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 안식제' 공약까지.. '과로사회' 한국의 실태는?

태원준 기자 2017. 3. 2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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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충남지사가 20일 핵심적인 대선 공약으로 '전국민 안식제'를 꺼내 들었다. 국회에서 간담회를 열어 "다음 정부가 국가적, 사회적 의제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 지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긴 시간 노동을 하는 한국인에게 삶의 질을 보장하고 재충전·재교육의 기회를 줘야 한다"면서 "노사 대타협으로 기업과 공공 분야에 국민안식제가 도입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전국민 안식제의 골격은 10년 일하면 1년 쉴 수 있는 '안식년' 제도를 공공기관부터 시작해 민간 영역까지 넓혀가겠다는 것이다. 부족한 재원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2~3년간 임금을 동결하면 충당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10년 근속이 어려운 비정규직 등에 대해서도 "기업 특성에 따라 5년 일하고 6개월 안식기간을 갖거나, 3년 일하고 3개월 휴식을 취하는 등의 탄력적 운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정운찬 전 총리가 공약한 '국민 휴식제'와 일맥상통한다. 정 전 총리는 청년 진로탐색기, 중년 퇴직 시기 등 생애 전환기에 휴식 기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2012년 대선 당시 손학규 후보가 내세웠던 '저녁이 있는 삶'에 이어 이번 대선에도 '쉼표가 있는 삶'이 화두로 떠올랐다. 그만큼 한국인이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경제는 성장했지만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일하며, 얼마나 지쳐 있으며, 얼마나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 실태를 보여줄 기사와 자료는 차고 넘칠 만큼 많이 있다.

◇근로자 930만명 '시간 빈곤' 상태

2014년 국민일보는 한국인 근로자 10명 중 4명이 '시간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인의 연간 근로시간(2013년 기준)은 2163시간으로 OECD 24개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길었다. OECD 평균인 1770시간의 1.3배. 연간 2000시간 이상 일하는 나라는 멕시코, 한국, 그리스, 칠레뿐이었다. 

반면 수면시간은 OECD 꼴찌였다. 조사 대상 18개국의 일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22분인데 한국인은 7시간49분으로 33분이나 적었다. 가장 오래 자는 프랑스인은 매일 8시간50분으로 우리보다 1시간1분 더 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근로자는 남들 잘 시간에 일하고 있는 셈이었다. 

소득이 넉넉해도 시간이 부족하다면 ‘빈곤’에 빠질 수 있다. 가사노동, 보육 등 정상적인 삶에 필요한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부족 시간을 대신할 ‘대타’ 구입 등에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 부족 문제를 고려할 때 소득 빈곤 가구의 비중은 3배로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기사는 시간 빈곤 실태를 이렇게 전했다.

3세 김혜정(가명)씨는 결혼 3년차에 18개월 아들을 둔 맞벌이 ‘워킹맘’이다. 비교적 제도가 잘 갖춰진 대기업에 다니고 있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1년을 다 쓰고 복직해 회사를 다니고 있다. 오전 7시 집에서 나와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보통 저녁 7시 반에서 8시쯤 된다. 그나마 퇴근시간이 규칙적이어서 월 150만원에 출퇴근 아주머니를 고용해 아이를 맡기고 있다. 

밖에서 하루를 보내고 회사에서 돌아오면 아주머니는 퇴근한다. 아이를 씻기고 재우고, 집안정리 등 마무리를 하는 것은 김씨 몫이다. 최소 3시간은 필요하다. 야근이 잦아 200만원 육박하는 비용을 내고 입주 아주머니를 쓰는 친구들을 보면 그래도 ‘나는 나은 편’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꾸역꾸역 용쓰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남편과 함께 열심히 살아왔지만 결혼 초 전세를 얻으며 받은 마이너스통장 대출액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2014년 대한민국에서 김씨의 이야기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 일을 가진 사람이라면, 게다가 아이까지 둔 여성이라면 더욱이 심각하게 겪는 일상이다. 너무 바빠 ‘나’는커녕 내 아이와 가정도 돌볼 겨를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시대다. 그런데 ‘삶의 질’을 포기한 대가로 딱히 돈이 모이는 것도 아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이야기 ‘시간은 돈’이라는 가치가 감안되지 않아서다.

4일 한국고용정보원 권태희 박사가 미국 레비(Levy)경제연구소와 공동 연구해 발간한 ‘소득과 시간빈곤 계층을 위한 고용복지정책 수립 방안’ 논문을 보면 이 문제가 명확해진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아 시간 부족이 발생하는 것을 ‘시간 빈곤’으로 정의했다.

통계청의 2009년 한국인 시간사용 조사에 따르면 18∼70세 개인이 평균 1주일에 자신을 돌보는 데 필요한 ‘개인돌봄시간’은 최소 76시간이 필요하다. 잠자고, 씻고, 먹고, 최소한의 휴식 등을 취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다. 여기에 주말 여가 등 개인이 쓰는 필수 레저시간은 평균 주당 14시간으로 조사됐다.

한국인 평균 1주일 총 168시간에서 이 두 가지 필수시간을 빼고 남는 시간은 78시간이 된다. 하루 12시간을 근무하는 사람도 주 5일 기준으로 60시간을 일하는 것이니 시간이 남을 법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된 부분이 있다. 바로 한 가구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여성의 평균 가계생산시간은 23.74시간으로 조사돼 있다. 아이 등을 고려하지 않은 전체 평균이기 때문에 아이가 있는 경우 이 시간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평균 시간을 적용해도 일하는 여성이 근로할 수 있는 가용 시간은 54.26시간에 불과해진다. 김씨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통근시간을 포함해 하루 13시간을 근무하는 김씨는 주당 근무시간이 이미 60시간을 넘어선다. 최소 6∼7시간은 부족한 것이다. 김씨의 경우 아주머니를 ‘돈’을 주고 구매해 이 부족을 충당하고 있다.



김씨의 경우에서 나타나듯 여성이 시간 빈곤 상황에 처할 가능성은 남성보다 훨씬 높다. 연구팀에 따르면 주당 근로시간이 36∼50시간 수준인 상용직 근로자의 경우 여성의 시간부족률은 70%로 남성 36%의 2배에 달했다.

현재 정부가 여성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확대하고 있는 시간제 근로에서도 여성의 시간 부족은 높게 나타났다. 35시간 미만 근무를 하는 여성의 25%가 시간 부족을 겪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소득이 낮아질수록 시간 부족이 심해진다는 데 있다. 저소득층은 생계유지를 위해 여성도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 혼자 버는 가구의 비중도 소득이 낮을수록 높아진다. 그런데 이들은 김씨처럼 자신의 부족한 시간을 메워줄 ‘대타’를 구할 능력이 안 되거나 어쩔 수 없이 구할 경우 소득의 상당 부분을 여기에 쓰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소득 빈곤과 시간 빈곤을 동시에 겪고, 소득 빈곤이 더 심화되는 상황에 내몰린다.

연구팀이 시간 부족을 고려해 소득 부족액을 계산한 LIMTIP 모형을 적용해본 결과 소득 빈곤층(최저생계비 수급 가구)은 80%가 시간 빈곤을 겪고 있었으며, 이들이 실제 부족한 소득액도 공식 통계에서 나타나는 금액보다 크게 높아졌다. 이들 중 부부가 모두 일하는 맞벌이 가정은 시간 빈곤율이 88%에 달했다.

그러나 여성 고용률을 높이기 위한 고용·보육 정책이나 저소득층의 생계지원금 책정 등에서 시간 부족은 아직까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시간 부족 개념을 연구한 것 자체가 국내에선 이번이 처음이다.

권 박사는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 근로자, 맞벌이 등은 빈곤 함정에 빠져 있지만 사회적 지원 없이 바깥 언저리에 있는 계층이 많다는 것이 드러난다”면서 “특히 여성 취업자가 소득 빈곤인 경우 시간 빈곤의 위험도가 더 높아진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실질적인 여성 고용률을 높이려면 가사노동에 따른 비용을 실질적으로 계산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의 공식 가계생산 통계에 보조지표로 성별을 반영하는 ‘가계 위성 지표’를 마련하자는 논의에도 힘이 붙을 전망이다.

◇갈수록 줄어드는 여가 시간… 쉬지 못하는 한국인

이런 실태는 좀체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실시한 '국민여가활동 조사'에서 한국인의 여가 시간은 2014년보다 오히려 줄어들었다. 2010년 조사 때 정점을 찍은 뒤 계속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당시 국민일보 기사에는 이렇게 서글픈 통계가 담겼다.

우리 국민의 여가 시간이 2년 전보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가장 흔한 방법은 TV 시청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문화관광연구원과 공동으로 12일 발표한 ‘2016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의 여가 시간은 평일 3.1시간, 휴일 5.0시간이었다. 직전 조사인 2014년 조사 결과(평일 3.6시간, 휴일 5.8시간)와 비교하면 2년 사이에 평일과 휴일 여가시간이 각각 0.5시간, 0.8시간 줄었다. 한국인의 여가 시간은 2010년 조사에서 평일 4.0시간, 휴일 7.0시간으로 정점을 찍었었다.

여가활동 내용으로는 TV 시청을 꼽은 응답자가 46.4%로 압도적이었다. 이어 인터넷·사회관계망서비스(14.4%) 게임(4.9%) 등의 순이었다. 응답률이 가장 낮았던 여가활동은 독서(1.2%)였다.

여가를 통해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 살펴본 ‘문화여가행복지수’는 2014년 66.7점보다 소폭 상승한 67.3점을 기록했다. 연령별로 보면 20대가 69.0점으로 가장 높았다. 월평균 여가 비용은 2014년 13만원보다 6000원 상승한 13만6000원으로 집계됐다. 국민여가활동조사는 만 15세 이상 남녀 1만602명을 상대로 가구방문 면접조사 형태로 진행됐다.

◇"젊은 나이에 뇌경색이…" 과로 문화 대표하는 IT업계

KBS 1TV 시사프로그램 ‘취재파일 K’는 최근 과로사회를 조명했다. 19일 방송된 프로그램에서 취재진은 경기도 판교의 테크노벨리 일대를 찾았다. 이 곳에서 근무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는 "토요일 근무 후 머리 우측에 통증이 있어 병원에 갔더니 뇌경색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프로젝트가 있는 경우 한 달 내내 야근과 주말근무를 한다"며 "평소 5시간에서 10시간 정도 시간외 근무를 한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야근 대표 업종인 게임 업체도 방문했다. 마감 일자를 맞추려 야근과 밤샘을 반복하는 것을 이 업계에선 '크런치(깨물어 부수다)'라고 부른다. 한 직원은 "크런치 모드를 심하게 했을 때 퇴근 시각은 밤 10시 이후"라며 "주말에는 6~8시간 일한다. 한 달 넘게 이렇게 하면 지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 진다"고 말했다. 국내 1위 게임업체인 넷마블에선 지난해 20~30대 직원 2명이 사망했다. 넷마블은 이후 야근을 금지하는 등 근로 환경 개선 작업을 벌여 왔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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