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인이 낮술 먹다 자수? 학생들과 치밀하게 만세시위 계획"

유석재 기자 입력 2017. 3. 23. 03:08 수정 2017. 3. 23.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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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교수, 3·1만세운동의 京城 학생시위 상황 분석]
만세운동 판결한 '결정서' 보니 시위 주도한 관립학교 등 학생
33인 박희도·이갑성과 만나 선언문 배포, 시위 경로 논의
준비 끝내놓고 태화관 모인 것.. 부당하게 33인 폄훼해선 안돼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룸살롱에서 낮술을 마셨다." 최근 물의를 빚은 스타 강사의 돌출 발언은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1980년대 이후 진보·좌파 계열의 학자들은 항일 무장투쟁 노선을 앞세운 반면 33인 등 민족운동 진영의 독립운동은 깎아내렸다. "청년·학생층이 먼저 추진한 (대중운동) 계획에 이들(33인)은 뒤늦게 참가했다가 결정적 순간에 후퇴했다"(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그들(33인)은 투항을 선택했다…요릿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그들은 경찰에 자수했다"(김정인 등 '한국근대사')는 서술이 연구서에 등장했고, 일부 한국사 교과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이 소극적인 행동으로 일관한 것이 아니라, 학생 세력과 함께 치밀한 사전 계획을 통해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태진(74)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는 오는 25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석오문화재단(이사장 윤동한) 한국역사연구원 주최 국제학술회의 '식민지배체제와 3·1 독립만세운동'에서 '3·1 만세운동의 경성(京城) 학생시위 상황 분석'을 발표한다.

◇3·1 운동 직전 여섯 차례 회합

이 교수는 3·1만세운동에서 검거된 248명을 판결한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종결결정서'(이하 '결정서')를 분석했다. '결정서'는 1970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에 실렸으나 지금까지 학계에서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자료다.

'결정서'는 3·1운동 직전 민족대표 33인이 '시위는 학생들이 담당하도록' 정하고, 33인 중에서 연소자였던 박희도(1889~1952)와 이갑성(1886~1981) 두 사람이 학생들과 접촉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1월 하순 박희도의 집에서 한위건(경성의전), 강기덕(보성법률상업전문), 김원벽(연희전문) 등이 모인 것을 시작으로 2월 12일과 14일에는 세브란스 구내 이갑성의 집에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학생들은 2월 20일(승동교회)과 25·26일(이필주 목사 집)에도 회합했고, 3월 4일에는 체포되지 않은 학생들이 모여 2차 시위를 계획했다.

이 모임에선 ▲시위는 전적으로 전문학교 학생들이 맡고 ▲선언문 배포는 중등학교 학생들이 담당하는 등 역할을 분담하고 ▲3월 5일 반혼제(고종 황제를 장사 지낸 뒤 신주를 궁궐로 모셔오는 의식) 때 다시 대규모 시위를 열 계획을 세웠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의 상당수는 경성전수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등 관립학교 학생들이었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결정서'에는 "이갑성은 손병희 일파의 지(旨·뜻)를 함(含)고(품고) 해(該·해당) 선언서를 경성부 내에 반포 시에 각 중등학생을 회유하던 강기덕의 역(力)을 뇌(賴)치 안이면 불능으로(힘에 의지하지 않으면 할 수 없으므로) 동일(同日)경에 기 배포를 동인(同人)에게 일임(一任)얏슴으로…"라며 33인 핵심 인물인 손병희의 '지령'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과정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 교수는 "판결문 속 시간과 장소 등이 매우 구체적으로 적시된 것으로 보아 끼워맞추기 수사의 결과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요릿집에서 투항했다고 보면 곤란"

이 교수는 "'결정서'에 기록된 시위 경로를 보면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시위가 치밀하게 계획됐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여러 갈래의 시위 행렬은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에 집결했고, 미국 영사관과 프랑스 영사관 앞을 반드시 거쳤다. "파리강화회의를 주도할 나라들의 외교 공관 앞에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전하려 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지금까지는 이 같은 33인과 학생들의 '사전 모의'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33인이 3월 1일 당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체포된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태진 교수는 "33인은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미리 계획하고, 종교 조직을 통해 각 지방의 만세운동까지 준비한 뒤, 평화적 투쟁의 마지막 단계로 태화관에서 회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겉으로 드러난 일부 사실만 가지고 33인이 부당하게 폄훼돼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의 이번 연구는 최근 서울대 총동창회가 발간한 '국립서울대학교 개학 반세기사'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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