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추적> 남성주류사회는 왜 '레깅스'를 박해하는가
26일(현지 시각) 오전 미국 유나이티드 항공사가 레깅스(면·스판덱스로 만든 몸에 꼭 맞는 타이츠)를 신고 덴버 국제공항에서 미니애폴리스로 가려던 10대 소녀 3명의 비행기 탑승을 막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미국 곳곳에서 불거졌던 ‘레깅스 논쟁’이 다시 불붙을 조짐이다.
유나이티드 항공사는 레깅스 소녀들의 탑승을 거부한 건, 당시 그들이 ‘직원용 탑승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직원 복장 규정’을 적용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한동안 냉전상태였던 레깅스 예찬론자와 반대론자의 설전(舌戰)이 SNS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다.
바지를 위협하는 뉴욕발(發) 레깅스 열풍
미국 사회에서 레깅스 논쟁이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 최근 1~2년 사이 일이다. 피트니스·요가할 때나 입던 쫄쫄이 운동복을 사무실과 공공장소에서도 입는 이른바 ‘애슬레저(Athleisure)’ 패션 트렌드가 식을 줄 모르고 있기 때문. ‘아디다스 바이 스텔라 매카트니’‘룰루레몬’ 같은 애슬레저 브랜드 매출은 고공행진 중이다.
데이터 분석기업 ‘슬라이스 인텔리전스’가 2015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미국 온라인 쇼핑 통계를 분석했더니, 미국 여성 소비자들이 지난해 중순부터는 아예 청바지보다 레깅스를 더 많이 구입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레깅스 열풍은 대표적인 ‘여초(女超)도시’ 뉴욕에서 시작돼 미국 북동부·중부 지역을 휩쓸었다.
그래서 논쟁도 불거졌다. “레깅스는 바지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내가 입을 옷은 내가 결정한다”는 반박의 대결구도다. 하반신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을 공공장소에서 입는 건 망측하다는 ‘불만세력’은 대개 남성이고, 레깅스 예찬론자 대부분은 젊은 여성이다. 이런 탓에 ‘레깅스 박해는 여성 억압’이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망측하다 vs. 레깅스 배격은 성차별
레깅스는 ‘남자들이 꼽는 최악의 여성 패션’에 어그부츠와 함께 단골로 등장해왔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선 ‘레깅스=바지’ 주장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를 검색해보니, ‘# leggingsarepants’(레깅스는 바지다)라는 게시물은 12만3000건, ‘#leggingsarenotpants’(레깅스는 바지가 아니다) 게시물은 5000건으로 나타났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해 10월 23일, 미국 북동부 로드아일랜드주(州) 배링턴의 한 마을에서는 수백명의 여성이 레깅스 입을 권리를 주장하는 ‘요가 팬츠 행진’ 시위를 했다. 쫄바지 시위는 한 60대 남성이 지역신문 배링턴타임스에 “요가 바지는 미니스커트 이후 최악의 여성 패션이다. 20세 이상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입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한 게 발단이 됐다.
‘쫄바지 혐오남’ 앨런 소렌티노(63)씨는 기고문에서 “다 큰 여성이 요가 바지를 입으면 어딘가 기이하고 심란하다”며 “20세 이상 여성이 요가 바지를 입는 건 역겹고 우스꽝스러우며, 보기 안좋다. 여성들은 철이 들어서 공공장소에서 요가 바지를 그만 입었으면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에 그 일대에 사는 수백명의 ‘쫄바지 예찬론자’ 여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우리는 입고 싶은 걸 입는다”는 피켓과 함께 쫄바지 상태로 거리를 점령했다. 요가 팬츠 퍼레이드 기획자 제이미 버크는 AP통신에 “여성들이 다른 이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옷을 입는다는 인식 자체가 일상적인 성차별주의를 반영하고,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드러낸다”고 했다.
미국 일부 중·고등학교에서는 엉덩이 부분이 그대로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고 등교하는 걸 금지하기도 했다. 메릴랜드주 찰스카운티의 한 공립학교에서는 지난해 11월 “가수 비욘세 뮤직비디오의 백댄서들이 입을 법한 레깅스 착용을 금지한다”며 “레깅스를 입을 거면 최소한 상의가 엉덩이를 덮어야 한다”는 규칙을 내세웠다가, 한 학부모로부터 교육청 진정을 당했다.
올해 1월 위스콘신주 케노샤카운티의 중학교에서도 ‘쫄바지 금지령’으로 지역 사회에 논쟁이 벌어졌다. 해당 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둔 한 어머니는 “쫄바지를 공공장소에서 못 입게 하는 것은 여성들이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얌전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성차별적인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라며 지역 통합 교육 위원회에 항의했다.
미국 최대 커뮤니티사이트 레딧에서는 얼마 전 ‘왜 남자는 레깅스 입는 여자를 싫어하느냐’고 묻는 게시물이 인기를 끌었다. 반대론자들은 “예의에 어긋난다” “사람들이 편하다고 수면바지를 입은 상태로 바깥에 돌아다니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 “여성의 노골적인 엉덩이와 하반신을 지켜보는 남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게 사실” “문제는 몸매가 안 좋은 여자들이 입었을 때 불쾌하다는 것” 등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반백살 쫄바지의 유구한 역사
이런 레깅스 패션의 역사는 50~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미니스커트를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디자이너 메리 퀀트, 화려한 프린트 디자인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에밀리오 푸치가 레깅스 상품을 소매시장에 내놓았다.
1970년대 영화 ‘그리스’의 주요 장면에서 여자주인공 샌디가 쫄쫄이 레깅스를 입고 나오며 이런 패션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디스코풍이 주류 패션를 강타하면서 ‘에어로빅복’처럼 생긴 쫄쫄이 운동복이 평상복으로 인기를 끌었다. 가수 마돈나도 ‘Like a Virgin’ 투어에서 미니 스커트 아래 검은 레깅스를 입었다.
1990년대 TV프로그램에 유명 연예인들이 다양한 색감과 질감, 디자인의 레깅스를 입고 나왔다.
2000년대 ‘아메리칸어패럴’이 화려한 레깅스 제품을 판매, 젊은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2010년대 에슬레져 패션이 전세계적인 유행으로 부상, 현란한 프린트의 쫄바지 제품이 사랑받고 있다. 덩달아 공공장소 레깅스 착용 논쟁도 불거지는 중이다.
레깅스 열풍이 2020년대에도 지속될까. 그때 되면 남성들도 즐겨 입을지 모를 일이다. 얼마 전부터 ‘남자가 입는 레깅스’라는 뜻의 ‘매깅스(meggings)’라는 단어도 등장했고, 최근 레깅스에 반바지를 받쳐입는 남성도 늘어나고 있다. 매깅스 트렌드가 대세가 된다면, 레깅스 논쟁은 더욱 심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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