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어쩌면]프로도와 정세균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입력 2017. 3. 28.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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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프로도는 호빗족이라고, 인간의 허리 정도 크기의 작은 종족에 속하는 소년이었다. 프로도는 지극히 온순한 성격인 데다 무술이라곤 전혀 할 줄 몰랐다. 위기에 몰리면 창백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니 그가 우연히 얻은 반지가 사실은 엄청난 힘을 지닌 절대반지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 게다가 그 반지가 악의 세력을 이끄는 샤우론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운명의 산’까지 반지를 가져간 뒤 용암에다 던져버려야 한다는 말까지 들었을 때, 프로도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기까지 했으리라. 샤우론이 절대반지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노릴 게 분명한데, 그 위험에 맞서서 반지를 버리러 가라니 그게 말이나 되나?

하지만 프로도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한다. 마법사와 요정, 인간전사 등으로 구성된 반지원정대가 프로도를 지켜 주지만, 프로도는 반지를 버리러 가는 여정에서 죽을 고생을 한다. 칼에 찔리고, 집채만 한 거미가 내는 거미줄에 묶여 죽을 뻔하다 살아나고, 온갖 괴물로 구성된 샤우론의 군대를 피해 도망치면서 프로도는 내가 어쩌다 절대반지를 얻어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도는 목적지에 가는 동안 한 번도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았고, 결국 용암에 반지를 던지는 데 성공하며, 반지원정대를 공격하던 샤우론의 군대는 먼지로 변한다. 3부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반지의 제왕> 얘기다. 원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난 이 영화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로 이해한다. 평범한 호빗인 프로도가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 위치에 서자 그 운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는 의미다.

“검찰에 경의를 표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박씨) 측 변호인단이 검찰조사 종료 후 남긴 말이다. 박씨가 시켜서 한 말이라는데, 이는 검찰조사가 충분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자택 근처에 가서는 지지자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 만족도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그날 박씨는 뇌물수수를 비롯해 14가지 범죄혐의를 저지른 피의자로 검찰조사를 받고 왔다. 당시 시점에서도 조사가 앞으로 계속될 것이며, 구속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불 보듯 뻔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연루된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워할 상황에서 박씨는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

파면당하고 돌아올 때도 지지자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걸로 보아 박씨가 정상적인 멘탈의 소유자가 아닌 건 분명하지만, 이번의 해맑은 웃음은 뭔가 믿는 게 있다는 의심을 들게 한다. 아마도 그건 김수남 검찰총장을 필두로 한 검찰에 대한 신뢰에서 나왔으리라. 박씨가 살아있는 권력일 때 검찰은 박씨를 위해 봉사하는 충복이었으니까 말이다. 만일 특검이 연장됐다면, 그래서 특검의 조사를 받고 왔다면 아무리 멘탈이 비정상인 박씨라 해도 저런 여유 있는 모습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피의자인 박씨가 거절했다는 이유로 검찰의 권리인 영상녹화를 쉽게 포기한 것만 놓고 봐도 특검과 검찰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전에 검찰총장을 지냈던 채동욱이 특검연장이 안되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뇌물수수가 아닌 직권남용죄를 적용하는 데 그칠 수 있다”고 경고한 것도 그 때문이다.

특검연장이 안된 이유는 황교안 권한대행의 거부와 더불어 요청이 있으면 무조건 연장해준다던 약속을 깬 자유한국당의 배신 때문이다. 이들에게 가장 큰 비난이 퍼부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국회의장인 정세균이 특검연장법을 직권상정하면 30일 연장이 가능했는데, 정 의장은 야당 의원들의 거듭된 호소, 그리고 1만통에 달하는 시민들의 문자폭탄에도 불구하고 이 부탁을 거절했다. 그때가 직권 상태의 요건인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라는 게 그가 거절한 이유였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그때 상황이 비상사태가 아니라면 뭐가 비상사태인지 모르겠지만 정 의장은 완강했고, 결국 박영수 특검은 공소유지를 위해 필요한 인력만 남긴 채 해산되고 만다. 다들 알다시피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 신분을 내세워 특검의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만일 특검연장이 이루어졌다면 자연인이 된 박씨는 특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을 테고, 특검의 능력이라면 박씨가 죄를 실토하게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우병우와 김기춘, 안봉근, 이재만 등 나라를 망치는 데 부역자 역할을 한 이들이 단죄됨으로써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적폐청산’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지만, 샤우론의 군대가 먼지로 변하는 일은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국회의장의 존재이유도 따지고 보면 국민들이 원하는, 보다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정 의장은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정 의장이 호빗족 소년인 프로도의 반의반 정도만큼이라도 자신의 운명을 자각했다면 좋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정 의장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명분을 내세우며 직권상정을 거부한 그의 결단 덕분에 적폐청산은 물 건너갔고, 박근혜는 원래 보였어야 할 낭패감 대신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두렵다. 샤우론, 아니 박씨가 웃는 모습을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지도 모를 것 같아서.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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