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ㄱㄴㄷ부터 가르치겠다더니.. 갓 입학한 초등생에 "짝에 대해 써볼까요"

송혜진 기자 입력 2017. 3. 25. 03:03 수정 2017. 3. 25.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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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適期 교육한다면서 여전히 혼란스러운 교육현실

"연필 쥐는 법부터 학교가 가르치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우리가 어리석었던 건가요?"

초등학교 1학년 딸을 둔 윤상현(35)씨는 지난 21일 아내 대신 학교 공개수업에 갔다가 당황스러운 풍경을 보게 됐다고 했다. 교육부가 이미 올해부터 소위 ‘한글 사교육’이 필요 없도록 새롭게 개편한 교과과정을 3월에 입학하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적용하겠다고 밝힌 터다. 학원을 다니거나 학습지 수업을 받아가면서 미리 한글을 떼고 오지 않아도 학교에서 충분히 한글을 익히도록 지도하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새 방침이다. 한글교육 시간을 2학년까지 기존 27시간에서 60여시간으로 늘리고, 연필 잡는 법부터 가르치겠다고도 했다. 1학년 1학기 때까지는 받아쓰기 시험도 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윤씨가 참석한 학교 공개수업에서 담임 선생님은 초등학교에 이달 초 갓 입학한 아이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고 있었다. “자, 각자 짝에 대해서 한번 써볼까요? 짝꿍의 꿈이 뭔지 묻고 공책에 적어보세요.” 난데없는 ‘쓰기 요구’에 아이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어떻게 써요?” “선생님, 우주항공모함 만드는 사람이라고 짝이 적어 달라는데 어떻게 쓰나요?” 윤씨는 “미리 한글 사교육을 받고 온 아이들만이 자신있게 공책을 메꿔나가더라”면서 “공개수업조차 이렇게 진행하는데 학부모는 대체 어떻게 학교만 믿고 아이를 보낼 수가 있겠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교육부가 최근 유아 사교육 열풍을 꺾고 조기교육이 아닌 ‘적기(適期) 교육’을 정착시키겠다는 취지로 올해 초등학교 신입생에게부터 적용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새 교과서 내용을 공개했지만, 안타깝게도 학교도 학부모도 이를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실제 교육 현장에선 여전히 알림장을 손으로 적게 하거나 일기를 써오는 숙제를 내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는 게 여러 학부모들의 증언이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스토리텔링 수학을 없애겠다고 하지만, 정작 선행학습을 해온 아이들을 고려해 숫자 읽기 같은 쉬운 수학 과정은 아예 건너 뛰는 학교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한다. 이에 적지 않은 학부모들은 “언제 교육과정이 또 바뀔지 어떻게 아느냐”면서 여전히 사교육을 고민하고 있다.

"ㄱㄴㄷ부터 가르친다더니"

"초등학교 1학년 교과과정이 많이 쉬워졌다는데요, 그래도 학원을 보내야 하나요?" 22일 한 강남 지역 학부모 온라인 카페에 올라온 글이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렸다. 그 중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은 이랬다. "우리 셋째 이번 달 ○○초에 입학했는데요, 벌써 독서록 쓰기 숙제 받아왔어요. 둘째 때보다도 오히려 더 빨리 받아왔네요. 앞으로는 ㄱㄴㄷ 모르고 들어가도 학교에서 다 가르쳐줄 테니 걱정 말라고요? 아직도 교육부의 립서비스를 믿으시나요. 두 아이 키우면서 알았어요. 우리나라 교과과정은 빈대떡보다 잘 뒤집힌다는 걸요!" 서울 개포동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 김수향(40)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수업 시간 첫날에 이미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한글 다 익히고 온 사람?' 하고 물어봤다더라고요. 절반 넘는 아이는 이미 한글을 다 떼고 들어왔다고 하고요. 선생님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줄 긋기 동그라미 그리기부터 가르치시겠어요? 이미 지난 주부터 기초 단어 쓰기 숙제를 내주셨는 걸요."

수학에서도 한글을 알아야만 풀 수 있었던 이른바 '스토리텔링' 문제가 대폭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수학 스트레스도 여전하다. 이번에 외동딸을 경기도 성남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배윤경(37)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첫 수업 때 이미 선생님이 '다들 숫자 정도는 읽을 줄 알지?' 하고 묻고는 그 부분은 아예 건너뛰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1부터 100까지 읽고 쓰는 것부터 가르친다고 하지 않았나요? 웬걸요. 덧셈부터 바로 시작하더라는 거예요. 주변 엄마들이 '내가 뭐 사교육을 시키고 싶어서 시키는 줄 아느냐'고 아우성을 칠 때는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서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정녕 학교만 믿고 아이를 키울 수는 없는 건가요?"

"그놈의 선행학습 탓에"... 교사들의 한숨

일선 교사들도 할 말이 많다. 서울 종로에서 근무하는 초등학교 교사 이모(40)씨는 “여전히 부모님들이 학교를 믿지 못하고 선행학습을 시켜서 아이들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보니 수업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교육부에선 연필 잡기부터 가르치라지만, 실제로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절반 이상은 그 시간에 지루해 하며 몸을 꼬기 일쑤다. 이미 한글에 기초 연산까지 학원을 다니며 배우고 들어온 탓에 수업 내용이 지나치게 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 다 알아요. 안 들을래요!’라고 외치는 아이도 있다. 그럴수록 나머지 아이들은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끔은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자’는 구호가 민망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 김모(51) 교감은 “공개수업이 가끔은 오히려 독이 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될 때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공개수업에 왔다가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문제를 잘 못 풀거나 발표에 잘 참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바로 학습지를 등록하거나 학원을 찾아나서는 부모님을 종종 보게 되니까요. 저희는 투명하고 밝은 교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공개수업을 하는 건데…, 여전히 그 속에서도 경쟁 구도만을 바라보는 학부모도 있어요. ‘결국엔 다 따라온다. 인내심을 갖고 좀 기다려달라’라고 말해도 믿지 않으실 땐, 저희도 답답합니다.”

"학부모에게 믿음을 심어주려면"

정제영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사교육은 결국 수요가 공급을 낳는 원칙에 따라 생기는 것이다. 단순히 교과 과정을 개편하는 것만으로 사교육의 고리가 끊어질 것이라는 안이한 기대를 해서는 큰 효과를 얻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가 제안하는 건 결국 ‘안정적인 교육 정책 운영’이다. 정 교수는 “기본적으로 정책을 필요에 따라 혹은 정권의 움직임에 따라 수시로 바꾸면 학부모도 일선 교사들도 교육부의 방침을 신뢰할 수가 없다”면서 “교육과정을 최소 5~6년씩은 함부로 바꿀 수 없도록 법령으로 지정하고, 바꾸기 몇년 전엔 미리 예고하는 식의 노력을 해줘야만 한다”고 했다. 단순히 교과서만 바꾸는 것을 넘어 일선 학교 교사들이 현장에서 몸으로 겪게 되는 세부적인 문제점까지 교육부가 직접 찾아내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줘야 하는데, 이런 방식을 통해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학교를 감독하고 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교사들의 사기를 꺾지 않고 독려하는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 김동일 교육학과 교수는 “영화관에서 다같이 영화를 끝까지 잘 보려면 중간에 함부로 일어나는 사람이 생겨서는 안 된다. 사교육이 이와 비슷하다”면서 “결국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선 학교가 노력해서 학부모의 불안을 잠재워줘야만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개별 초등학교들이 ‘공약’을 내거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가령 ‘우리 학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글 학습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 믿어달라’는 식의 공문을 학부모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학부모들도 아무래도 안심을 할 수가 있다. 불안이 줄어들면 사교육도 사라진다. 무리한 사교육이 이렇게 차츰 줄어들다 보면 우리 아이들의 창의성도 더욱 깨어날 것으로 믿는다.”

국무총리 산하 국책 연구기관인 육아정책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자료도 사실상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연구소는 지난 17일 ‘아동의 창의성 증진을 위한 양육 환경과 뇌 발달 연구’라는 자료를 공개하면서, 어린이나 유아가 사교육을 일주일에 한 번 더 받을수록 창의성 점수가 0.563점씩 감소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5세 유아와 초등학교 2학년·5학년 등 총 270명을 대상으로 창의성 검사(TCT_DP)와 지능검사를 실시하고 학부모를 설문조사해서 얻은 결과다. 270명 중 88.4%가 사교육을 받고 있었고, 5세의 78.4%, 초등 2학년의 95.5%, 초등 5학년의 92.7%가 최소 한 가지 이상의 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연구진은 “사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정해진 답을 찾는 경향이 높아진다”고 분석하면서 “책을 많이 읽고 악기를 다루고 그림을 그리는 식의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단순히 사교육을 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아이의 창의력을 북돋워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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