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트라우마에 목숨 끊은 현장근무-구조 인력.. 아내들의 사부곡 2題

2017. 3. 2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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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잊지 않겠습니다” 팽목항 추모 발길 세월호 참사 1077일째, 인양된 선체가 반잠수식 선박 화이트말린에 실린 지 사흘째인 27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을 찾은 추모객들이 방파제에 서 있는, 노란 리본이 그려진 빨간 등대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진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 “경찰남편 명예 지켜… 딸아이 긍지 갖게할것” 故김모 경감 가족의 ‘길고 긴 소송’ 수습업무 스트레스 호소하다 투신… 연금공단 순직 인정안해 소송 “2심도 꼭 이겨 오해 씻을것”

“형이라고 부르며 밤낮으로 우리를 챙겼었는데….”

꿈에도 그리던 세월호 인양을 눈앞에서 지켜본 미수습자 권재근 씨의 친형 권오복 씨(63)는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때 전남 진도경찰서 정보보안과 소속으로 팽목항에서 근무했던 김모 경감(당시 49세)이다. 김 경감은 2014년 6월 26일 진도대교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9일 뒤 숨진 채 발견됐다.

3년 가까이 지났지만 미수습자 가족들은 김 경감을 잊지 않고 있다. 당시 김 경감은 유가족 곁에서 일하고 있었다. 시신 발견 소식을 유가족에게 전하고 반대로 유가족의 의견을 정부 측에 전달하는 업무를 주로 맡았다. 처음 유가족들은 김 경감을 ‘정보과 형사’라며 피했다. 하지만 유가족 및 미수습자 가족과 함께 아파하는 모습에 ‘형’ ‘오빠’라고 부르며 믿고 따랐다.

하지만 밤낮 없이 현장근무를 하며 김 경감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유가족도 직접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시신을 대신 보고 온 뒤 상태를 설명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유가족들은 김 경감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김 경감은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인 ‘헬리콥터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손발이 떨렸다. 동료에게 “나 좀 (업무에서) 빼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무원연금공단은 2014년 9월 김 경감의 죽음이 업무와 관련 없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특진심사에서 탈락한 김 경감이 과음한 게 투신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자살의 경우 업무 스트레스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김 경감은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고, 유가족은 보상금도 받지 못했다.

김 경감의 부인 김모 씨(44)는 2014년 12월 소송을 제기했다. 1년 6개월이 지난 2016년 6월 서울행정법원은 김 경감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라고 판결했다. 김상훈 변호사는 “법원은 당시 김 경감이 업무상 스트레스로 중증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판단한 국립나주병원의 소견서를 바탕으로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김 경감의 순직 여부는 공무원연금공단의 항소로 결정이 미뤄졌다. 그리고 다음 달 7일 서울고법에서 다시 가려질 예정이다. 김 씨는 “열한 살 딸에게 아빠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경찰이었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 “트레이닝복 매장 피해다니던 남편 모습 선해” 故김관홍 민간잠수사의 부인

“남편이 들려준 얘기보다 훨씬 처참하네요.”

약 3년 만에 인양된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를 기다리는 김혜연 씨(39)의 심경도 남다르다. 김 씨는 2014년 사고 해역에서 민간인으로 자원해 수색작업에 참여했던 고 김관홍 잠수사(당시 43세)의 부인이다. 김 잠수사는 지난해 6월 트라우마와 부상 후유증 등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월호 인양 소식을 접한 후 김 씨 역시 처음에 실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3년 만에 떠오른 세월호를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남편이 설명했던 세월호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김 씨는 “남편은 ‘더듬어 가면 지금도 찾을 수 있다. (선체가) 옆으로 누워있어도 자기가 가던 길이라 배 모양을 다 안다’고 말했었다”며 “어디를 더 수색해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했다.

희생된 학생을 향한 김 잠수사의 감정은 특별했다. 그는 평소 트레이닝복을 입은 아이들만 봐도 희생된 아이들을 떠올렸다. 김 씨는 “희생된 아이들 절반 이상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고 남편이 말했다”며 “거리에서 같은 트레이닝복을 파는 매장을 지날 때면 지나가고 싶지도 않다고도 했다”고 설명했다.

김 잠수사는 세월호 수색과정에서 입은 몸 곳곳의 부상으로 잠수를 하지 못한 채 대리운전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유가족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세월호 관련 국정감사나 청문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 증언했다. 세월호 인양 후 김 잠수사가 청문회에서 “나는 잠수사이기 이전에 국민이다. 국민이기 때문에 달려간 것이다. 내 직업이, 내가 가진 기술이 그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간 것일 뿐이다. 애국자나 영웅이 아니다”라고 말한 내용이 다시 조명을 받기도 했다.

진도=이호재 hoho@donga.com·신규진 기자 정동연 기자·ca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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