차별과 수모라는 표현이었고 탈북민은 인간 이하의 대접과 막심한 후회로 ‘인간생지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불편한 언어였다. 대체로 건조하고 무덤덤한 증언이지만 그들의 감정이 격해지는 그 지점에서 기자회견의 모든 내용이 살아남기 위한 연출이 아님을 눈치챘다. 나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한국 사회가 그들이 말하는 ‘인간생지옥’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그러진 냉대와 편견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생사를 걸고 온 이 땅을 다시 떠나는 주변인의 모습에 생각이 미치자 아픔이 밀려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올해 3월에 진행한 조사에서는 한국에서 탈북민 2명 중 1명이 북한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에서 살다온 그 피해자들은 한국에서도 사생아가 됐다. 주민등록증은 있지만 북한출신이란 꼬리표는 찝찝한 느낌의 유사어가 됐고, 한민족이지만 이질적인 사고방식과 정서의 폭은 일상화된 차별을 가져왔다. 배고파서 온 사람들이 배만 부르면 잘 정착할 것이라고 봤던 판단은 너무나 순진했다. 배고픔보다 더한 것이 같은 민족구성원으로부터 받는 차별이고 생존공포증임을 탈남과 재입북으로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몇의 진단처럼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저항이라는 것에도 동의하기는 어렵다. A는 정치적 귀순자임에도 자신이 받는 추레한 대우에도 별로 불평한 적이 없었다. B는 목적형 탈북민으로서 자신의 진로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경제형 탈북민인 C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남에게 의존한 적이 없었다. 한국 사회의 차별과 편견, 배제에서 비롯된 이들의 탈남은 어쩌면 저항보다는 더 나은 자유를 꿈꾼 선택일 수도 있다. 국제사회의 미아로, 디아스포라도 남을지언정 남북한의 사생아, 분단의 조난자의 형편을 넘어서겠다는 의지는 숙명주의를 넘어서는 다소간의 발걸음이자 보다 나은 삶을 향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기실은 한반도의 병리적인 분단구조에 사는 모두야말로 진짜 분단의 조난자들이라는 광의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어김없이 계절은 또 바뀌고 있다. 도래지를 찾아 떠나는 새들처럼 ‘탈남’하는 무리는 한때는 동유럽으로, 또 한 시기는 서구권으로 가더니 아직은 지문공유가 닿지 않은 북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로 다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어느 날 새벽인가 한 통의 국제전화에 잠을 깼다. “너 아직도 한국이냐? 생각보다 끈질긴 면이 있네?” 진심인지 야유인지 모를 친구의 안부전화에 대꾸 대신 그가 이동한 서구권에서 북유럽으로의 빠른 대륙 종횡에 혼자 감탄했다. 그 친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 행여 북한으로 재입북했을까봐 절친들이 수군거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갔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란 사실을. 그러나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묵직함은 이곳에 남겨진 사람들이 지고 가야 할 분단의 멍에이자 괴로움이다.

<주승현(전주 기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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