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박 전 대통령 구속영장과 방송 못 한 일본 인터뷰

최호원 기자 2017. 3. 27.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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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드디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구속 영장을 청구했습니다. 검찰이 이번 기회에 정치검찰이라는 오명을 조금이라도 씻어내길 바랍니다. 정치 권력에 대한 수사라면 사실 일본 검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난해 11월 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2차 대국민 담화 직후였습니다.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습니다." 저는 곧바로 섭외에 들어갔습니다. 1976년 일본 록히드 사건을 수사했던 옛 도쿄지검 특수부 검사를 찾은 겁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까지 체포했던 도쿄지검 특수부. 홋타 쓰토무 사와야카복지재단 회장은 핵심 수사 검사였습니다.

취재진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홋타 쓰토무 회장

인터뷰는 섭외 2주일 뒤인 지난해 11월 28일에야 이뤄졌습니다. 인터뷰 장소는 홋타 회장의 법무법인 사무실이었습니다. 첫 인상은 그냥 동네 할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록히드 사건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자 과거 '면도날'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40대 검사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록히드 수사는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시작됐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74년 8월 미국 닉슨 대통령이 사임을 합니다. 홋타 검사는 주미 일본대사관 1등 서기관이었습니다. 1958년 교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61년 검사 부임, 67년에는 오사카지검 특수부에서 지역 택시협회의 국회의원 로비 사건을 적발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온 그야말로 엘리트 검사였습니다.

1975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각 기업들이 지원한 닉슨 측 대선자금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록히드 사의 국제 로비 실태가 드러난 겁니다. 1976년 2월 5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 소위원회는 관련 청문회를 엽니다. 록히드의 칼 코찬 부회장(아래 사진)은 청문회에서 "비행기 판매를 위해 일본 고위직에 돈을 건넸다"고 폭로합니다.

사건 10년 전 칼 코찬 록히드 부회장

일본 언론들은 이 소식을 속보로 전합니다. 홋타 검사는 당시 귀국해 도쿄지검 특수부에서 근무 중이었습니다. 2월18일 검찰 수뇌부의 첫 회의가 열립니다. 후세 다케시 당시 검찰총장은 "국민의 기대가 높다. 검찰의 위신을 생각할 때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수사하라"고 지시합니다. 홋타 검사도 이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4월 뇌물 명단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록히드 수사 당시 홋타 검사(당시 43살)

하지만, 명단 확보는 쉽지 않았습니다. 코찬 부회장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홋타 검사는 미국 검사를 통해 코찬 부사장을 대신 심문하기로 합니다. 이른바 촉탁 심문입니다. 7월 6일부터 촉탁 심문이 시작됐습니다.

홋타 검사가 미국 검사에게 메모를 전해 심문하는 방식입니다. 코찬이 털어놓은 진술 내용은 일본에서 이미 수사를 받고 있던 뇌물 관계자들에게 큰 부담이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일본 로비업체였던 '마루베니'의 간부들이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7월 27일 오전 6시 반 특수부 검사들은 다나카 전 총리의 자택을 찾아갑니다. 다나카 전 총리는 사임 후에도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후임 미키 총리를 포함해 내각 각료들도 좌지우지할 정도였습니다. 홋타 회장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하지만, 진상을 밝히지 않으면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검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검찰 내에 수사 경쟁도 있었다. 보안을 위해 체포 바로 전날까지 법무대신에게도 숨겼습니다. 법무대신은 내각 각료이기 때문에 자칫 부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홋타 검사의 젊은 날 별명은

오전 7시 반 다나카 전 총리가 도쿄지검으로 끌려오자 일본 언론들은 난리가 납니다. 다나카 전 총리는 83년 1심, 87년 2심에서 모두 징역 4년을 선고받습니다. (홋타 검사는 1심 공판 검사로 나서 다나카 전 총리를 직접 심문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뇌경색이 겹치면서 89년 정계를 은퇴합니다. 그리고, 최고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 전 지병으로 숨집니다.

수사를 받고 돌아가는 다나카 전 총리

홋타 검사는 이후 법무성 관방장(국장급)을 끝으로 1991년 11월 검찰을 떠납니다. 이후 몸을 던진 곳은 뜻밖에 자원봉사 분야였습니다. "미국에서 근무할 때 자원봉사자들을 보면서 '아, 정말 따뜻한 사회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도 그런 사회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1990년대 초 일본에서도 자원봉사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점점 수사 현장에서 멀어지면서 슬슬 그만 둘 때가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그만 둘 타이밍에 제대로 그만 둔 겁니다."

홋타 회장은 사와야카 복지재단을 만든 뒤 '시간제 노인 간호 제도'를 만들고, '자원봉사자에 대한 사례' 개념도 정리합니다. 그 공로로 각종 상도 수상했습니다. 1999년에는 '벽을 부수고 나가라!-록히드 사건에 대한 개인 기록'(한국 출간명: 특검, 넘지 못할 벽은 없다)이라는 책을 출간해 숨겨진 이야기들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벽을 부수고 나가라-록히드 사건 개인 기록 (1999년)

하지만, 홋타 회장의 인터뷰는 결국 방송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박 전 대통령의 검찰 수사에 맞춰 방송을 준비했는데, 박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거부한 겁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죠. 박 전 대통령은 탄핵 후 이달 21일에서야 검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한 번 타이밍을 놓친 제 리포트는 결국 방송되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일본 록히드 사건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권력과 검찰의 관계도 고민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홋타 회장의 인생도 흥미로웠습니다. 홋타 회장은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각종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인터넷에는 아래와 같은 홋타 회장의 명언들이 돌고 있습니다.

-사람은 보통 자신의 능력을 30% 크게 보고, 남의 능력은 30% 낮게 본다.
-유능하다고 해서 끝까지 그 부하를 놓아주지 않은 사람은 잔인한 이기주의자일뿐이다.
-내가 재단 이사장이지만, 내가 결제하지 않는다고 진행되지 않는 일은 없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가려는 열정을 갖고, 친구들을 만들고,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상하관계나 직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생명은 정말 우연히 태어나는 것이다. 필연성이 있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된다는 필연성은 없다. 살아가는 의미는 자신이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운명을 맡긴다는 것은 정말 불안한 상태입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운명을 되찾아오는 것 말고는 탈출법이 없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미방 리포트였지만, 그나마 이런 글로 다른 분들에게 전해봅니다.       

최호원 기자bestiger@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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