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막말 대왕' 에르도안, 유럽이 뿔나야 내가 산다?

정규진 기자 입력 2017. 3. 21. 11:45 수정 2017. 3. 2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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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연일 유럽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모독’과 ‘도발’의 수준입니다. 막말은 독일과 네덜란드를 겨냥하다 이제는 유럽 전체로 향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네덜란드를 “나치의 잔재, 파시스트”라고 지칭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자 유대인 학살로 악명 높은 나치는 유럽인이 가장 혐오하는 단어 중 하납니다. 한마디로 ‘욕설의 끝판왕’인 셈입니다. 독일인에게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에르도안은 또 네덜란드를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조롱했습니다. 바나나 공화국은 ‘마지막 잎새’의 작가 오 헨리가 1904년에 발표한 ‘양배추와 왕들’에 등장하는 가상 국가에서 나온 말입니다.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썩어 있는 바나나 같은 나라를 빗댄 말입니다. 바나나와 같은 한정된 농산물이나 원자재 수출에 경제를 의존하고 미국 등 서구의 거대자본에 좌지우지되는 중남미의 부패한 독재정권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습니다. 네덜란드가 튤립 뿐 아니라 세계적 가전회사인 필립스와 유명한 맥주인 하이네켄의 본고장이라는 걸 에르도안이 설마 몰라서 그런 건 아니겠죠. 어떻게 든 싸움을 걸고 싶은데 할 말이 없으니 바나나 공화국까지 들먹였을 겁니다.

나치로 패러디 된 메르켈 독일 총리

에르도안의 ‘저질 발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독일을 걸고 넘어졌습니다. 메르켈 독일 총리를 가리켜 “테러리스트를 지원한다”고 비난하더니 지난 19일엔 “유럽은 우리(터키)가 ‘나치’라고 부르면 불편해한다. 특히 메르켈이 그렇다. 하지만, 지금 나치 수법을 쓰고 있는 건 바로 ‘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터키어로 ‘SEN’ 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SEN은 영어로 ‘YOU’ 입니다. 보통 터키어로 격식을 갖춰 상대를 지칭할 때는 ‘SIZ’ 나 귀하를 뜻하는 ‘SAYIN’을 쓴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정상을 어떻게 공식석상에서 ‘너.당신’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지… 독일의 한 코미디언이 자신을 조롱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독일에 그 코미디언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한 게 에르도안입니다. 그런 자신이 독일의 총리를 그런 식으로 조롱하다니 ‘가도 너무 갔다’는 말 밖에 안 나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에르도안을 왜 ‘19세기 사고방식을 가진 국제 깡패’라고까지 표현했는지 알만합니다.

● 내 집에서 남의 잔치 막았다고 '나치?'

터키가 유럽. 특히 독일과 네덜란드를 향해 욕설 수준의 막말을 퍼붓는 건 다름 아닌 정치집회 금지에서 비롯됐습니다. 터키는 다음 달 16일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합니다. 이에 앞서 재외국민투표가 치러지는 데 터키의 정치인과 장관들이 유럽 각국을 돌면서 개헌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과 네덜란드가 자국 내에서 터키 정치인이 개헌 찬성을 독려하는 집회를 여는 걸 금지하면서 갈등이 비롯됐습니다.
터키 입장에선 너희가 뭔데 남의 나라 개헌 투표에 훼방을 놓냐며 발끈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건 터키의 생떼라는 게 더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도 5월 9일 대선을 치르지 않습니까? 역시 세계 각국에 흩어진 대한민국 국민은 재외국민투표를 하게 되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프랑스나 독일에 가서 어느 정당의 누구를 찍어라 하는 정치집회를 열지는 않잖아요? 자기 나라 안에서 타국 정치인이 집회를 여는 걸 허용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해당국의 권한입니다. 독일과 네덜란드뿐 아니라 스위스도 터키의 개헌지지 집회를 금지했고, 덴마크는 터키 부총리의 방문도 연기시켰습니다.

히틀러<좌>와 에르도안<우>, 독재자와 독재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

● 독재의 고속도로를 깔아주는 '개헌'

유럽은 이번 터키의 개헌이 에르도안의 독재만 늘려줄 뿐이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번 개헌은 터키의 권력구조를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전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현행 5년 단임제인 대통령 임기를 5년 중임제로 바꿔놨습니다. 이 두 가지는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을 안기고, 그가 권좌를 10년은 더 지키는 명분을 마련해줬습니다. 지난 2014년 에르도안이 총리에서 대통령으로 직함을 갈아탄 뒤 내각회의도 자신이 주재하며 사실상 대통령제와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무리 허수아비라지만 총리를 거쳐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죠. 국가비상사태도 자기 뜻이지만 형식상 발효와 연장도 다 총리가 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제가 되면 법보다 앞서는 포고령을 내리는 국가비상사태선포권을 손에 쥐게 되니 내 멋대로 뭐든 해도 딴지 걸 사람이 없게 됩니다.

또, 에르도안 임기가 2019년에 끝나는데 개헌이 되면 에르도안은 새로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5년 씩 두 번의 대권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2029년까지 독재를 이어가게 됩니다. 2002년 총리에 오른 뒤 12년 연임 불가의 당규 때문에 대통령으로 직함만 갈아타서 권력을 이어왔으니, 무려 27년 간 그것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한 겁니다. 그래서, 이번 개헌은 21세기 술탄을 위한 독재의 고속도로를 깔아준다는 비난이 나옵니다.

● 재외국민투표가 '캐스팅보트'

그런데, 개헌을 통과시키려면 터키 안에서 세몰이만 하면 될 일이지 왜 유럽까지 뒤집고 다니는 걸까요? 왜 재외국민 투표에 에르도안이 목숨을 거는 걸까요?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누구나 다 아는 독재를 위한 개헌입니다. 터키에서 아무리 에르도안의 인기가 높을지 몰라도 터키인 가운데 독재를 반기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7월 터키 쿠데타 진압 당시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취재 갔는데 그때 만났던 터키의 대학생과 젊은이들은 에르도안에 대한 평가를 묻자 “터키는 무스타파 케말의 정신을 이어받는 나라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술탄의 이슬람제국을 무너뜨리고 터키 공화국을 건설한 ‘터키의 아버지’ ‘아타튀르크’로 불리는 케말의 건국 이념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뜻은 터키는 공화국이다. 공화국은 시민의 나라이다. 독재의 발판이 될 수 있는 대통령제는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듯이 최근 개헌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찬반의견이 팽팽하게 나왔습니다. 오히려 반대 55, 찬성 45로 반대가 더 우세하다는 조사도 있습니다. (의회에서도 집권당이 난투극 끝에 개헌안을 통과시킬 정도로 시작부터 시끄러운 개헌안이니 오죽하겠습니까?) 이렇다 보니 재외국민 투표가 개헌의 성패를 가를 ‘캐스팅 보트’로 떠오른 겁니다. 터키에서 투표권을 가진 재외국민은 5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터키 전체 유권자가 5천만 명이 넘으니 대략 10분의 1정도 됩니다. 그 중에서 유럽에서 체류 중인 터키 유권자는 250만 명이고 독일 한 나라에만 140만 명이 몰려있습니다. 이 재외국민의 표심을 잡기 위해 터키 정치인과 장관에 부총리까지 나서서 유럽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는 겁니다.

네덜란드가 개헌 지지집회를 열기 위해 네덜란드를 방문하려는 터키 외교장관의 입국을 막자 로테르탐의 거리를 점령한 터키 시위대

● 유럽이 터키를 미워해야 내가 산다?

에르도안이 화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치죠. 그런데 어느 정도껏 해야 할 텐 데, 발언의 수위가 도발. 망언. 모욕.. 뭘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합니다. 거기에 상대가 발끈하기라도 바라듯 쉬지 않고 막말을 쏟아냅니다. 불만을 표시하는 걸 넘어 아예 한 판 붙기라도 바라는 사람 같습니다. 터키가 유럽의 심기를 건드려서 얻을 게 뭔데 자꾸 달라붙는 걸까요?

에르도안이 유럽에 ‘흉한 설전’을 거는 까닭은 터키내 국수주의와 이슬람주의를 자극하려는 속셈이라는 분석입니다. 터키에서 에르도안의 지지층은 하급노동자와 농민, 지방의 보수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에르도안 역시 터키 공화국의 건립 이념인 세속주의를 지킨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슬람주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다 자신의 지지층인 보수 이슬람주의자들을 의식해섭니다. 재외 터키 국민 역시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에르도안 정권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대선의 재외국민투표 결과 에르도안의 지지율은 70%에 육박했습니다.

이 말은 유럽 대 터키, 기독교 대 이슬람의 대립구조를 부각할수록 개헌 투표가 에르도안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다. 에르도안이 유럽 각국의 집회 금지를 부당한 처사로 몰아갑니다. 또, 집회 금지에 항의한 터키 시위대가 네덜란드 경찰에 몽둥이질을 당하는 장면이 터키에 고스란히 방송되면 보수표를 결집할 것이란 계산을 갖고 있는 겁니다. 유럽에서 터키에 대한 반감이 커질수록 반 이민, 반 이슬람 정서도 확산될 것이고 그러면, 터키 내에선 국수주의와 이슬람주의가 더 큰 힘을 얻을 게 뻔합니다.

보수를 자극하고 이슬람주의자를 흥분시킨다면 에르도안은 뭐든 걸고 넘어질 태셉니다. 최근 유럽사법재판소가 직장에서 무슬림 여성의 머리 가리개인 히잡을 착용하는 걸 금지한 게 합법이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에르도안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유럽이 십자가와 초승달의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습니다. 초승달은 이슬람의 상징입니다. 즉,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 십자가 전쟁에 비유한 겁니다.

사실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을 자세히 보면 종교적 상징물의 착용금지를 이슬람에만 국한하지 않았습니다. 무슬림의 히잡 같은 베일뿐 아니라 유대인 모자, 기독교인 십자가까지 포함시켰습니다. 그것도 ‘합당한 사유’를 전제조건으로 달았습니다. 해당 기업이 ‘종교적 중립성 정책’을 영리활동의 핵심으로 여기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종교적 상징물 착용을 금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차별’이 아닌 ‘평등’을 위한 금지만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판결의 초점이 일터에서 히잡 벗기를 거부하다 해고된 벨기에와 프랑스 무슬림 여성에 대한 유럽연합의 법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 관점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는 있습니다.

난투극 끝에 집권당의 밀어 부치기로 국민투표에 부쳐진 터키 개헌

● '막말행진'에 속수무책인 유럽, 난민이 볼모

이런 에르도안의 막가파식 도발에 유럽은 침묵합니다. 네덜란드 총리가 "‘미친 발언’이다." 라고 하고, 독일 외교부장관이 “우리가 참을성이 있는 것이지 멍청한 게 아니다.” 라고 하고, 독일과 프랑스 정상이 "에르도안의 ‘나치’발언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고 의견을 주고받은 정도입니다.

정말 터키는 유럽엔 손톱만큼 걸쳐있는 ‘유럽의 변방’입니다. 지도만 놓고 보면 터키는 아시아입니다. 이런 변두리 터키의 도발에 유럽 본가의 대응이 너무 얌전합니다. 터키를 앞으로도 계속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해야 할 지 판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럽은 에르도안의 막말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습니다.

왜? ‘난민’이 무서워섭니다. 유럽은 줄곧 시리아. 이라크의 난민사태를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하다 지난해 유럽으로 건너오려다 익사한 쿠르디 사건이 터지고서야 뒤늦게 난민을 받아줬습니다. 처음엔 난민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척 하다가 정작 난민이 쏟아지니까 곳곳에서 두 손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 난민이라는 것도 시리아만 받아줬지만, 쿠르디가 시리아인이거든요.) 너도나도 국경을 폐쇄했습니다. 그런데도 쏟아지는 난민을 감당을 못하니 터키를 끌어들인 겁니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의 대부분은 난민심사에서 수용 부적격 판정을 받습니다. 유럽연합과 터키는 부적격 난민을 터키로 돌려보내는 대신 터키에 수십 억 유로 규모의 난민지원금을 주는 거래를 합니다. 난민송환협정이라 하는데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 수를 대폭 줄인 일등공신입니다. 유럽이 난민 처리를 터키에 떠맡긴 셈이지만 뒤집어 보면 터키가 난민을 볼모로 유럽의 뒤통수를 잡고 있는 격입니다. 터키는 유럽과 갈등이 불거질 때면 툭하고 난민송환협정 파기를 운운하며 유럽을 협박합니다. 이번에도 에르도안은 아니나 다를까 난민송환협정을 멈추는 건 터키 손에 달렸다며 유럽을 위협했습니다. 터키가 미워도 터키를 내치지 못하는 유럽은 에르도안의 ‘막말행진’에 속앓이만 하고 있습니다. 참다 못한 메르켈 독일 총리가 던진 한마디는 겨우 “그만해” 입니다.

EU와 터키의 난민송환협정을 비꼰 만평

에르도안이 이미 유럽과 거리 두기를 오래전부터 각오한 듯 합니다. 한때 앙숙이었던 러시아와 친밀해지면서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수십 년 째 받아주지도 않는 EU가입에 매달리기 보다, 눈엣가시 같은 쿠르드족 좀 탄압한다고 인권이니 뭐니 따지는 유럽 비위를 맞추느니 아사드 정권 구하기에 나서 시리아를 좌지우지하는 러시아 쪽에 붙는 게 중동 역학에서 유리할 것이란 계산이 깔려있는 듯합니다. '더 이상 유럽에 매달리지 않겠다. 한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투르크 제국이다. 유럽의 변방으로 지내느니 중동의 중심으로 살겠다. 그래서 난 이슬람주의의 부활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터키는 나 아니면 안 된다.' 영원한 독재를 원하는 에르도안의 속마음 아닐까요?  

정규진 기자soccer@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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