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인터뷰] "박근혜 게이트는 61·87·97년 체제의 중층 모순"

글 권재현 기자 | confetti@donga.com, 사진 박해윤 기자 | land6@donga.com 2017. 3. 2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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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을 정치체제론으로 풀어낸 손호철 서강대 교수

[신동아]

● “촛불항쟁이 아니라 촛불혁명이다”
● 박정희 현상은 신화인가 실체인가, 사라질 것인가 부활할 것인가
●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좌파신자유주의가 원조 헬조선을 낳았다”
● “독일 모델을 도입하고 라틴적 삶에 대한 관점도 바꾸자”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파면이란 혁명적 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인 3월 8일 의미심장한 책이 출간됐다.'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지난해 11월부터 불붙기 시작한 광화문광장의 시위가 결국 혁명으로 귀결될 것임을 예견한 듯한 제목이다.

진보성향의 정치학자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펴낸 이 책의 제목에서 눈길을 끄는 키워드는'혁명'과'체제'다. 손 교수는 지난해 11월 이후 광화문광장에서 펼쳐진 촛불시위가 대통령 파면으로 귀결될 것임을 예견한 듯 항쟁도 아니고 혁명이란 표현을 썼다. 책에선'11월 혁명'과'촛불혁명'이란 표현이 번갈아 등장한다. 처음엔 광화문이란 공간에 주목해'광화문 항쟁'이라고 쓰려 했으나 이 현상이 전국적 항쟁이란 점에서 1987년 6월 항쟁을 본받아'11월'을 붙였고,'박근혜 퇴진'을 넘어 한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항쟁'이 아닌'시민혁명'을 택했다고 설명돼 있다.

지난해 11월 시작된 혁명은 올해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혁명의 이름값을 충족시켰다. 하지만 손 교수의 시선은 대통령 파면에 멈춰 있지 않다. 그것이 단순한 정권교체 수준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근본적 체제변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치체제는 보통 4, 5종류가 거명된다. 정부 수립과 함께 성립된 48년 체제(건국), 5·16군사정변으로 군부정부 수립을 알린'61년 체제'(산업화), 유신정부가 출범한'72년 체제'(독재), 정치적 민주화로 성립된'87년 체제'(민주화)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이후 성립된'97년 체제'(신자유주의)다.

손 교수는'박근혜 게이트'를 단순한 권력농단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서 이들 정치체제의 모순이 겹겹이 쌓여서 발생한 중층적 사건으로 풀어냈다. 먼저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사건사''복합국면사''구조사'라는 3가지 역사층위를 변용했다. 이 층위는 각각 시간적으로 단기, 중기, 장기적 원인과 결부돼 있다. 그러나 손 교수는 이를 수평적 시간이 아니라 수직적 층위의 문제로 전환해 표층, 중층, 심층의 3중 구조로 수정했다. 그리고 표층은 61년 체제, 중층은 87년 체제, 심층은 97년 체제와 맞닿아 있다고 풀어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이 결정된 10일 오전 11시 반으로부터 3시간 뒤 서강대 다산관 6층 그의 연구실에서 손 교수를 만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대통령 파면으로 결정 난 탄핵 심판 결과를 본 소감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기쁘고 슬프다. 한편으론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고, 법이 살아 있고, 뭔가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점에서 기쁘다. 동시에 어떻게 이런 사태까지 초래됐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 슬프다. 그 과정에서 심화된 분열과 앞으로 일어날 상처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답답하다."

11월 항쟁이 촛불혁명 됐다

▼ 그 결과로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 앞으로 국민이 유의할 점은 무엇일까.

"국민이 후보를 충분히 검증하고 미래를 숙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칫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졸속으로 투표할 가능성이 커졌다. 우리 역사의 과거에 있었던 열망과 실망이 되풀이될까 우려스럽다. 원래 선거라는 게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게임이다 보니 갈등적이고 대립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번 탄핵 과정에서 심화된 사회적 균열 갈등 이런 것들이 대선 과정에서 악화되거나 심화되지 않을까도 걱정스럽다. 선거 과정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후보보다 통합과 치유로 승화시키려는 후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조기 대선으로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당선 가능성이 더 커졌다. 다른 후보들이'개헌'이란 기치 아래 집결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책의 키워드 중 하나도 개헌인데.

"앞으로 대선 정국에선 2개의 키워드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정계개편'이고 다른 하나가'개헌'이다. 정계개편은 (문재인의) 패권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을 내걸 것이다. 하지만 정계개편은 국민에겐 식상하고 부정적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다는 점에서 형식은 정계개편이 되더라도 내용은 개헌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다. 60일 안에 선거를 해야 하는데 이 시간 동안 개헌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당장 개헌하자는 목소리보다 집권 뒤 개헌이나 임기 단축(3년 임기)을 요구하는 변형된 형태의 개헌연대가 가능할 것이라 본다. 두 번째 문제는 여론이다. 여론조사를 보면 70~80%의 민심이 탄핵지지, 부패청산과 적폐청산을 지지하는 상황이라 개헌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선(先)대선 후(後)개헌'이나'선(先)과거청산 후(後)개헌' 주장도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역대 개헌이 그러했듯이 그것은 결국'자기들만의 리그', 정치인들만의 밀실협상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방치할 경우'2017년 체제'도 불가능할 수 있다."

"7공화국이 아닌 2공화국이 돼야"

▼ 개헌을 통해 수립될 공화국은'제7공화국'이 돼선 안 되고 진정한 시민들의 바람에 기초한 '제2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했다.

"정치인, 학자, 전문가의 손에만 맡겨두지 않고 일반 대중의 참여 속에 개헌을 이뤄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촛불혁명을'박근혜 퇴진'으로 한정하는 것은 최소주의적 접근이다. 이번 기회에 다 둘러엎자고 달려드는 최대주의적 접근도 잘못이지만 최소주의적 접근도 문제다. 박근혜의 퇴진이 아니라 시대적 과제와 대중적 정서를 잘 조화시키는 최적화한 접근이 필요하다. 시대적 과제는 박근혜의 물리적 퇴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박근혜표 정치'의 퇴진이고,'헬조선'으로 표현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노와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열망에 있다. 이를 담아낼 수 있는'큰 그림'이 개헌이다. 대중적 정서도'쇠도 뜨거울 때 두드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한 만큼'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가 무엇이고'이러한 나라를 만들어달라'고 하는 주권자로서의 요구를 정치권의 화두로 전달해야 한다. 대선 역시 그런 것에 대한 정치권의 화답이 도출되는 장이 돼야 한다."

▼'박근혜 게이트'의 표층은 61년 체제, 중층은 87년 체제, 심층은 97년 체제와 맞닿아 있다고 풀어냈다.

"박근혜 게이트를 일반인의 눈, 저널리즘 시각에서 보면 최순실 등등에 의해 초래된 국정농단 사건으로만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을 생각해보면 이번 사건을 우발적 사건으로만 볼 수는 없다. 우선 저토록 문제가 많은 박근혜란 인물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를 돌이켜 생각해보자.'박정희 신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번에 드러난 블랙리스트, 권력의 사유화, 공작정치, 정경유착 등 박근혜 정치의 여러 문제 역시'박정희 체제'라 불린 61년 체제와 공명하는 문제들이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대통령의 이런 문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으나 김영삼 대통령 때 아들 김현철 씨가 감옥에 갔고, 김대중 대통령 때는 두 아들이 감옥에 갔고, 노무현 대통령 때도 어쨌든'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됐다. 이를 보면 박정희·박근혜의 문제를 떠나서 1987년 민주화가 제왕적 대통령제에 의지한'불완전한 민주화'였기에 초래됐다고도 볼 수 있다. 더 심층으로 들어가면 촛불혁명의 제일 밑바닥에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해 초래된'헬조선'에 대한 흙수저들의 분노가 깔려 있다. 이는 "돈 많은 부모 만난 것도 실력"이라는 정유라의 발언과 진주 촛불집회에서 "사람을 돈과 이익으로 환산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로 보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10대 소녀의 발언에 응축돼 있다."  

"박정희 신화는 허구다"

▼ 61년 체제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박정희 신화'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학생들에게'때문에론(論)'하고'불구하고론(論)'을 비교하라는 과제를 즐겨 낸다. 박정희 신화론도'박정희 때문에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시각과'박정희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2개의 인식 축에 기대고 있다. 시기적으로 박정희 시대 이후 잘 살게 됐으니'박정희 때문에'라고 생각하기 쉽다. 한편으론 개발독재로 인해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에 성공했기에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두 번째 시각은 주관적 가치판단의 문제이지만 첫 번째 시각은 객관적 사실의 문제다. 그래서 첫 번째 시각을 파고들었다. 우리나라가 1945년 이후 신생국 중에서 유일하게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이뤘다는 주장부터 살펴봤다. 이 가운데 민주주의는 박정희와 무관하기 때문에 경제발전에만 초점을 맞춰봤다. 중동의 산유국을 빼고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는'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 불리는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 있다. 이 중 홍콩은 영국 통치하에 민주주의와 개방경제를 구가하면서, 즉 박정희식 개발독재 없이도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박정희 때문에론의 허점이다. 그럼 네 나라 경제발전의 공통점이 뭘까를 조사했더니 2가지 공통분모를 찾았다. 개발독재나 유교자본주의가 아니다.'농지개혁의 성공'과'냉전'이다."

‘농지개혁'과'냉전'

▼ 산업화를 위해선 전통적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농지개혁이 필수적이다.

"제3세계 경제발전의 최대 걸림돌이 농업자본인 지주다. 현재 필리핀의 최대 지주 가문이 대통령을 배출한 아키노 가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라. 지주를 하면 1년에 20%의 수익이 발생하는데 기업을 경영해봤자 5%의 수익만 발생하는데 누가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겠는가. 한국에서 가장 급진적 정책을 도입하려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노 대통령이다. 노무현이 아니라 노태우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추진했던 토지공개념 제도다. 결국 무산됐지만 기업의 비업무용 토지 소유를 금지하려는 제도였다. 요즘 논란이 된 잠실 제2롯데월드 부지도 비업무용이라고 해서 다 팔라고 했고 세종시 개발처럼 부동산 개발로 땅값이 오르면 수익의 3분의 1을 환수하는 법이었다.'빨갱이법'이란 소리 듣기 좋은 이런 법을 왜 추진했겠는가. 간단하다. 10여 년간 조사해보니 똑같은 돈으로 기업 하는 것과 땅 사놓은 것을 비교해보니 땅 사놓은 게 기업 하는 것의 6배 이익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산업화를 위해선 지주권력을 무너뜨려야 한다. 한국과 대만은 제3세계 국가에서 거의 유이하게 농지개혁에 성공했고 싱가포르와 홍콩은 도시국가니까 지주가 없었다."

▼ 그에 반해 냉전은 정치적 요소다. 냉전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반공국가들을 체제우위 선전용 쇼윈도로 삼으려는 미국의 전략적 원조 때문이란 분석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다.

"이를 실감하려면 숫자만 뒤집힌 1979년과 1997년의 상황을 비교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98년 미국에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를 만났을 때 IMF 경제위기 발생의 원인을 물으니'소련 동구가 망해서 그런 거다'고 하는 거다. 처음엔'저 사람이 돌았나' 하고 생각했으나 설명을 듣고는'역시 대가는 대가다' 하고 무릎을 탁 쳤다.'동아시아 국가의 경제발전은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만큼 강해져서도 안 되지만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자율적 발전을 허용해줘서다. 만일 한국이 라틴아메리카에 위치했으면 농업국가로 방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1989~90년 소련과 동구의 붕괴로 이제 그 필요성이 사라졌기에 손을 본 것이다'라는 설명이었다."

▼ 그런 1997년 상황이 1979년과 어떻게 다르다는 소리인가.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1979년에도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다. 당시 나는 한국일보 기자로 한국은행을 출입하고 있어 그때 상황을 또렷이 기억한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면서 과잉 중복투자를 벌이다 2차 오일쇼크가 닥쳤다. 외채를 엄청나게 들여다가 공장을 짓고 거기서 나온 제품을 세계에 팔아 갚으려 했는데 오일쇼크로 하나도 안 팔리는 거다. 그래서 IMF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경제안정화정책'이란 긴축정책을 펼쳤다. 한은이 펴낸 책에도 나오지만'대한민국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 1997년 부도가 난 한보와 삼성자동차를 보면 똑같이 중화학 과잉중복투자가 문제가 됐다. 여기에 동남아 외환위기가 (1979년의 2차 오일쇼크처럼)겹쳐서 발생하며 문제가 커진 거다. 1979년 상황과 똑같다. 그런데 1997년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한국을 완전히 거덜냈지만 1979년엔 냉전기였기에 부드러운 긴축정책만 요구한 것이다. 그 타격을 대기업은 피해갔지만 중소기업은 피해갈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YH무역이었다. 그 회사 여공들이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게 YH사건이고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한 거다."

"87년 체제는 위임민주주의"

한국의 보수정부뿐 아니라 진보정부도 함께 비판한 손호철 교수.
▼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찾아든'박정희 향수'에 대해 "위기 때문에 위기의 원인 제공자를 추앙하는, 비극적이다 못해 희극적인 코미디 같은 현상"이라고 일갈했다.

"한국 경제성장에 냉전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박정희 시대가 아니라 이승만 시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액수를 1인당 평균액수로 보면 제3세계국가 평균의 10배에 이른다. 이승만 정권 말기 미국의 원조가 줄면서 경제상황이 어려워지긴 했지만 국제비교의 시각에서 보면 이승만 때가 박정희 때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세계은행 자료를 뽑아보면 박정희 때 제조업 성장률이 제3세계 평균과 비교해 3.07배가 높았지만 이승만 때는 3.36배로 상대적으로 더 높았다. 그렇다고 이승만 때가 더 빨리 발전했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이승만 때는 정체고 박정희 때는 발전이라는 게 신화라는 말이다. 그럼 박정희는 왜 비극적 죽음을 맞아야 했는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79년 경제위기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 전두환이 국보위를 통해 재벌 구조조정에 나선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럼 박정희는 왜 되살아났나. 1997년 IMF경제위기 때문이다. 김영삼, 김대중 민주화 정부가 들어선 뒤 못살게 됐다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IMF위기가 왜 왔는가. 여러 원인 중 하나가 관치경제다. 관치경제가 뭔가. 국가주도 산업화고 재벌 위주 경제정책으로 정경유착을 초래하는 것이다. 바로 박정희 모델이다."

▼'박정희가 위대하다면 스탈린은 더 위대하다고 해야 한다'고도 밝혔다.

"박정희 모델은 스탈린 모델의 변형이다. 고도성장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강압적 총량투입주의에 나섰다는 점에서 그렇다. 박정희가 후진국을 중진국으로 올려놨다면 스탈린은 유럽 변방의 낙후된 농업국을 미국과 맞서는 강대국 반열에 올려놨다. 결과만 놓고 보면 스탈린의 업적이 더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대런 애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연구에 지적했듯이 민주적 정치체제만이 포용적 경제체제를 가능하게 하고 지속적 발전과 번영을 보장한다. 스탈린 모델이나 박정희 모델 모두 지속가능한 모델이 아니다. 특히 박정희 모델은 냉전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로 가능했던 모델이기에 다른 제3세계 국가의 역할모델이 될 수도 없다."

▼ 불완전한 민주화로서 87년 체제의 문제점으로 넘어가보자.

"87년 체제가 불완전한 민주화가 된 핵심에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있다. 박근혜 게이트는 민주화 이후 견제받지 않는 권력으로서 제왕적 대통령의 폐단을 모두 모은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견제해야 할 정당들은'내시정당'으로 전락해 국회도 제 기능을 못했다. 대의민주주의가 실패한 것이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설 수밖에 없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87년 체제는 (아르헨티나의 정치학자 기예르모 오도넬이 말한)'위임민주주의'에 가깝다. 대통령이 민주선거로 선출되긴 하지만 대의민주주의를 무시하고 모든 권력을 위임받은 것처럼 무소불위로 행사하는 왜곡된 민주주의를 뜻한다."

"헬조선 1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촛불혁명의 표피에는 박근혜 게이트로 표출된 블랙리스트,
공작정치 등 박정희 체제가, 중간 수준에는 제왕적 대통령제 등
87년 헌정 체제가, 깊은 곳에는 97년 경제위기와
시장 만능주의 신자유주의체제가 만든 헬조선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 -책 본문 중

▼ 촛불혁명의 심층원인은 87년 체제보다 97년 체제에 있다고 역설했다.

"87년 체제의 성립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박정희가 왜 부활했는가. 진보정권을 표방하면서 신자유주의주의 정책을 채택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민생파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헬조선'이라 부르는데 헬조선 2기가 맞다. 헬조선 1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다. 앞으로 정권교체가 일어나더라도 민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헬조선 3기로 불리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문재인은'노무현 정부가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 못한 것은 인정한다'면서도'당시의 시대정신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되, 권위주의를 타파하자는 것'이서 그랬다고 변명한다. 문재인은 지금도 뭐가 문제인지를 모른다. 당시나 지금이나 시대정신은 양극화 해소에 있다. 흔히 박근혜가 아버지를 다시 죽였다고 말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새 정권이 들어서도 헬조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박정희 신화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 좌파정부 10년이 끝난 뒤 우파정부 10년 집권에 대해'등 따숩고 배부른 운동권 엘리트(먹물)에 대한 대중의 복수'라는 표현을 썼다.

"박정희 현상을 단순한 허위의식이나 무지의 산물로 봐선 안 된다. 그 현상엔 구체적인 물적 기반이 존재한다. 두 가지다. 첫째는 구체적 삶의 체험이다. 현재 태극기시위대의 주축을 이루는 기성세대는 박정희 시절 보릿고개와 그것을 극복한 탈가난을 체험했다. 그런 그들에게 아무리 박정희 신화가 허구라는 분석을 들려줘도'쇠귀에 경 읽기'가 되고 마는 이유다. 두 번째는 좌절과 분노의 체험이다. 1997년 대선에선 가난한 사람일수록 김대중을 찍었다. 하지만 10년 뒤인 2007년 대선에선 가난한 사람일수록 이명박을 찍었다. 그 10년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다면서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민생 문제를 악화시킨 진보정권의 엘리트들을 대중이 심판한 것이다."

독일 모델 & 라틴 라이프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동아DB]
▼ 폴 고갱의 그림'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거론하며 촛불혁명의 의미를 풀었다. 지금까지 촛불혁명이 어디서 왔고 무엇이냐를 다뤘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외국인들은 촛불시위, 희망버스, 골리앗 투쟁을 보며 열정적인 정치운동을 펼친다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자랑스럽지 않다. 한국에서 거리의 정치가 활성화한 것은 제도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제도 내에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절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까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이다. 대의정치의 실패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대의정치가 제대로 기능을 하도록 하려면 독일식 정치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내각제, 18세 이상 투표제,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비례대표 의석수를 늘리고, 국민소환제처럼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도 강화해 승자독식의 정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헬조선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영미식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가 아니라 독일식 이해당사자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전환해야 한다. 주주의 이익만 중시할 게 아니라 하청업체 노동자, 소비자의 이익을 모두 반영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소액주주운동도 결국 주주자본주의인데 소액주주의 이익을 위한다는 것이 결국 외국투기자본의 이익을 챙겨주는 꼴만 되고 있다. 삼성이 돈을 몰래 빼돌려 정치자금으로 쓴다면 그게 주주의 이익만 침해한 것인가. 노동자와 하청업체가 열심히 일한 몫도 빼돌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의 경영 참여도 허용해야 한다."

▼'보수는 작은 정부, 진보는 큰 정부'라는 신화도 깨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수정부라는 레이건과 트럼프가 낙태를 풀자고 하나, 규제하자고 하나. 레이건과 트럼프가 국방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하나, 줄여야 한다고 하나. 정부에 따라 특정 부위나 기능을 강화하거나 약화할 뿐이다. 규제 완화도 무조건 선(善)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것도 연령이 오래된 선박에 대한 규제를 풀어줬기 때문 아닌가. 흔히 보수정부는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다고 생각하는데 박근혜 정부가 민간기업인 CJ의 사장을 바꾸라 마라 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폴라니가 말했듯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면 사회는 무너지게 돼 있다. 사회를 위해 필요한 규제는 강화하고 불필요한 규제는 풀어줘야 한다. 검찰이 권력의 시녀가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민간이 참여하는 검찰위원회를 만들어 사회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이윤효율성이 아니라 공공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개혁을 해야 한다. 한국이 헬조선이 된 것은 취업이 곧 복지였던 사회에서 언제든 해고가 가능하게 만들어버려 복지 시스템이 부족한 동아시아 모델과 해고가 유연한 유럽 모델의 나쁜 점만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경제적 지옥이 된 것이다. 정리해고만 고집할 게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같은 대안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남미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도 바꾸자. 일할 줄만 알고 놀 줄은 몰라 세계 최장 노동시간에 시달리느니 삶을 즐길 줄 아는 라틴적 삶도 좀 배울 줄 아는'문명관의 전환'이 필요하다."

글 권재현 기자 | confetti@donga.com, 사진 박해윤 기자 | land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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