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는 '제왕적 대법원장제'.. 자기 목소리 못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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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인권법연구회(연구회)의 세미나에서 드러난 현직 법관들의 독립성에 대한 인식은 법조계의 비상한 관심만큼 놀라웠다. 일선 판사 10명 중 9명은 대법원장이나 법원장 등의 정책에 반대할 경우 승진이나 인사 평정 등에서 불이익을 당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급심 판례와 다른 판결을 내릴 경우 불이익을 당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판사도 절반에 가까웠다.
“대법원장 중심의 피라미드 구조”
25일 연구회가 주최한 ‘법관 독립 확보를 위한 법관인사제도의 모색’ 세미나에서 발표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선 법관의 88.2%(443명)가 ‘대법원장 등 사법 행정권자의 정책에 반하는 의사표현을 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답변했다. 상급심 판결에 반하는 판결을 하거나, 주요 사건에서 정부나 특정 정치 세력의 정책에 반대되는 판결을 내릴 경우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법관의 비율은 각각 47.0%(236명), 45.3%(227명)였다. 전국 법관 2900여명 중 약 17%(501명)이 설문조사에 응답한 결과다.
‘법관들이 자신이 속한 법원장의 권한을 의식하고 있다’고 답변한 판사의 비율은 91.6%(458명)였다. ‘법원장의 어떤 권한이 신경 쓰이느냐’는 질문에 판사들은 인사평정 권한과 법원 내 사무분담·사건배당 결정권, 해외연수 선발 추천권 등을 주로 꼽았다.
이러한 인식의 원인은 법원 내 인사(人事) 제도에 기인한다는 게 연구회 측 주장이다.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주요 정치인·재벌 등의 사건은 대부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부와 형사합의부를 거친다. 지난 2월 법원 정기 인사에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부와 형사합의부에 소속된 법관은 각각 66%, 77%가 법원행정처나 대법원 재판연구관 경력자였다. 민사합의부는 39%에 불과했다. 2013∼2017년 중앙지법 형사합의부 선거·부패 전담 재판부 16명 중 법원행정처나 대법원 재판연구관 경력이 없는 법관은 한 명도 없었다. 김영훈(43) 판사는 “법원장이 법관의 성향이나 성격 등을 가려 요직에 등용한다는 인상을 준다는 우려가 있다”고 했다.
김 판사는 “우리 사법부는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상하 위계질서가 꽉 잡힌 피라미드 모양을 형성한다”며 “그래서인지 판결 성향도 비슷하고 좀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법관들이 대부분이다”고 했다. 또 “어떤 법관은 ‘법원 내부 전산망에 댓글을 달고 싶은데 겁이 난다. 용기내서 댓글을 달았는데 다른 댓글이 안 올라와서 미치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었다”며 법원 내부의 경직된 분위기를 우회적으로 전했다.
연구회 소속 차성안 전주지법 군산지원 판사는 “모든 판사들의 전국 단위 인사권, 법원장·고등법원 부장 승진 인사권, 대법관 제청권 등 인사 권한만 살펴봐도 ‘제왕적 대법원장제’라는 용어가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세미나에서는 연구회 소속 A판사의 겸임해제 발령 의혹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퇴직과 관련한 의견도 나왔다. 김 판사는 “법원 내부에서는 ‘대법원장 임기 만료를 노린 것이다, 보혁 갈등이다’라는 의견도 있지만, 이번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됐던 것”이라며 “토론을 겁내지 않는 법원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설문조사의 내용 등에 있어 연구회 등의 지시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며 “설문조사에 문제가 있어 책임을 질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뿐”이라고 했다. A판사는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았다.
제왕적 대법원장제, 해법은?
연구회 측은 이른바 ‘제왕적 대법원장제’에 대한 5가지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차 판사는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는 상근 판사들을 3∼5년 과도기를 거쳐 모두 없애고 미국 연방법원 행정처처럼 법률전문가와 법관이 아닌 직원으로 채우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법원장과 행정처가 독점하던 사법정책 결정 권한을 전국 30여개 법원에서 일선 법관들이 선거로 선출한 대표로 구성된 ‘전국 법관 대표회의’를 만들어 넘겨주면 된다는 주장이다.
차 판사는 “법원장의 대표적 권한은 사무분담권”이라며 “이를 법원장이 아닌 선거로 구성한 법원 단위 판사회의 운영위원회에 넘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법관 관료화를 심화시킨 지방법원 부장판사-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를 폐기하고 지법-고법 이원화를 명문화하도록 법원조직법을 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글=양민철 이경원 기자, 그래픽=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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