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의 향원익청] 장군의 자격, 제주 4·3과 김익렬

곽병찬 2017. 3. 28.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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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군 수뇌부의 생각은 달랐다. 군정장관 정치고문은 제주도로 내려와 김익렬에게 매일 두세 시간씩 강경진압을 재촉했다. 진급과 보직 특혜는 물론 돈까지 제시했다. ‘민족반역의 대가로 호의호식하라는 것인가?’ 김익렬은 거부했다.

그는 1968년 중장으로 예편한 뒤 1969년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말미암아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마지막으로 들고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의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

2001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를 뒤지던 정부의 제주4·3위원회 진상조사팀(팀장 양조훈)은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덜컥 숨이 멎었다. 1948년 5월5일 오전 제주공항에서 촬영한 그 사진엔 미군정 장관 딘 소장과 통역, 맨스필드 제주 군정관, 유해진 제주지사,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성호 국방경비대 사령관, 제주 주둔 9연대 연대장 김익렬, 최천 제주 경찰감찰청장이 담겨 있었다. 제주의 운명을 가른 극비 회의의 참석자들이었다.

그날 오후 제주중학교 안 미군 방첩대 회의실. 제주 경찰감찰청장 최천이 먼저 보고했다. “(제주도 소요사태는) 제주도에 침투한 국제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폭동으로 현지 공산주의자들이 가담해 확산됐다”는 내용이었다. 김익렬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는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만행을 담은 사진 증거물과 각종 증언을 제시하며 경찰의 만행에 반발한 민중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딘은 당황했다. 자료를 조병옥에게 던졌다. “당신의 보고와 왜 이렇게 다른가.”

조병옥이 다짜고짜 김익렬을 빨갱이로 몰기 시작했다. “저기 공산주의 청년 한 사람이 앉아 있소. …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자는 부친의 지령에 의해 행동하고 있는 것이오.” 김익렬의 부친은 그의 나이 5살 때인 1925년 작고했으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저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나와 내 아버지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몰아?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김익렬이 조병옥의 복부를 걷어차고 멱살을 흔들었다. 말리려던 최천은 그의 발길질에 나뒹굴었다. 헌병에 의해 소란이 진정되는가 싶더니 안재홍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고 분하다, 분해. 이것이 다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 딘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튿날 김익렬은 해임됐고, 딘의 심복인 박진경 중령이 내려왔다. 그는 취임식에서 ‘자신의 부친은 대정익찬회(골수 친일파조직) 회원’이라며, “제주도민을 모두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폭동을 진압하겠다”고 밝혔다. 초토화 작전 선언이었다. 그건 미군정과 군정경찰 그리고 이승만 세력의 뜻이었다. 박진경은 그 후 한 달 동안 5천~6천여명의 주민을 체포했다. 대부분 무고한 시민들이었다. 그는 6월 중순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궁지에 몰려 있었다. 4월 중순 소련은 유엔에서 “(소련 관할의) 북쪽은 평온한데 미군정하의 남쪽에서는 폭정에 대항해 주민들이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그 좋은 예가 제주도의 폭동”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군정이 초토화 작전에 몸이 단 까닭이었다.

사실 제주도에선 1947년 초부터 소요사태가 악화일로에 있었다. 3월1일 경찰의 발포로 초등생과 젖먹이 엄마 등 6명이 희생되고, 3월10일 이에 항의한 총파업이 일어나 관공서 및 민간기업 종사자의 95%가 가담했다. 경찰은 1948년 2월까지 2500여명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은 빨갱이 혹은 밀무역 등의 혐의로 구금, 폭행, 약탈, 강간 등을 저질렀다. 3월엔 중학생이 포함된 시민 3명을 고문으로 죽였다. 민중은 분노했다.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11개 지서를 습격했다. 당시 무장대는 300여명 규모로 무기는 구식 일제소총 27자루와 권총 3정 그리고 죽창이 고작이었다. 이후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증파됐지만, 이들의 더 거친 만행은 입산자만 더 늘렸다. 이인 미군정 검찰총장은 이에 대해 “(미군정의 실정과 관리들의 부패로)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이 바늘로 터트린 것”이라고 진단했다.

궁지에 몰린 미국 정부는 딘에 대한 문책 논의와 함께 조속한 진압을 재촉했다. 사태의 성격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 일어난 폭동’으로 만들어, 소련의 입을 막도록 했다. 미군정은 4월17일 자체 경비만을 서고 있던 9연대에 진압 명령을 내렸다.

연대장 김익렬의 판단은 명확했다. 경찰과 서청의 만행이 원인인 만큼 ‘진압 작전에서 경찰을 배제하고, 선무 및 귀순 공작을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맨스필드 군정관도 동의했다. 그는 이미 협상을 통한 해결을 추진하고 있었다. 첫 협상 대표로 ‘극우파’ 유해진 지사를 지명했지만, 그는 회담 전날 급환을 핑계로 불참했다. 두 번째 대표 김정호 경찰토벌사령관 역시 회담 날짜가 되자 출장을 핑계로 서울로 튀었다. 세 번째 대표인 최천도 급병을 핑계로 회담을 피했다. 네 번째로 민족청년단장을 지명했지만,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김익렬은 다섯 번째 대표였다. 그는 박경훈 전 도지사 등 뜻있는 제주도 유지들의 협력을 받아 10여일 노력한 끝에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박 전 지사는 1947년 3·1발포사건에 대한 항의로 지사직을 내던진 이였다. 김익렬은 ‘전권’을 확약받은 뒤 가족 등에게 남기는 4통의 유서를 작성하고는 4월28일 오후 1시 무장대가 지정한 곳에서 김달삼을 만났다. 5시간 계속된 회담에서 그는 즉각 전투 중지, 무장해제 및 투항, 범법자 명단 제출(명기된 자 이외에는 수사와 심문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등의 합의를 끌어냈다. 이행을 보증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노모와 부인, 6달 된 아들을 무장대가 감시할 수 있는 민가에 머물도록 했다. ‘사실상의 인질’이었다.

하지만 미군 수뇌부의 생각은 달랐다. 회담을 추진하는 중에도 군정장관 정치고문은 제주도로 내려와 김익렬에게 매일 두세 시간씩 강경진압을 재촉했다. 김익렬이 거부하자 진급과 보직 특혜는 물론 돈까지 제시했다. 처음엔 5만달러, 나중엔 10만달러까지 액수를 늘렸다. 미국 이민 보장도 제안했다. ‘민족반역의 대가로 호의호식하라는 것인가?’ 김익렬은 거부했다.

합의 뒤 입산자들의 귀순과 하산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런데 5월1일 오라리에서 돌연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경찰과 미군은 서둘러 폭도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김익렬과 9연대 정보요원들이 현장조사를 벌인 결과는 정반대였다. 사건은 경찰의 지휘 아래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었다.

이틀 뒤 또 귀순자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 총격 사건이 벌어졌다. 드루스 9연대 고문관 등이 귀순자 200여명을 호송하며 제주읍 쪽으로 내려올 때였다. 현장에서 사로잡힌 제주경찰서 소속 경찰관은 드루스 대위에게 ‘폭도들의 귀순공작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지만, 김정호 경찰토벌대장은 폭도들의 소행이라고 잡아뗐다. 사로잡힌 경찰관은 이튿날 유치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미군 수뇌부는 외면했다. 따라서 5일 극비회의의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공식화하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김익렬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초토화라는 참극만은 막아야 했다.

그가 해임된 후 인구 30만명의 제주도에선 사망자 3만여명, 160개 마을 가운데 100여개 마을의 초토화, 소실된 가옥 2만여동 등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저항(존 메릴)과 학살이 일어났다. 김익렬은 이후 13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조병옥 등의 끈질긴 모함으로 쫓겨날 위기였지만, 군 동료들이 보내는 전폭적 신뢰를 미군정은 무시할 수 없었다. 13연대는 6·25전쟁 초기 서부전선에서 맨몸으로 북한군의 탱크와 맞서 남하를 저지했다. 그는 1968년 중장으로 예편한 뒤 1969년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제주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말미암아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마지막으로 들고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제주 군정관, 조병옥 경무부장, 군정청 장관 딘 소장 등 한 사람이라도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다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해결될 수 있었다. … 조병옥씨 이하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개인적으로는 고인이 된 이들의 죄상을 덮어두는 것이 인간적 예의라고 생각하나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의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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