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친구야, 우리 가끔 할머니를 먹자

2017. 3. 2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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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우리 진짜로 20년 만이네. 근데 너 말투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하."

그러고 보니 진짜 20년 만이었다.

하지만 귀국한 뒤 본토보다 혹독한 한국의 중·고교 영문법 교육을 받은 게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면서 엷게 웃었다.

그래, H, 우리 가끔 할머니를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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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1일 화요일 맑음. 할머니를 먹자.
#242 Let's Eat Grandma 'Deep Six Textbook' (2016년)

[동아일보]

영국 팝 듀오 ‘레츠 이트 그랜마’의 로사 월턴(왼쪽)과 제니 홀링워스. 레츠 이트 그랜마 인스타그램 캡처
“야, 우리 진짜로 20년 만이네. 근데 너 말투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하.”

그러고 보니 진짜 20년 만이었다. H의 말투도 똑같았다. 별것 아닌 팝송 후렴구에 유리처럼 금 가던 가슴의 봄. 80개의 계절을 건너 과 동기 H를 찾아낸 건 영어 때문이었다.

요즘 해외출장을 가거나 외국 음악가와 대화할 때마다 부족한 내 영어 실력이 아쉽던 차였다. 그래서 주변에 영어 잘하는 친구가 누가 있었나 생각하다 문득 H가 떠오른 것이다. 그가 흥얼대던 R.E.M., 라디오헤드의 노래들도.

기억나는 단서를 모아 인터넷에서 검색, 또 검색. 찾아낸 H는 이제 해외 전문지의 한국 통신원이다. e메일을 보냈더니 답장이 온다. 24분 만에. “혹시… 기타 치던 임희윤? ….”

이틀 뒤 점심시간. 광화문에서 H를 상봉했다.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우린 식당에 마주 앉았다. 시간여행이 시작됐다. “B 오빠 군대 간다고 환송회 할 때 기억나? 과묵하게 앉아 있던 네가 일어나서 그랬잖아. ‘B 형을 데려가는 대한민국의 모든 군대에 심심한 ‘퍽 유’를 보내고요….’” … 맞아. 그래. 내가 그랬었지.

지난주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의 SXSW(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 페스티벌에서 본 여러 공연 중 영국 10대 듀오 ‘레츠 이트 그랜마’의 무대가 잊히지 않는다. 기다란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리고 좀비처럼 등장한 둘은 신시사이저로 비극적 화성을 짚으면서 공포영화 속 자매처럼 굴었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할머니를 먹자’는 기괴한 팀명은 아마 저런 데서 나왔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를 활용한 띄어쓰기 교육이 있다면 영어권 국가에서는 쉼표 하나 차이가 무섭다는 예로 이런 걸 든다니까. ‘Let‘s eat, grandma(드시죠, 할머니)’랑 ‘Let’s eat grandma(할머니를 먹자)’.

듀오의 데뷔앨범 첫 곡 ‘Deep Six Textbook(교과서를 바다에 버려)’는 딱딱한 문법시간 바깥의 세계로 출항하는 선언문이다. ‘우린 교과서 속에서 살아가/한 글자, 한 글자… 불가사리도 궁금해할 거야/우리가 왜 이렇게 집착하는가… 우린 동쪽 해안으로 갈 거야.’

H는 열 살 때까지 미국에서 살다 왔다. 하지만 귀국한 뒤 본토보다 혹독한 한국의 중·고교 영문법 교육을 받은 게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면서 엷게 웃었다. 그래, H, 우리 가끔 할머니를 먹자.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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