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배의 생각하는 여행] 화장의 역사를 바꾼 두 여인

박진배 뉴욕 FIT 교수·디자인 2017. 3. 2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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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뮤지컬 '워 페인트' 주인공 아덴과 루빈스타인은 화장품 산업 개척한 두 여성
美에 새 의미 부여하고 여성의 사회진출 길 닦은 벤처 사업가로 기억될 것

여행 중 짬을 내 관람하는 공연은 그 느낌 자체가 색다르다. 여행은 압축된 인생을 경험하는 것인데, 공연은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세상으로 작은 여행을 시켜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워 페인트(War Paint)'라는 뮤지컬이 시작됐다. 1920년대부터 1960년대를 풍미했던 화장품 산업의 개척자 엘리자베스 아덴(Arden)과 헬레나 루빈스타인(Rubinstein)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이 둘은 뉴욕에서 가장 번화하던 5번가에 상점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라이벌 의식 때문에 서로 만나지는 않았다. 제목 '워 페인트'는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전쟁에 나가기 직전 얼굴 등에 분장하던 전통에서 유래한 말이다. 단어가 암시하듯 이 작품은 전쟁만큼 치열한 비즈니스의 세계와 페미니즘을 주제로 다룬다. 당대의 사회적 편견과 싸우면서 새로운 규칙을 찾고자 했던 두 여인의 스토리가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된다. 극을 통해 우리는 한 세기 전 뉴욕을 여행한다. 코튼 클럽(Cotton Club)이나 킹 콜 바(King Cole Bar)와 같은 유서 깊은 뉴욕의 명소들이 반갑게 등장한다. 각각 토니상을 두 번씩 받은 패티 루폰(LuPone)과 크리스틴 에버솔(Ebersole)이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친다. 노년에 접어든 배우들의 열연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공연 내내 극장에 긴장감과 에너지가 넘친다. 5분에 한 번씩 바뀌는 주인공들의 의상 또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화장은 외모를 돋보이게 하거나 바꾸기 위한 분장이다. 희미한 녹색 눈을 유혹적인 에메랄드 빛으로 치환하는 마술이다. 화장은 여성을 약하게도 만들고 강하게도 만든다. 매우 복잡하지만 또 매우 부드러운 과정이다. 화장의 역사는 페미니즘의 역사이기도 하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화장은 창녀나 나이트클럽 무희들만 하던 것이었다. 1920년대부터 할리우드 배우들이 화장을 했고, 영화에서 클로즈업 기법이 유행하면서 일반인들에도 조금씩 퍼져 나갔다. 초기에는 그저 하얗고 창백한 얼굴을 만들고자 하는 분칠에 불과했다. 이는 밖에서 햇볕을 받으며 일하지 않아도 되는 귀족의 피부색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눈빛까지 쓸쓸하다면 완벽한 귀족 여인 이미지가 되곤 했다.

이처럼 화장이란 개념이 희박하던 시기에 이 두 여인은 각자 살롱을 열고 화장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오늘날과 같은 헤어살롱이나 뷰티살롱이 아니었다. 외모를 아름답게 하는 것뿐 아니라 고객의 예술과 색채에 관한 취향의 수준을 높여주고, 본인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거실이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당시 상류사회의 징표였다. '못생긴 여자는 없다. 게으른 여자만 있을 뿐이다'는 슬로건 아래 미국인들에게 눈과 입술, 얼굴을 어떻게 칠해서 매력을 창조하는지 가르쳤다. 화장의 힘으로 강하고 전문적인 여성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아덴의 화장이 다양한 여성의 직업을 만들었다'는 표현처럼 화장과 더불어 여성들은 당당하게 사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브랜드로만 인식되지만 당시에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건 회사를 운영했던 단 두 명의 여성이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여성이기도 했다, "하루에는 24시간밖에 없지만 나는 50시간을 일한다"는 루빈스타인의 말처럼 이들은 치열하게 살았고, '여성은 불안정하다'는 사회 통념과 맞서 싸웠다. 당시 여성들은 큰돈을 소유하는 건 괜찮지만 직접 돈을 버는 것은 금기시됐다. 그것은 싸구려 직업여성들이나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시대의 기존 규범에 굴복하지 않았다. 힘든 시절을 겪었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것을 완성함으로써 자유를 얻었고 새로운 질서를 개척했다. 이들이야말로 벤처 사업가였고, 여성에 대한 시대적 편견과 유리천장을 깨트리려 했던 진정한 페미니스트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시대 조류와 타협하지 않는 당당함이었다. 후에 레블론(Revlon)이나 에스티로더(Estee Lauder)가 등장할 무렵 저가 상품의 대량 판매, TV 광고 등으로 시장이 변화하기 시작할 때도 이들은 자존감을 잃지 않았다. "어떻게 수퍼마켓에 내 상품을 공급하나?"라며 대중화를 거부했다. 거기에는 자신이 만드는 상품에 대한 긍지와 무한한 존경이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부가 가치가 된다는 믿음이 있었고, 이를 몸소 실현했다. 어느 분야의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제시된 라이프 스타일이 세계인의 가치 기준이 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아덴과 루빈스타인은 화장의 의미와 가치 기준을 설립했다. 그리고 그 이름은 고유명사가 됐다.

극 중에 아덴은 말한다. "모든 여성의 얼굴에는 자신의 스토리가 새겨져 있다." 극 중에 루빈스타인이 이야기한다. "깨끗하고 완벽한 화장에 진실이 있고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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