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프로레슬링의 슈퍼볼, 레슬매니아가 온다 ①

조형규 2017. 3. 28.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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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세 번째 레슬매니아가 오는 4월 2일(미국 현지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올란도 캠핑 월드 스타디움에서 개최된다. (사진=ⓒWWE)

[몬스터짐=조형규 기자]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85년 3월 31일, 컴뱃 스포츠의 성지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역사의 새로운 주춧돌이 새겨지고 있었다.

무하마드 알 리가 조 프레이저에게 무릎을 꿇으며 생애 첫 패배를 거둔 지 14년 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또 다른 대결이 치러졌다. 바로 20세기 프로레슬링의 아이콘 헐크 호건과 드라마 A특공대의 배우 미스터 T, 그리고 종합격투기 파이터 론다 로우지에게 영감을 선사한 프로레슬러 로디 파이퍼와 폴 온도프의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린 것이다. 이 대결을 보기 위해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찾았다. 그리고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북미를 넘어 전 세계 프로레슬링 팬들에게 최고의 축제이자 프로레슬링의 슈퍼볼이라고까지 불리는 세기의 이벤트, ‘레슬매니아’는 그렇게 헐크 호건과 미스터 T의 승리로 거대한 역사의 서막을 열었다.

■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의 완벽한 결합체, ‘레슬매니아’

레슬매니아는 매년 화려한 무대를 선사하며 많은 볼거리를 낳는다. 사진은 숀 마이클스의 은퇴전이 된 레슬매니아 26 대회.  (사진=ⓒWWE)

오는 4월 2일(미국 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캠핑 월드 스타디움에서 서른세 번째 레슬매니아가 열린다. 레슬매니아는 전 세계 부동의 메이저 프로레슬링 1위 단체인 WWE가 개최하는 연간 최대 이벤트로, 1985년에 처음 열린 1회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쉼 없이 그 맥을 이어왔다. 북미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열린 최초의 전국구 대형 이벤트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며, 수입 측면에서도 단체의 1년 매출 중 10%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큰 대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레슬매니아는 WWE가 해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최고의 무대가 펼쳐진다. 이 대회를 위해 최고의 현역 선수들이 동원되는 것은 물론, 이미 은퇴한 추억 속의 전설들까지 소환되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르다 싶을 때는 복싱이나 농구 등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 활약하는 스타들까지 섭외해 특별 경기를 마련한다. 선수들의 경기장 입장 퍼포먼스를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폭죽이 소요되고, 톱 뮤지션들을 섭외해 현장에서 라이브로 등장곡을 연주해줄 정도로 화려한 스테이지가 펼쳐진다. 단순히 프로레슬링을 넘어 무대미술, 시각효과, 음악 등 다양한 분야와 결합하여 화려한 퍼포먼스가 연출되는,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가 결합된 프로레슬링 미학의 결정체가 바로 레슬매니아다.

하지만 레슬매니아가 갖는 가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거대한 이벤트는 WWE의 가장 큰 대회이자 동시에 미국 내 지역경제에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기점이 된다. 레슬매니아를 관람하기 위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프로레슬링 팬들이 이 시기에 긴 휴가를 계획하고 경기가 열리는 현장으로 운집하기 때문이다.

WWE는 해마다 레슬매니아가 열리기 1~2년 전부터 개최지 선정 작업에 착수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 내 많은 지자체장들이 레슬매니아를 모셔오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경쟁할 정도로 치열한 유치 전쟁이 펼쳐진다. 특히 지난해 텍사스주 알링턴 AT&T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레슬매니아 32는 무려 101,763명(실제 집객 규모는 94,000명으로 알려져 있다)의 관객을 동원하며 단체 역사상 최다 관중 동원 기록을 갱신했는데, 알링턴시는 이를 통해 1억 5000만 달러가 넘는 경제 효과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WWE의 전신 CWC, 북미 프로레슬링의 프랜차이즈 NWA에 반기를 들다

WWE의 전신인 CWC의 간판 스타였던 버디 로저스는 1963년 루 테즈와의 대결에서 패배한다. 하지만 CWC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곧 NWA를 탈퇴하며 WWWF로 단체명을 변경한다. (사진=ⓒWWE)

사상 첫 레슬매니아는 1985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렸다. 하지만 그 기원을 살펴보려면 시계추를 조금 더 앞으로 돌려야 한다. 레슬매니아의 시작은 미국 내 프로레슬링 이벤트를 전국구로 확대하겠다는 야심이 그 유래였는데, 이러한 노선은 WWE의 전신인 CWC(Capitol Wrestling Corporation, 캐피톨 레슬링 코퍼레이션)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과거 북미 프로레슬링 시장은 NWA(National Wrestling Alliance, 국제레슬링연맹)에 의해 주도되어왔다. 1948년에 창설된 NWA는 중앙 연맹으로 일종의 프랜차이즈 개념을 띄고 있었다. 연맹에 가입된 단체들은 자신의 지역구를 존중받으며 안정적인 운영을 보장받았으나, NWA는 가입하지 않은 단체들에게는 철저히 배타적으로 대응했다. 상당히 보수적인 운영 시스템이었다.

빈스 맥마흔의 조부인 로드릭 제임스 맥마흔이 1953년 출범시킨 CWC도 처음에는 NWA에 소속된 미국 북동부 지역 단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부터 NWA가 내세우는 일종의 통합 챔피언 자리인 NWA 월드 타이틀을 두고 이해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초기 NWA의 권력은 현대 프로레슬링의 기틀을 마련한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루 테즈가 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장기집권이 연맹 분열의 단초가 됐다. 가장 먼저 불만을 제기한 건 AWA(American Wrestling Association, 미국 레슬링 연맹)였고, CWC 또한 이러한 흐름에 즉각 동참했다. 특히 CWC는 버디 로저스라는 막강한 스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1963년 1월 캐나다 토론토 메이플 리프 가든에서 열린 NWA 월드 타이틀전에서 로저스가 루 테즈에게 패배한 것을 계기로 연맹을 탈퇴한다. 그리고 곧 단체명을 WWWF(World Wide Wrestling Federation, 세계 레슬링 연맹)로 바꾸고 로저스를 초대 챔피언으로 임명했다.

WWWF를 이끌던 빈스 맥마흔 시니어(현 WWE 회장 빈스 맥마흔의 아버지)는 새로이 바꾼 단체명에서도 드러나듯, 노골적으로 프로레슬링의 전국구 흥행 개최를 지향했다. 이후 WWWF는 1979년 우리에게도 익숙한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로 단체명을 다시 바꾸었고, 3년 뒤 빈스 맥마흔 시니어는 회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WWF의 새 소유주는 아들인 빈스 맥마흔이 됐고, 아버지를 능가하는 야심가였던 그는 서서히 프로레슬링의 전국 대회 개최를 위한 설계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 프로레슬링의 슈퍼볼을 꿈꾼 빈스 맥마흔

우리에게 빈스 맥마흔으로 잘 알려진 빈센트 케네디 맥마흔 주니어는 1982년 WWF의 실소유주가 되면서 프로레슬링 무대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공격적인 전략을 펼쳤다. (사진=ⓒWWE)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 1982년부터 WWF의 오너가 된 빈스 맥마흔은 큰 리스크를 감수하며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적극적인 선수 영입에 나섰다. 특히 이 시기에 AWA로부터 헐크 호건을 영입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프로레슬링이라는 종목 자체를 상징하는 아이콘인 호건은 당시 영화 ‘록키’ 3편에 출연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이를 기점으로 WWF는 지미 스누카, 돈 무라코, 아이언 쉬크, 니콜라이 볼코프, 리키 스팀보트 등 당대 최고의 프로레슬러들을 모두 합류시켰다.

WWF는 이렇게 끌어온 선수들을 자신들의 지역구인 뉴욕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곧 미국 전역을 돌며 흥행을 개최했고, 단체의 명성은 점차 뉴욕을 넘어 미국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빈스 맥마흔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와의 인터뷰에서도 “과거 미국의 프로레슬링은 30개의 조그마한 왕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권리를 존중했지만, (그게 지속되었다면) 분열된 30개의 왕국들은 여전히 고생하고 있었겠죠” 라며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WWF의 공격적인 투자는 명성을 얻은 대신 재정의 붕괴를 야기했다. 전국 규모의 흥행 개최는 막대한 자본이 필수적이었고, 무리한 확장을 이어나가던 WWF는 자금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빈스 맥마흔은 큰돈을 쥘 수 있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시작한다.

레슬매니아의 기획은 이렇게 회사의 자금난을 타개하면서 동시에 그토록 염원하던 프로레슬링의 초대형 전국 대회를 현실화 시키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빈스 맥마흔은 프로레슬링의 연간 최종 결승전을 구상했고, NFL의 슈퍼볼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했다. NFL의 결승전인 슈퍼볼은 단순히 경기에만 그치지 않고 문화 산업 전반에 걸쳐 다양한 이벤트가 곁들여지며 화제를 낳곤 하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노린 것이다.

물론 과거 NWA에도 슈퍼 흥행의 개념을 띈 ‘스타케이드(Starrcade)’라는 이벤트가 있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의 슈퍼볼을 만들고자 했던 빈스 맥마흔은 스타케이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레슬매니아를 기획하며 ‘프로레슬링을 보지 않는 일반 대중에게도 하나의 문화 이벤트로 정착시켜 매년 챙겨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 기획은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 프로레슬링의 역사적 순간에는 항상 레슬매니아가 있었다

1985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제1회 레슬매니아의 메인이벤트는 헐크 호건과 미스터 T 대 로디 파이퍼와 폴 온도프의 2대 2 태그 경기였다. 이 경기는 현재까지 레슬매니아의 메인이벤트를 태그 경기가 장식한 유일한 사례다. (사진=ⓒWWE) 

1984년 WWF의 아나운서였던 하워드 핑클의 제안에 따라 ‘레슬매니아’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동시에 당대를 주름잡던 슈퍼스타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던 빈스 맥마흔은 이제 프로레슬링 바깥 카테고리에서도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전설적인 프로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특별 심판으로 초청됐고, 팝스타 신디 로퍼를 섭외하며 MTV와도 계약을 맺고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결정타는 메인이벤트였다. 당시 드라마 A특공대를 통해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미스터 T는 헐크 호건과 팀을 이뤄 2대 2 태그 경기에 나섰는데, 이 시합이 메인이벤트로 배정된 것이다. 최고의 프로레슬링 스타와 스크린 배우의 조합은 빈스 맥마흔이 그토록 강조하던 거대한 문화 이벤트를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1985년 3월 31일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펼쳐진 첫 레슬매니아는 총 19,121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고, 이를 기점으로 북미 프로레슬링 시장의 주도권도 완벽하게 WWF에게 넘어갔다.

빈스 맥마흔이 기획한 레슬매니아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뒀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기획을 밀어붙였고, 프로레슬링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WWF에게 큰 수익을 안겨준 것은 물론이고, 표면적인 경제적 성과를 넘어 단체의 이름이 프로레슬링의 대명사로 치환될 만큼 브랜드 가치도 커졌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은 WWF는 레슬매니아에 큰 상징성을 부여하며 점차 세계 프로레슬링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이후 레슬매니아는 마이크 타이슨, 조 프레이저, 도널드 트럼프,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 샤킬 오닐, 론다 로우지 등 분야를 넘나들며 스포츠 스타들을 등장시켜 화제를 낳았다. 동시에 프로레슬링 본연의 임무에도 충실해서, 매번 명경기를 탄생시키며 숱한 드라마를 써내려갔다.

1990년 당시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이었던 얼티밋 워리어는 캐나다 토론토 스카이돔에서 열린 레슬매니아 6에서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헐크 호건에게 도전해 승리를 거둔다. 국내 팬들에게도 종종 회자되곤 하는 추억의 경기다. (사진=ⓒWWE)

1987년 미국 미시건주 폰티악 실버돔에서 열린 세 번째 레슬매니아는 지금도 프로레슬링 역사의 가장 중요한 기점으로 평가받는 헐크 호건과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WWF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이 치러진 대회다. 호건이 230kg의 거인을 메치는 기념비적인 장면을 연출했던 이 날은 무려 93,173명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운집했고, 29년 동안 최다 관중 동원 기록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또한 1990년 캐나다 토론토 스카이돔에서 열린 레슬매니아 6은 당시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이었던 얼티밋 워리어가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인 호건에게 도전했는데, 선의의 경쟁이라는 구도를 통해 감동적인 승리를 쟁취했다. 1994년 레슬매니아 10에선 작은 체구의 브렛 하트가 거구의 요코주나를 꺾고 챔피언에 올라 언더독의 신화를 썼다. 그리고 정확히 2년 뒤, 숀 마이클스는 그 브렛 하트를 상대로 60분간 사투를 벌이며 멋진 그림을 만들었다.

이처럼 프로레슬링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는 항상 레슬매니아라는 배경이 있었다. 최고의 라이벌로 회자되는 스티브 오스틴과 더 락의 치열한 대결 구도도, 130kg의 거구인 브록 레스너가 전방으로 점프하며 몸을 270도 회전시키는 엄청난 공중기술을 펼친 것도, 존 시나가 차세대 아이콘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도 모두 레슬매니아라는 무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지켜보는 팬들의 시선은 어느덧 오는 4월 3일(한국 시간)의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캠핑 월드 스타디움을 향하고 있다.

▶금주 내로 출고될 레슬매니아 특집 2부로 이어집니다.

[사진] ⓒWWE
조형규 기자 (press@monstergrou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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