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5%의 방어

2017. 3. 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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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는 흥미로운 주장이 하나 있다.

독서환경이 급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일본 인구의 5% 정도는 충성도가 높은 문학 독서 인구라는 믿음이다.

일본의 인구를 대략 1억2천만명 정도로 산정하면(사실은 더 많다), 하루키가 말하는 충성도가 높은 독서 인구는 600만명 정도가 될 것이다.

일본의 독서 풍토와 한국이 다르기는 하지만, 기계적으로 한국의 문학 독서 인구 역시 동일하게 5%라 가정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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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명원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는 흥미로운 주장이 하나 있다. 독서환경이 급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일본 인구의 5% 정도는 충성도가 높은 문학 독서 인구라는 믿음이다. 소설가가 직업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예술적 노동에 대한 시장의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장편소설 1권을 쓰기 위해서는 최소 1년여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사실상 이 기간 동안 작가는 글쓰기와 퇴고에 몰입하기 때문에 여타의 경제활동에 참가하기 어렵다. 만일 출간된 소설이 시장에서 명백한 반응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작가는 그가 회피하고자 했던 여러 사회적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

일본의 인구를 대략 1억2천만명 정도로 산정하면(사실은 더 많다), 하루키가 말하는 충성도가 높은 독서 인구는 600만명 정도가 될 것이다. 판매량의 측면에서 성공적인 작품을 쓸 수 있다고 가정하면, 이 정도의 독자 규모면 전업작가로서의 삶은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모든 작가가 다 하루키 식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플랫폼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작가의 동기유발 요인 측면에서도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본의 독서 풍토와 한국이 다르기는 하지만, 기계적으로 한국의 문학 독서 인구 역시 동일하게 5%라 가정해 보자. 총인구 5100만명의 5%면 255만명 정도가 문학의 잠재독자라고 가정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전업소설가가 이 잠재독자의 수요를 모두 충족시키는 작품을 쓴다면, 일본보다는 시장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한국에서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가능한 일이 된다.

물론 오늘의 한국 소설시장을 보면, 과연 그게 가능한 건가 회의적인 시선을 펼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들이 시장에서 어필하기보다는 여전히 번역된 외국소설이 수년째 베스트셀러 순위의 상위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된 외국소설도 한국문학은 아니지만 소설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한국의 문학시장이 활력을 상실한 것은 소설이나 문학에 대한 기대가 상실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한국소설의 지배적 경향이 대중들의 독서 취향의 변화와 미스매칭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의 분석이 요구된다.

95%의 시민들이 설사 소설을 읽지 않더라도, 이 5%의 독자층만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일단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책읽기의 습관, 혹은 체화된 감각이 중요하다. 유년 시절부터 책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해 본 체험이 있는 사람은 성장기를 경과하면서 여러 즐거운 매체와 문화적 환경과 접촉하게 될지라도, 체화된 책읽기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형태의 현실적 압력, 증대되는 미래의 불확실성, 불가해한 인간관계의 피로감에서의 상상적 해방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책 속의 상황과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 혹은 여러 형태의 독자적 사고실험을 통해 일상의 질서를 중지시키는 효과가 있다. 다소 과장하자면 책읽기란 사회적 명령에 대한 ‘위대한 거부’의 한 형태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거부’를 노골화하지 않는다. ‘순응’이야말로 사회적 관계의 지배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책읽기라는 사고실험을 통한 비순응과 거부는 다른 세계에 대한 강인한 의욕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물론 평생 소설만 읽는 독자는 없다. 그러나 읽을 만한 소설을 찾는 독자는 어디에나 있다. 이런 5%의 독자를 방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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