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 못해 부끄러웠지만 이젠 수요집회 이끄는 사회자"

강성만 2017. 3. 2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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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정대협 새 사무처장 양노자씨

[한겨레]

지난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사무처장에 임명된 양노자(48·사진)씨는 재일동포 3세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양 처장은 우리말을 대학에 들어간 뒤에 배웠다. 정대협이 주도해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고 있는 수요집회를 사회자로 이끌어갈 만큼 이제는 우리말이 능숙하다. 그래도 가끔 모르는 이와 전화 통화를 할 때 혹시 ‘일본 사람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한단다. “(그럴 땐) ‘일본 사람 아니에요. 전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분명히 답하지요. 하하.” 그를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 정대협 사무실에서 만났다.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3세
대학때 동포청년회 활동 ‘해방감’
‘위안부 참상’ 책 읽고 ‘민족’ 자각

2006년 정대협 자원봉사로 인연
2009년부터 간사로 합류해 정착
“한-일 위안부 합의로 힘들지만…”

현재 정대협 사무처 간사는 처장인 그를 포함해 4명이다. 수요시위를 꾸리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돌보고, 국제연대나 협력 사업을 추진하는 게 사무처의 일이다.

양 처장이 일본에서 10년의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온 게 2004년이다. 5년 뒤에 정대협 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년 만에 사무처를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다.

“조부모께서 제주 출신이에요. 일제 강점기에 생활이 어려워 할아버지가 먼저 일본으로 건너와 자리를 잡은 뒤 할머니가 오셨죠. 할아버지는 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셨어요.” 조부모는 1녀4남을 뒀다. 1935년 양씨의 아버지가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재일동포 2세들은 애매한 위치죠. 자신의 뜻대로 일본에 온 것도 아닌데, 심한 차별을 당해야 했어요. 아버지는 취직 자체가 어려워 생선 장사 등을 하면서 힘겹게 가족을 부양했죠.”

재일동포 3세는 조금 더 복잡하다고 했다. 그에겐 남동생 둘이 있다. “우리 형제에게 집에서 누구도 조선 사람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누가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그냥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처장이 어릴 때 집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이는 할머니뿐이었다. “할머니 친구분이 집에 놀러와 두 분이 제가 잘 모르는 말을 할 때 우리 집이 이웃과 다르다고 생각했지요.”

1988년 오사카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교내 재일동포 청년단체 회원들이 그의 집을 찾았다. 이 만남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한국말이나 역사를 배워보자고 생각했죠. 재일동포 커뮤니티(공동체)에 들어가면서 해방감을 느꼈어요. 전엔 조선인이라는 게 부끄러웠는데, 커뮤니티 생활을 하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해방된 느낌이었죠.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친구도 생겼고요.”

남동생은 생각이 달랐다. 커뮤니티에 같이 가자는 누나 제안을 거절했다. “동생이 ‘난 한국 사람도 아니고 일본 사람도 아니다’라고 해요. 그럼 뭐냐고 했더니 ‘(난)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사회적으로 열등한 한국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 가고 싶지 않다는 얘기였지요.”

양 처장은 고교 재학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결혼 전에 귀화한 아버지의 뜻이 작용했다. “(커뮤니티 동료들이) 귀화 사실을 너무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는 지금은 고인이 된 아버지에게 귀화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답은 이랬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권리를 갖고 싶었다.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차별의 기억’에 대해 묻자 양 처장은 이렇게 답했다. “초등학교 때 김치, 마늘 냄새 난다고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았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도 조선인이라며 일본인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같이 놀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유치원에서 ‘조선인은 저리 가라’는 소리를 들었지요. 취업 때도 쉽지 않았어요.”

한국에 올 때는 애초 1~2년 우리말을 배운 뒤 돌아갈 생각이었다. “재일동포 커뮤니티 생활을 한 뒤엔 한국말을 못하는 게 오히려 부끄러움이었어요.” 2006년 성공회대 사회학과 3학년에 편입해 공부를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정대협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이렇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한국 체류 기간은 한해씩 늘어났다.

조선 여성들이 일본군 성노예로 학대당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20대 때 처음 알게 됐다. “90년대 중반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 화제가 되었죠. 당시 일본어로 된 위안부 관련 책을 구해 본 뒤 큰 충격을 받았어요. 피해자들이 당한 고통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어요.” 당시엔 ‘전쟁 때 여성에 가해진 폭력’이라는 여성주의적 관점보다는 ‘동포가 당한 고통’이라는 민족주의적 시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는 3년 전 재일동포 3세와 결혼했다. 남편은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수요집회에서 만났어요. 결혼 전엔 한달에 한번 정도 만났는데, 지금은 만나는 횟수가 줄었어요. 하하.”

정대협 활동 기간 중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꼽아달랐고 했더니, 다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재작년 한-일 정부 사이에 위안부 합의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죠. (그전엔) 뭔가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했는데, 합의로 한순간에 무너져 너무 힘들었어요.”

그는 오는 5월 대선에 나서는 유력 주자들이 합의 무효화 이야기를 해 기대를 걸고 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합의를 확실히 무효화해야 합니다. 정부 돈으로 10억엔을 일본에 돌려주고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되찾을 수 있어요.”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가 군 위안부 범죄를 인정하고 법적 배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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